소설리스트

천방 (100)화 (100/385)

100화. 친여동생

“크흠!”

병풍 뒤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울리더니, 정국공이 내친김에 아예 병풍 밖으로 나와버렸다.

“기왕 왔으니 들라 하는 게 좋겠네.”

말을 마친 정국공은 강왕세자비를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이런 일이 우리 정국공부에서 벌어졌으니, 본공은 세자비께 반드시 명명백백히 진상을 밝혀 주겠소.”

강왕세자비의 얼굴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국공.”

고개를 끄덕인 정국공이 다시 말했다.

“대공자를 들라하게.”

대공자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대공자의 모친인 유 대부인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유씨 가문이 어디 쉽게 볼 수 있는 가문이던가? 진심으로 따지고 들자면 강왕부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하는 집안이었다.

유신지가 들어온 것은 금방이었다. 

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으로, 자리에 있는 어르신들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그가 입을 열었다.

“소왕의 일은 젊은 제가 보기에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이번 일에 조금 연관된 부분이 있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으니, 제가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응당 최선을 다해 나서겠습니다.”

정국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는 참으로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이로구먼. 우리가 마침 부르려던 참인데 이리 찾아왔어.”

두 사이에 예의상 하는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가는 중에 유 대부인이 도착했다.

사실 유 대부인도 이 사건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일이 벌어졌을 때 지온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연회장에 있는 것을 보고는, 그녀도 더는 지온이 얽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온과 채 소저가 함께 어디론가 불려가자, 그제야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싶어 머리를 굴리던 참이었다.

그렇게 유 대부인이 어림짐작을 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를 모시러 온 게 아닌가?

방으로 들어간 유 대부인은 맏아들인 유신지를 보고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게야?”

질문을 던지며 유 대부인은 속으로 하고픈 말을 삼켰다.

‘이놈의 자식, 분명 연회에 안 온다더니!’

유신지는 그저 제 어머니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국공 부인이 나섰다.

“언니, 오시라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정국공 부인이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하고는 말을 끝맺었다.

“그래서 큰아드님께 있었던 일들을 들어보려고 하는 것이에요.”

상황 설명을 듣자마자 유 대부인은 모종의 음모가 있단 것을 눈치챘다.

자신의 큰아들이지만, 큰아들이 얼마나 음흉한지는 유 대부인이 잘 알고 있었다. 뱃속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구렁이가 들어찬 것 같은 아들이 아니던가. 거기에 지온 소저까지 이 일에 얽힌 것 같지 않던가! 지온 소저가 얼마나 영특한 머리와 깊은 속내를 가졌는지를 알게 된 지는 이미 오래였다.

‘두 사람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 마침 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다른 사람은 생각할 것도 없지! 무조건 두 사람과 관련된 일이다. 그나저나 대체 강왕부의 팔공자가 두 사람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인 게야?’

그러나 강한 아이는 강력한 부모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 대부인은 제 아들이 뱃속에 구렁이가 가득한 것이 음흉하여 싫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가 제 아들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도 어떻게 두 사람을 도와 일을 무마할지 맹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럼 이야기해 보아라.”

유 대부인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소왕께 그런 일이 생겼으니 진중하게 고하거라.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숨기지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

“네, 어머니.”

반듯하게 대답한 유신지가 몸을 돌려 다른 이들에게 인사를 하곤 입을 열었다.

“저는 연회장에서 마신 술로 인하여 취기가 올라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른 취기를 깰 생각으로 호숫가 근처를 걸으려다가 채 소저 일행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저는 소왕께서 작은 누정으로 사는 것을 보았던지라, 혹시 그분과 부딪힐 수 있으니 시녀에게 채 소저를 모시고 다른 곳으로 가서 옷으로 갈아입으시라 말했습니다. 채 소저는 그 시녀와 함께 떠났고 지온 소저와 소왕의 내시 사이에 작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내시가 떠난 후에 지온 소저가 무척 걱정하기에 제가 홍예교로 옮겨가 지온 소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채 소저에게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과도하게 관여하는 것이 어려우니 제게 신경을 써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저에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먼저 돌아가라 하였습니다.”

지온이 이야기한 내용과 완벽하게 아귀가 들어맞았다.

유신지가 강왕세자비를 바라보았다.

“홍예교는 그 누정 근처에 있는 곳이라 돌아갈 때 지나치게 됩니다. 저는 지온 소저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지라 지온 소저가 다른 곳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소왕을 뵙지 못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제가 있던 곳에서 각도가 맞지 않아 소왕이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소왕과는 처음부터 길이 어긋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구멍이라곤 없었다. 유신지는 요의를 보지 못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했다.

표정이 더욱 나빠진 강왕세자비가 딱딱한 얼굴로 한참을 앉아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만히 들으니, 대공자와 지온 소저의 관계가 참으로 좋아 보이는군요. 서로 따로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 부탁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말이지요?”

말인즉슨, 두 사람의 관계가 의심스러우니 유신지의 증언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소리였다.

그때 유 대부인이 웃음을 흘렸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네. 세자비, 자네 혹 우리 가문과 지씨 가문이 본래 혼약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우리가 비록 어르신들께서 하셨던 약조를 지키진 못했네만, 그동안 서로 나눴던 친분에 영향을 줄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하여 내가, 기왕지사 혼례도 물렸으니 우리 아이들에게 지온 소저를 친동생 대하듯 대하라 했었네. 그래야 아버님과 지 어르신의 깊은 교분에 누가 덜 되지 않겠나?”

유신지는 당황한 나머지 제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힘겹게 눈길을 거두며 속으로 외쳤다.

‘친동생이라니요, 어머니?!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는 것입니까!’

유 대부인이 태연한 얼굴로 기세가 등등 하자 도리어 할 말을 잃은 것은 강왕세자비였다.

어미가 나서서 친남매같은 사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계속 두 사람을 정분난 남녀로 몰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때 태의가 찾아와 요의가 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려왔다.

정국공이 몇 마디를 묻자 태의가 대답했다.

“소인은 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자네 말은 소왕께서 그저 취기가 과하셨단 말인가?”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인이 발견한 것은 그것뿐입니다.”

정국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고생했네.”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요의를 모해한 것이라면, 정국공부사람이 한 짓이 아니더라도 책임은 정국공부 역시 함께 져야했기 때문이었다. 요의가 모략에 당한 것이라도, 어쨌든 정국공부의 보안이 부족했으니 누군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요의가 제 스스로 술을 먹고 추태를 부린 것이라면, 정국공부 사람들은 이 일이 어찌된 영문인지, 오히려 요의에게 해명을 요구할 수 있을 터였다.

한편, 이미 옷까지 모두 갈아입은 요의는 아직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강왕세자비를 본 그가 허허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허허, 큰형수 오셨습니까?”

강왕세자비는 치미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물었다.

“도련님,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신지요? 정신은 괜찮으십니까?”

요의가 갸웃거리더니 대답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고 그러십니까? 저는 아무렇지 않은데요?”

강왕세자비는 불안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태의가 금방 대답했다.

“세자비마마, 팔공자께서는 이미 성주환(*醒酒丸: 술 깨는 환약)을 복용하셨으니 큰 문제없으실 것입니다. 돌아가시어 충분히 주무시면 괜찮으실 것입니다.”

강왕세자비는 태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말 그저 취기 때문이었단 말인가? 자네가 보증할 수 있는가?”

“그것이……. 맥이 정상이십니다. 소인은 다른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의심할 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한 강왕세자비는 어쩔 수 없이 요의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좀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뒷주방엔 왜 가신 거예요?”

요의가 대답하려던 그때, 그가 문가에 서있던 지온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 순간 온 정신을 지온에게 빼앗긴 요의가 소리를 질렀다.

“소저, 드디어 내가 소저를 찾았구려! 소저, 대체 어느 가문의 사람이시오? 내가 원씨 가문에 가서도 물었는데, 소저는 원씨 가문의 소저가 아니라고 하더구려…….”

강왕세자비는 화가나 속이 뻥 터질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죄를 다른 이에게 떠넘겨야 자신도 제 시어머니에게 그나마 질책을 덜 당할 수 있을 테고, 도련님의 평판도 좀 더 좋은 쪽으로 남길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요의, 이 호색한 같은 놈이, 입을 열자마자 제 호색하는 버릇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으니, 이제 이것을 자신더러 어떻게 수습을 하란 말인가!

‘다 어머니 탓이야! 오냐오냐 키워 버릇을 다 버려놓으신 게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나도 요의를 구슬려야 했던 강왕세자비는, 옆에 있던 하녀에게 눈짓을 보내 그를 침상으로 돌려보냈다.

그 틈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조금 전에 저 소저를 보셨지요? 쫓아가시고 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대충 대답하고 넘어간 요의는 지온에게 탐욕스런 시선을 고정한 채, 선량한 사람인 척 인자한 미소를 지으려 애를 써댔다.

“소저, 아직 내가 한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았소!”

이 모습에 정국공의 미간이 바짝 좁아졌다.

‘내 일찍이 강왕부의 팔공자가 방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구나!’

지금 이곳에 있는 어른들만 해도 몇 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저 어린 규수의 이름이나 알자고 붙들고 늘어지고 있다니……. 온통 색에 정신이 빠져 하는 말이며 표정이 어찌나 흉한지 말로 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유 대부인은 당장에 지온을 제 몸 뒤로 데려와 숨기며 어떻게든 요의의 시선을 막아보려 애를 썼다.

“도련님!”

강왕세자비가 낮게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강왕세자비는 속으로 하고픈 말을 삼켰다. 

‘그렇게나 큰 창피를 당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쉬워 죽겠다는 듯, 시선을 돌린 요의가 짜증이 났는지 대꾸했다.

“일은 무슨……술을 좀 많이 마신 거지 뭐긴요. 큰형수,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은 겁니까?”

강왕세자비는 그야말로 요의의 목이라도 졸라 황천으로 보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지금 뭔가? 본인을 위해 나섰더니, 도리어 귀찮아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 본인이 시어머니의 심장이고 보배라지만, 앞으로 작위를 계승 받을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은 해야 할게 아닌가!

“네, 도련님. 많이 마시셨지요. 많이 마시고 뭘 하셨습니까?”

강왕세자비가 차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은 조금 전 뒷주방에서 돼지를 껴안고 뽀뽀를 하고 계셨습니다!”

눈만 끔뻑거리던 요의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큰형수, 농담이시죠? 내가 왜 돼지를 안아요.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

침묵하던 강왕세자비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제 화조차 나지 않았다. 강왕세자비가 물었다.

“도련님, 설마 미인을 안고 있는 줄 아셨습니까?”

“그랬죠! 조금 전에 예쁜 여인이 지나가기에 달려서 쫓아가다 놓쳐……그대로 잠들었는데…….”

강왕세자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발 내가 죄를 뒤집어씌울 사람 하나만 찾게 기회를 좀 주면 안 되겠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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