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99)화 (99/385)
  • 99화. 누군가 꾸민 음모

    정국공 부인의 부름에 후원으로 불려나온 강왕부의 세자비, 강왕세자비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막내 도련님이 여색을 밝힌다는 것은 알다 마다였다.

    ‘그러나 아무리 여색을 밝힌다지만 짐승인 돼지에게까지 그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게 아닌가?!’

    정국공 부인이 미안한 듯이 말했다.

    “과음한 듯하네. 아랫것들이 잘 살폈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됐네.”

    강왕세자비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련님인 요의가 저 스스로 술을 마시고 못난 꼴을 보인 것을 어찌 정국공부 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소식이 시댁에 들어가면…….’

    강왕세자비가 몸을 떨었다.

    강왕부엔 모두 여덟 명의 공자가 있었는데, 그중 셋이 정실 소생이었다. 큰아들, 그러니까 그녀의 남편인 강왕세자와, 어려서 태자의 배동으로 입궁했다가 지금의 황제가 된 여섯째, 그리고 가장 어린 여덟째 요의가 정실 소생이었다.

    항간에는 조모가 맏아들과 장손을 가장 귀히 여긴다던가?

    그러나 강왕비가 가장 애지중지, 금이야 옥이야 아꼈던 자식은 바로 이 막내아들인 요의였다.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싸고돌며 오냐오냐 키웠더랬다.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자랐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시어머니의 성정이 워낙 괴팍하다 보니 강왕세자비도 이만저만 구박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지난 몇 년간 아이가 많이 커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만약 이 일이 강왕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분명 온갖 질책이 자신에게 날아들 터였다.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강왕세자비의 얼굴색이 달라졌다.

    강왕세자비가 입을 열었다.

    “너무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리 저희 도련님께서 취하셨다지만, 돼지우리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데, 그조차 구분하지 못했을 리가요?”

    정국공 부인은 그녀의 말에 숨은 의미를 파악했다. 그녀의 말은 지금 누군가 요의를 두고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이 일은 반드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만약 강왕부에서 국공부가 뭔가 손을 쓴 거라 생각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가만히 있다가 원수를 지게 생긴 것이 아닌가?

    정국공 부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했네. 소왕을 모시는 내시 둘이 바로 곁채에 있는데, 가서 질문이라도 하시겠나?”

    강왕세자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 사람이 곁채로 들어가자 무섭고 놀라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는 내시 두 사람이 보였다.

    강왕세자비를 본 두 사람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의자에 앉은 강왕세자비가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자네들 주인이 대체…….”

    어린 내시들은 감히 숨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얘기를 다 들은 강왕세자비가 미간을 좁히며 정리했다.

    “그러니까 지금 요의 도련님이 본래 다른 이와 그곳에서 선약해놓고, 다른 미인을 발견해 창문을 넘어 쫓아갔다가 사라졌는데, 나중에 다른 이들에게 발견된 곳이 돼지우리였다는 말이냐?”

    내시 둘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중 하나가 말했다.

    “저희가 막 국공부 사람에게 저희 주인을 찾아 달라 부탁을 드렸을 때였습니다. 아직 찾지는 못했을 때이온데, 이미…….”

    “도련님이 그리 많이 취한 것은 아니지 않았더냐? 정말 누군가 지나가긴 한 것이야?”

    내시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왕세자비가 말했다.

    “그럼 이상하지 않으냐? 술도 그리 많이 취한 것도 아닌데 어찌 정신을 그리 놓을 수가 있어?”

    정국공 부인이 얼른 끼어들었다.

    “세자비, 잠시만 기다리시게. 우리가 이미 태의를 모셨네.”

    정말 술에 취한 것인지는 잠시 후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자비가 몇 걸음을 떼다가 다시 물었다.

    “그 여인이 어찌 생겼는지, 자네들 기억하는가?”

    내시들이 냉큼 대답했다.

    “기억하지요! 차림이 무척 특이했습니다. 담청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마치 도포 같았습니다.”

    이번엔 정국공 부인의 얼굴색이 변했다.

    특징이 너무도 확실해서 듣자마자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강왕세자비는 이미 정국공 부인에게 묻고 있었다.

    “오늘 그런 옷차림을 한 여객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누구였었지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국공 부인이 입을 열었다.

    “지씨 가문의 소저네. 대장공주님의 대리로 축하를 하러 왔네.”

    “불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묻고 있었지만,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어조였다.

    “당연히 되지…….”

    “그리고 채 소저란 분도 함께 불러 주시지요.”

    * * *

    시녀가 와서 말을 전했다.

    지온은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했지만, 채 소저 모녀는 금방 당황하며 불안에 빠졌다.

    요의가 인사불성이 되어 돼지와 뽀뽀하고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이들 모녀는 분풀이했다는 쾌감과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다.

    요의가 그리 큰 수치를 당한 것이 통쾌하기도 했지만, 혹시 자신까지 엮이면 어쩌나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진짜 불려가는 일이 생기니, 걱정은 더욱 커졌다.

    ‘이 일에 우리가 관련된 걸 알아차리지는 못하겠지?’

    모녀가 불안해하며 지온을 보았을 때, 마침 지온도 두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지온은 얼굴에 웃음까지 띠고 있었다.

    지온의 미소에 모녀의 불안도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채 소저는 요의의 얼굴조차 보질 못하지 않았던가? 그 부분만 확실하게 한다면 문제는 없을 터였다.

    시비를 따라서 세 사람은 후원으로 들어갔다.

    올 이들은 모두 자리에 있었다.

    상석엔 노부인이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론 정국공 부인과 강왕세자비가 있었다.

    놓여 있는 병풍으로 드리운 그림자를 보아하니 아마도 정국공, 본인도 있는 듯했다.

    들어선 세 사람이 각자 예를 올렸다.

    지온은 평소와 크게 태도가 변하지 않았지만, 채씨 가문의 모녀는 떨고 있었다.

    강왕세자비가 먼저 물었다.

    “채 소저, 우리 도련님과 자네가 만날 약속을 했다 들었는데 맞는가?”

    무례히 들어오는 질문에 채 소저가 수치심을 꾹 참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련님을 미워하는 자네가 도련님을 해치려 한 것인가?”

    채 소저의 모친이 급히 나섰다.

    “세자비께서는 사건을 명철하게 살펴주십시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제 여식은……!”

    “자네에게 물은 적 없네!”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세자비가 호통을 치자 채 소저의 모친은 괴로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채 소저가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아닙니다. 소녀는 소왕의 얼굴조차 뵙지 못했습니다.”

    세자비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우리 도련님이 싫다던 자네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갑자기 도련님이 말하는 대로 오다니, 뭔가 꿍꿍이가 있던 건 아니고?”

    “아닙니다!”

    이런 식의 추궁에 깊은 수치심을 느낀 채 소저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저는 그저 소왕께 확실히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확실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니, 평소엔 기회가 없었단 말인가? 왜 하필 오늘을 골라 따로 만나려 한 것인가?”

    강왕세자비가 서슬이 퍼렇게 그녀를 몰아세웠다.

    “더구나 모녀가 같이 왔지 않나! 우리 도련님께 조건을 제시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냔 말일세!”

    채 소저의 모친도 더는 참지 못하고 분노를 토했다.

    “말이라고 다하면 되는 줄 아십니까! 저희 집안은 이미 이전에 소왕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소왕께서 들으셨습니까? 얼굴조차 비추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집안 바깥양반이 견디지 못하고 수락하려는 것을 저희 모녀가 반대했지요. 그래서 소왕님의 얼굴을 보려고 온 것인데……!”

    서로 옥신각신 논쟁이 오가자, 결국 듣다 못한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채 소저가 소왕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말을 증명해줄 사람이 있지 않던가? 물어보면 될 일이네. 사람도 만나지 못한 이에게 소왕을 모해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겠나?”

    명성이 상당한 정국공 노부인의 말에 더는 억지를 부릴 수 없었던 강왕세자비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요의를 모시는 내시와 국공부의 시녀 모두, 채 소저가 요의를 만나려다 중간에 돌아가 금방 옷을 갈아입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애초에 무엇을 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채 소저를 더는 의심할 수 없게 되자, 강왕세자비의 화살은 지온에게 돌아갔다.

    “지 소저, 자네는? 왜 그곳에 있었던 것인가? 도련님께서 자네를 쫓아간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지온은 차분하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뒤에 하신 그 질문에 소녀가 대답을 드리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녀는 당시 채 소저와 함께 옷을 갈아입으러 나왔다가, 채 소저와 함께할 시녀가 있어, 금방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정을 지나가게 되었겠지요. 그 뒤로 저 역시 소왕을 뵌 일은 없었습니다.”

    강왕세자비는 바로 허점을 틀어쥐었다.

    “채 소저와 함께 환복을 하러 갔으면서 왜 중간에 돌아왔단 말인가?”

    “그것은…….”

    지온이 망설였다.

    강왕세자비는 지온을 진득하게 쳐다보며 끝까지 추궁했다.

    “왜? 말을 못 하겠는가!”

    지온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정말 말씀드려야 합니까?”

    “말하게!”

    의심스러운 정황이 떡 하니 보이는데, 그 기회를 강왕세자비가 어떻게 놓치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이가 음모를 꾸며 요의 도련님을 궁지에 빠트렸다는 것만 밝혀지면, 시어머니의 분노도 왕세자비 자신에게 곧바로 쏟아지진 않을 터였다. 골치 아프게 엮여봤자 한 다리 걸치는 정도일 뿐이겠지.

    그러나 지온은 왕세자비의 바람과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누군가 채 소저를 지켜보고 있고, 채 소저가 그로 인해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에 제가 그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씨 가문의 대공자와 부딪힌 후에 일부러 채 소저를 다른 곳으로 피하게 했지요. 믿기지 않으시면, 소왕을 모시는 내시에게 물어보시지요. 제가 당시 내시를 추궁했었는지 물으시면 되실 것입니다.”

    이는 요의가 채 소저를 위협하고 있다는 추문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강왕세자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요의 도련님이 이런 일을 벌인 적이 한두 번인가? 어차피 요의 도련님의 평판은 시궁창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요의를 모시는 내시가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였다.

    ‘쓸모없는 것!’

    이를 악문 강왕세자비는 추궁을 이어갔다.

    “그 후는? 자네가 곧장 연회장으로 돌아간 것을 누가 증명해줄 수 있는가?”

    “그것은…….”

    지온이 잠시 망설이자, 강왕세자비가 당장에 그 틈을 파고들었다.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는가!”

    지온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저는 본래 유씨 가문의 대공자님을 이 일에 연루시키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세자비께서 반드시 답을 듣고자 하시니, 소녀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당황한 강왕세자비는 주춤하고야 말았다.

    “자네…….”

    강왕세자비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이 말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지금 유씨 가문의 대공자와 따로 밀회를 했기 때문에, 대공자가 증명해줄 수 있단 소린가?’

    만약 진짜 유씨 가문이 이 일에 엮인다면, 강왕세자비 역시 계속 이리 강하게 추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 소저는 본래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와 혼약이 있지 않았던가? 둘째와 혼약을 무르고 다시 대공자와 함께 하다니, 명성에 흠이 갈 것은 겁도 안 나나 보군.’

    그러나 이어지는 지온의 이야기는 또 다시 왕세자비의 예상을 비껴가고 있었다.

    “누군가 채 소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저 역시 마음이 크게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마침 만나게 된 유씨 가문의 대공자께 이 상황을 말씀드리자 대공자께서는 저를 안심시키시고는 자신이 유념하고 있을 테니 제게 그만 돌아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지온이 강왕세자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혹 증명을 원하신다면…… 소녀가 깊이 생각해도 보아도 두 가지 방법뿐이로군요.

    첫 번째는, 대공자님의 증언을 듣는 것입니다. 제가 채 소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유씨 가문의 대공자께 말씀을 드리고 곧장 돌아갔었다는 사실을, 대공자께서 증언해주실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당시 연회장에 계셨던 다른 부인들께 제가 일찍 돌아오지 않았는지 여쭤보시면 될 겁니다. 시각을 계산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소왕이 그리되신 시각에 저는 이미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것도 돌아온 지 한참 지나 있었지요.”

    정국공 부인이 입을 열었다.

    “다른 부인들에게 물을 것 없네. 내가 연회장 상황을 확인하고 있던 터라, 지온 소저가 금방 돌아온 것은 확실하네. 술 두 잔을 비웠을 때 소왕께 일이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그녀가 증명하고 나서자 강왕세자비도 그 부분은 더 추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른 것을 추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중간에 아무런 수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하인이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노부인, 부인. 유 태사부의 대공자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딱 그 짝이 아니던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