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98)화 (98/385)
  • 98화. 뽀뽀해 줘!

    채 소저에게 말을 전하고 앞서가던 내시는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오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가, 시녀와 함께 돌아가는 채 소저를 보게 되었다. 깜짝 놀란 내시가 그녀를 붙잡기 위해 황급히 뛰어왔다.

    “아니, 어디를 가는 것이오!”

    뛰어오는 내시를 붙잡은 지온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로 채 소저를 뒤쫓는 것입니까?”

    어린 내시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자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로군. 자네는 강왕부 사람이 아닌가? 소왕을 따르던 자가 아니냐? 주인을 모시지 않고 예서 뭘 하는 것인가? 소왕께선? 어디 가셨는가?”

    어린 내시가 말을 더듬었다.

    “오, 옷을 갈아입으러 가셨습니다. 그, 그래서…….”

    “그렇다고 이리 함부로 나다닌단 말인가!”

    차가운 얼굴이 된 유신지가 질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이 될 말인가! 자네가 이리 주인을 섬기는 것을 강왕비께선 알고 계시는가?”

    대꾸조차 하지 못하는 내시를 유신지가 툭, 밀어냈다.

    “어서 소왕께 가보게!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 * *

    요의는 온갖 망상을 하고 있었다.

    술은 색(色)을 부르는 법…….

    예로부터 호색(好色)하는 이들 중, 술을 즐기지 않는 이는 적었다.

    지금의 요의 역시 마신 술로 적당히 취기가 올라 제대로 흥이 오른 상태였다. 거기다 채 소저의 부드럽고 낭창거리는 몸을 떠올리니 가슴에 불이 난 듯,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난번엔 내 면전에 대고 그리 신랄하게 욕을 퍼부었더랬지? 오늘은 뭐라고 욕을 하는지 보자꾸나! 오늘 널 울리지 않으면, 이 요의가 성을 간다!’

    갖은 상상을 하던 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국공, 거기서 뭐 하시고 계십니까?”

    어딘지 익숙한 음성이 들리는 동시에 순간 요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획 하고 고개를 돌리자 들어온 루안의 얼굴에, 요의는 심지어 취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루안, 자네가 왜 여기 있나!”

    * * *

    두 사람의 악연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루안은 막 북양에서 도망쳐 나와 도성에 입성했던 때인지라 가장 힘없고 초라한 시절이었다.

    당시 지금처럼 방탕한 공자였던 요의는, 출신도 좋으면서 능력도 뛰어난 잘난 녀석들과 비교되어,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것을 가장 싫어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틈만 나면 시비를 걸었고, 결국 루안의 손에 걸려 호된 교육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한 채로 가만히 있을 요의가 아니었다. 자신의 친형이 황제가 됐는데, 당하고 있을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요의는 새로 황위에 오른 황제를 찾아가 있었던 일을 고해 바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꾸지람과 질책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황제는 그에게 당장 부왕의 봉지로 가란 말과 함께, 도성에서 머물지 못하도록 엄명까지 내렸다.

    그렇게 요의는 그길로 도성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가슴에선 타는 듯한 분노가 끓었지만, 요의는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루안은 폐하의 심복이야. 이 친아우보다 더 가까운 심복!’

    어렸을 때 입궁하여 태자의 배동(陪童)으로 자란 친형님에 대해 요의는 잘 알지 못했다. 두 형제지간에 깊은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강왕부에서 하듯 생짜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이것이 요의가 그동안 루안을 멀찍이 피해 다니던 이유였다.

    루안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국공께선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근처에 있는 작은 누정은 여인들이 올 수도 있는 곳입니다.”

    요의가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자네 그건 무슨 뜻인가? 지금 내가 몰래 훔쳐보기라도 한다는 소리 같은데?”

    “저는 그리 말한 일이 없습니다.”

    루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좀 전에도 보니 소저 한 분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셨습니다. 혹시라도 부딪혔더라면 좋지 않았겠지요.”

    그 소리를 들은 요의는 내심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채 소저인가? 역시 왔구먼!’

    그러나 루안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다행히 중간에 대공자를 만나 소저는 다른 곳으로 보내라 전했습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오한이 몰려드는 요의였다.

    “그 여잘 왜 돌려보내?”

    루안이 이상한 소릴 한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이곳에 남객이 있으니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한 것이 이상한 것입니까?”

    기대했던 밀회가 훼방으로 파탄이 났지만, 타는 속을 말도 할 수 없는 요의였다. 이유가 저리도 떳떳하니, 정말이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예쁜 여자도 없고, 더 여기 있어 봐야 뭔 재미가 있겠어.’

    기운이 쭉 빠진 요의가 입을 열었다.

    “술을 많이 마셨나? 머리가 아프군. 누정에 들어가 좀 쉬어야겠네. 그건 되겠지?”

    그야 루안이 뭐라 할 것은 아니었으니 그저 당부만을 남겼다.

    “여가솔들이 실수로 들어가지 않도록 사람을 세워 문 앞을 잘 지키도록 하십시오, 국공.”

    대답조차 귀찮았던 요의가 그대로 누정 안으로 들어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루안은 요의가 들어가자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루안은 횽예교 위에 있던 유신지와 지온을 찾아갔다.

    유신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루안은 해명하는 것도 귀찮았다. 오늘 지온이 사용한 향이 다소 강했던지라 금방 향을 맡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루안이 지온에게 물었다.

    “원래 계획은 뭐였소?”

    지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를 노부인께서 쉬시는 곳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연회에 참석한 여손님들은 그 누가 되었든 저 음란마귀와 엮이면 명성에 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명망과 덕이 높은 노부인만이 영향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죄를 물을 수가 있었다.

    정국공부는 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가 워낙에 탁월한 집안으로 명성이 무척 높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당장 황제부터 요의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지온의 말을 가만히 생각하던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그 방법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나, 좀 부족한 듯싶습니다.”

    루안과 지온, 두 사람이 그를 바라보자 유신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렸을 적에 둘째가 얼마나 개구쟁이였는지 모릅니다. 사흘에 한 번씩 손을 봐주지 않으면 집안에 남아나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수를 하나 냈는데, 그 후로는 아주 얌전해졌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 아래 유신지가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녀석의 바지 속에 바퀴벌레 한 마리를 넣었더니 녀석이 놀라 바지를 벗어 던지고 온 집안을 뛰어다녔습니다. 말간 엉덩이를 온 집안사람들이 보고 말았으니, 그 후론 얌전히 사람 구실을 하더군요.”

    “…….”

    두 사람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건 어린 날에 저지른 잘못으로 기억해야 하지 않은가? 누가 제 동생을 그렇게 괴롭힌단 말인가?’

    지온의 가슴에 유모지를 향한 동정심이 뭉클하게 올라왔다.

    그러나 루안은 생각이 다른 듯 했다.

    “괜찮은 방법 같군. 실수로 노부인과 부딪히는 일이 생겨도 잠깐 기만 죽어있다 다시 살아날 사람이오. 그러나 다시없을 창피를 당한다면…….”

    루안은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창피를 준다?’

    * * *

    요의는 무척 실망했다.

    ‘잘만 진행되던 밀회를 그놈의 루안, 그 자식이 다 망쳐버리지 않았는가! 예쁜 여인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남아 내가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어차피 이미 술도 마셨겠다, 그만 돌아가야지. 다음엔 채 소저에게 주루에서 보자고 연통을 넣어야겠구먼. 거기라면 다른 이들에게 방해받을 일도 없을 테니, 차라리 더 시원하게 즐길 수 있겠어!’

    이리 생각하니 요의의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막 일어나 떠나려던 찰나, 시선 끝에 무엇이 걸린 것인지 그가 돌연 창가를 향해 달려갔다.

    화원의 작은 오솔길로 담청색의 뒷모습이 느릿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화원에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피어있는 꽃들 사이에서 소박하고 간결한 단장은 오히려 더욱 시선을 끌었다.

    치마 끝이 어딘가에 걸린 듯, 가만히 걷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때, 요의는 순간 온몸에 흐르는 피가 단번에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선녀님! 그때 그 선녀님이다!’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그녀를 여기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전화위복이로구나!’

    기쁨에 겨운 요의는 문을 열고 나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그대로 창틀을 넘어 튀어나갔다.

    “소저, 소저, 기다려주시오!”

    깜짝 놀란 어린 내시들이 급히 문을 열고 요의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정국공부의 화원이 크기도 컸거니와 정원수며 꽃들이 사방으로 자라있어서, 처음부터 뒤처져 따라가기 시작했던 두 사람은 금방 요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허둥지둥 정신없이 요의를 찾던 내시 둘은 조용히 머리를 맞댔다.

    “어쩌지?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는데, 국공부 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찾자고 할까?”

    그러자 다른 내시가 곤란한 듯 대답했다.

    “팔공자님께서 그 소저를 뒤쫓아 가셨잖아. 혹시라도 지금……정국공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가 팔공자님께서 방해라도 받으시면 어떡하려고?”

    서로 시선을 맞댄 두 사람의 마음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제 주인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괜히 자신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바람에 좋은 일을 망쳤다간 돌아가 벌을 받게 될 터였다.

    “그래도 여긴 정국공 부인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오늘 귀한 부인들과 규수들께서 적잖이 오셨는데, 혹시 팔공자님께서 자칫 실수라도 하셨다가는…….”

    제 주인 인덕이 어떤 인덕인지 그들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팔공자님의 눈이 돌아가면, 공자님이야 왕비마마가 싸고돌 테지만, 자신들은 비참하게도 곤장 수십 대는 맞아야 할 터였다.

    결국, 두 사람은 시종을 찾아 길잡이로 세우는 절충안을 선택했다.

    그렇게 계속 찾아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으로 사람들이 불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인부터 손님까지, 하나같이 잔뜩 흥분해서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는데 과거의 경험들이 두 내시의 가슴에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지나가는 하인 하나를 붙들고 어찌 된 일인지 물은 내시는 하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에 그만 공황에 빠지고 말았다.

    “강왕부의 여덟째 공자께 일이 생겼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내시의 질문에 곤란한 얼굴을 한 하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서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 말에 내시 둘은 정신없이 다른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 달리고 있자니, 어느 순간부터 가축을 사육하는 곳에서 나는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공기 중에 흐르는 것이 아닌가?

    먼 길을 돌아 어렵게 주인이 있는 곳에 도착한 내시들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밀쳐내며 앞으로, 앞으로 밀고 나갔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팔공자님이……지금 돼지를 껴안고 뽀뽀해 달라고 하시는 건가?’

    * * *

    정국공이 도착했을 때, 이미 돼지우리 주변은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사람들로 꽉 둘러싸여 있었다.

    요의의 얼굴은 붉은 기운이 올라있는데다 눈빛도 흐릿한 것이, 과음한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커다란 돼지 위에 드러누운 그의 머리카락과 옷에는 온통 돼지의 똥오줌과 더러운 오물이 묻어 있었다. 더럽기도 할뿐더러 냄새가 지독하기까지 했으니…….

    정국공은 순간 현기증이 났다. 

    ‘소왕이란 사람이 어찌 이리될 때까지 술을 마신단 말인가!’

    아랫것들에게 당장 그를 밖으로 끌고 나오라 명한 그는, 손님들에게도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 달라 요청했다.

    정국공의 체면을 생각해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채 흥분을 갈무리하지 못한 손님들은 서로 바삐 시선을 교환하고는 웃음을 참아가며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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