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97)화 (97/385)

97화. 연락을 받은 채 소저

지온이 방으로 들어섰다.

정국공 노부인은 나한침상에 기대어 있었다. 시녀들은 조용히 노부인을 향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늙으니 이렇게 아무 소용이 없네. 술 몇 잔도 견디질 못하는군.”

노부인이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지 소저 앉게나.”

시녀들이 물러갔다.

여름의 문턱을 넘어선 날씨는 점점 무더워지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노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봉아(鳳兒)가 한 번도 다른 이를 대신 보낸 일이 없었는데, 소저를 무척 좋아하는가 보네.”

멈칫했던 지온은 대장공주의 아명이 봉접(*鳳蝶: 호랑나비)이었던 것이 떠올라 웃으며 대답했다.

“소녀의 큰 영광입니다.”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지온의 태도에, 노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지온을 다시 눈여겨보며 물었다.

“그 아이는 조방궁에서 잘 지내고 있는가? 몸은 건강하게 지내고?”

지온이 대답했다.

“공주마마께서 얼마 전에 고뿔에 걸리셨으나 지금은 모두 나으셨습니다. 다소 여위어 보이긴 하시지만 정신은 여전히 좋으십니다.”

노부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아이도 전엔 건강했었지. 일 년이 가도록 몸 한 번 아픈 일이 잘 없던 아이였는데 이젠 자주 몸져눕는구먼.”

지온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지온을 보며 노부인이 말했다.

“자네가 지 재상님의 손녀라고?”

“그렇습니다.”

노부인이 기억을 더듬었다.

“자네의 부모님을 본 적이 있네. 지씨 가문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때였는데 자네의 부모가 그리 빨리 떠날 줄은 정녕 아무도 몰랐지.”

지온의 얼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저와 연이 짧으셨던 것이지요.”

“자네도 참 명이 박한 아이네.”

노부인이 탄식했다.

“그리 떠나 그길로 장장 구년간 부모를 보지 못하고 살지 않았는가. 앞으로 대장공주를 자주 찾아가게. 그 아이도 젊었을 때, 아이를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는데 끝내 가지질 못했어. 부모의 연이 없는 자네와 자녀의 연이 없는 그 아이가 마침 조방궁에서 만났으니,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 아니겠나.”

지온이 대답했다.

“공주마마께서 싫어하지 않으신다면, 소녀는 당연히 좋습니다.”

노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대장공주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좋아하는 먹거리나, 즐기는 일 등등을 듣고 있으니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몹시 좋아 보였다.

지온조차 만약 부마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대장공주는 분명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노부인이 다소 지쳐보이자, 지온은 그만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왔다.

그녀가 떠나고 옆방에 있던 정국공 부인이 노부인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머니, 공주마마가 저 아이를 무슨 생각으로 보내셨을까요? 설마하니 혼자 있기 적적하셔서 수양딸이라도 삼으시려는 걸까요?”

대장공주와 선제, 남매 두 사람은 모두 자녀를 많이 두지 못했다. 선제는 그나마 태자라도 있었지만 대장공주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부마가 있었을 적엔 부부가 양자를 들여 키울 생각도 하긴 했었다. 그러나 부마가 돌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대장공주의 마음이 크게 닫혀버렸고, 공주가 그대로 조방궁으로 출가한 후로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부인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봉아는 이미 출가한 몸이니 양녀를 들일 생각은 아닐 게야. 그러나 이런 날에 보낸 걸 보면 저 아이를 키우고 싶은 게 맞을 게야.”

그녀가 잠시 말을 멎었다.

“우선 기다려 보세. 내 보니, 지 소저가 뭔가 따로 생각이 있는 것 같더군.”

* * *

부주가 여기저기서 알아 온 소식들을 전해들은 유신지의 얼굴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일어난 그가 자리를 떠나자 그를 본 루안 역시 유신지를 따라 나섰다.

“무슨 일이지?”

유신지가 감정을 조절하며 대답했다.

“채씨 가문의 안주인이 조방궁에 갔었다는군.”

루안이 멈칫하며 중얼댔다.

“화신첨을 뽑은 것인가…….”

“알 수 없소. 아무튼 사방전에 들렸다 돌아간 후에 채씨 가문의 태도가 많이 풀어졌다고 했소.”

두 사람은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화신점의 영험함이 귀신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화신첨을 뽑은 이들의 원을 이루어 준 것은 모두 지온이었다.

만약 채 소저의 모친이 진짜 화신첨을 뽑았다면, 이번에 그녀는 요의와 부딪히게 될 가능성이 컸다.

이때, 부주가 또 다른 소식을 전했다.

“공자님, 채씨 가문의 안주인과 채 소저도 왔습니다.”

유신지가 흠칫 놀랐다.

“두 사람이 어떻게……?”

순간 루안이 유신지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맞부딪힌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평소 같으면 채씨 가문의 모녀는 이런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두 사람을 도와 초청첩자를 얻어다 주지 않았다면 말이지.’

채씨 가문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던 것을 생각하면, 초청첩자를 얻어준 것이 누구일지는 뻔한 일이었다.

흘러가는 일에서 음모의 냄새가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유신지가 안절부절못하여 입을 열었다.

“담이 어찌 저리 큰 게요? 자그마치 소왕이오! 그것도 국공부에서 일을 벌일 생각을 하고서 어찌 말 한마디도 전할 생각을 안 해!”

유신지의 말을 들으며 루안은 생각했다.

‘본디 그리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왜 다른 이에게 도와 달라 하냐고 물을 사람이다.’

그러나, 이미 자신들이 알게 되었으니 루안은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강왕부의 팔공자를 지켜보지.”

루안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우리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오.”

루안의 말에 유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그 독 두꺼비 같은 놈을 손봐주기 위해 나온 참이 아니던가?

‘이대로 그냥 가면 섭섭하지!’

* * *

반쯤 취기가 올라 불콰해진 요의는, 아리따운 여인들이 보고 싶단 생각에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의의 신분이 있으니 자연히 누구도 일어서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얼큰하게 취한 그는 어린 내시를 데리고 호숫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호수의 다른 쪽에선 여객들의 연회가 있었던 것이다.

“미인들을 보러 가자, 미인들…… 끅……!”

우로 비틀, 좌로 비틀, 비틀비틀 움직이던 그는, 끝내 최적의 장소를 찾아내어 태호석(*太湖石: 장쑤성 타이후에서 많이 나는 돌로 주름과 구멍이 많아 정원석으로 많이 사용하는 돌)의 움푹 들어간 구덩이로 몸을 숨겼다. 그 그리고 작게 뚫린 구멍으로 여객들의 연회장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예쁘구나. 저것도 괜찮고……. 곱게 늙은 중년 부인은 또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지! 그러나 그래도 나이가 어린 것이 안았을 때 손맛이 좋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요의의 눈에 채 소저가 들어왔다.

“오구! 네가 역시 왔구나, 왔어! 그래, 처음부터 이리 말을 잘 들었으면 오죽 좋았겠느냐?”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귀한 것들로 치장한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미간을 좁힌 채 우수에 찬 눈빛을 한 채 소저는 유달리 시선을 끌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불에 덴 듯 가만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된 요의는 당장 옆에 있던 내시부터 불렀다.

“빨리, 빨리, 채 소저에게 내가 보잔다고 전해라, 빨리……!”

“예, 공자님.”

대답을 한 내시가 물었다.

“팔공자님, 그런데 어디서 보자고 할까요? 여기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요의가 홍예교(*虹蜺橋: 교량 밑이 무지개 같은 반원형의 형상을 하고 있는 다리) 근처에 있는 작은 누정(樓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보자 해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내시 하나는 가서 채 소저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다른 하나는 누정(樓亭)을 미리 정돈해 두기 위해 떠났다.

요의의 연락을 받은 채 소저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채 소저의 모친은 근처에 있는 다른 이의 상 자리만 흘끔흘끔 계속해서 살펴댔다.

‘지 소저는 대체 언제 오는 것이야? 설마 딸 아이 혼자 보내야 한단 말인가!’

안 될 말이었다. 혹시나 일이라도 생겼다간 딸자식 목숨을 잡게 되지 않겠는가!

당황한 모녀는 정신이 쏙 빠져 지온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영문을 모르는 내시는 옆에서 계속 재촉해댔다.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주먹만 꾹 말아 쥔 채 소저의 손에서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다행히도 지온은 그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지온의 모습이 눈에 보이자, 안도한 채 소저는 그제야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수로 그런 것처럼 상에 놓여 있던 과일주를 쏟은 채 소저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오, 옷을 갈아입어야겠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모친이 어렵게 웃음을 지었다.

“다녀오너라. 조심하고……….”

근처에 있던 다른 부인이 그 말을 듣고 무시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역시 별 볼 일 없는 가문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옷을 갈아입을 거면 당당하게 갈아입고 오면 되는 것을, 뭘 그리 어쩔 줄을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던 채 소저가 긴장을 했는지 제 치맛자락에 발이 걸리자,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한 지온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으신지요?”

고개를 끄덕인 채 소저가 지온을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제, 제가…….”

그녀가 너무 긴장한 듯 보이자 지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함께 가드릴까요?”

채 소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손님들은 이상한 의심일랑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다시 술잔을 들고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 * *

요의는 이미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누정 근처를 얼쩡거리고 있을 때, 이미 루안과 유신지는 석가산(*石假山: 정원 따위에 돌을 모아서 조그마하게 만든 산)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놈, 분명 몹쓸 짓을 할 생각일 거요.”

유신지가 중얼거렸다.

어린 내시 둘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딱 봐도 의도가 좋지가 못했다.

루안은 말없이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허리를 세우며 시선을 들자, 유신지도 루안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과연 그곳에는 지온이 다른 소저 한 사람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저 소저가 채 소저겠군?”

루안 역시 유신지처럼 함께 오는 소저가 채 소저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채 소저도 외모가 출중하구나. 요의, 저 망나니 같은 놈은 외모를 밝혀도 너무 밝히는구나.’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요의와 마주하게 될 것만 같은 순간, 견디지 못한 유신지가 앞으로 나섰다.

“어이쿠!”

일부러 급하고 빠르게 걸어 나간 유신지는, 그녀들과 함께 있던 시녀와 부딪혔다.

정국공부의 접객 시녀는, 자신과 부딪힌 이가 귀빈이란 것을 확인하자마자 땅에 납작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채 소저는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내에게 겁을 먹고 지온의 뒤로 숨어 덜덜 떨었다.

지온도 매우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유 대부인이 유씨 가문의 공자들은 모두 안 왔다고 했는데? 대공자가 여기 왜 있는 거지?’

유신지가 미안한 감정이 가득한 얼굴로 시녀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급하게 걸음을 옮긴 탓이지, 자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시녀가 일어나길 기다린 그가 다시 물었다.

“소저 두 분이 쉴 수 있을 만한 곳으로 가는 중이었느냐? 그럼 저곳으론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조금 전에 다른 사람이 가는 것을 내가 봤으니, 다른 곳으로 가거라.”

시녀가 멈칫한 순간, 지온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스쳤다.

지온이 입을 열었다.

“채 소저를 모시고 다른 곳으로 가게.”

“알겠습니다.”

채 소저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지, 지온 소저……!”

“가시지요.” 

아무리 잘 짜인 계획이라 할지라도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변수는 어쩔 수가 없는 법이 아니던가? 지온은 생각을 바꿨다.

“함께 갈 사람이 생기셨으니, 저는 이만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지온이 채 소저의 손을 꼭 붙들며 본래 가려 했던 작은 누정이 있는 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요의가 그곳에 있으니, 그녀가 이곳을 벗어나면 더는 위험하지 않으리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이었다.

“그리하시지요.”

마음을 단단히 먹은 채 소저는 그리 대답을 하고는 시녀를 따라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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