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96)화 (96/385)
  • 96화. 선녀님

    두 사람이 다시 이문(二門)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지온의 작은 가마 역시 도착한 상황이었다.

    국공부의 하녀가 앞으로 나서 가마의 발을 들어 올리자 뒤를 따르던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오늘 지온의 차림새는 무척 특이했다.

    지온이 입은 의복은 담청색이었는데 그 색이 조방궁의 도포와 꼭 같았다. 심지어 의복의 모양도 도포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지온은 머리에는 작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관을 썼는데 모양이 부용관(*芙蓉冠: 연꽃모양 관모)과 닮아 있었다. 그것 말고 그녀는 아무런 장신구도 하고 있지 않았다.

    헉 하고 숨을 들이 마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렇게 입으니까, 신성해 보여…….”

    지온은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선녀 같았다.

    사실, 지온은 세심하게 옷을 지어입어 이런 분위기를 공들여 연출한 것이었다.

    스승님께 효를 다하기 위해 복상 중인지라, 지온이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복상 중에 다른 이의 생신연에 참석하는 게 다소 금기시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출가한 듯 보이는 지온의 옷차림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녀가 조방궁에서 수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동시에 지온이 대장공주를 대표하여 참석했단 것을 드러내어, 복상 중에 다른 이의 생신연에 참가하는 것 역시 무마될 수 있었다.

    지온의 모습에 놀라다가 곧 침착함을 되찾은 정국공 부인은, 금방 지온의 이러한 의도를 파악했다. 그녀는 내심 유 대부인이 왜 그리 칭찬을 늘어놓았는지를 이해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지씨 가문의 큰소저는 분명 영특한 사람일 게야.’

    하녀가 지온을 안내하여 데려와 소개하자 정국공 부인을 향해 웃으며 예를 갖춘 지온이 역시 유 대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유 대부인. 천리 길도 마다 않고 만나지는 것이 인연이라더니 참으로 그런 듯싶습니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은 유 대부인이 친근하게 그녀를 이끌어왔다.

    “아닐 말이던가! 우리 연은 닳으려야 닳을 수가 없는 것이지.”

    그리고 물었다.

    “여긴 어찌 온 것인가? 일찍 알았으면 같이 오는 것을…….”

    지온이 대답했다.

    “대장공주님께서 최근 두문불출, 수양에 정진하고 계십니다. 하여 제게 축하 예물을 전해드리라 명하시어 오게 되었습니다.”

    “기왕 왔으니 기분이나 전환하고 가게. 어린 소저가 종일 수양만 하고 있다니……. 우리네들 보다 자네가 청승맞아서야 되겠는가? 아니 될 말이지.”

    지온은 내심 자신이 수양 중이긴 해도 전혀 청승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유 대부인이 좋은 마음으로 이리 이야기 하는 것이란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정국공 부인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여기 서서 이러지 말고 우선 들어가요. 어머니께서 예쁘고 영특한 어린 소저를 좋아하시니 소저를 보면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 * *

    공자들 사이에선 이미 난리가 벌어졌다.

    “거 확실히 본 사람 있는가? 조금 전 그 소저 생긴 게 어떻던가?”

    “못 봤네! 그래도 옷차림으로 봐선 꼭 선녀 같더구먼.”

    선녀란 말에 요의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디? 어딘가!”

    그러나 아쉽게도 지온은 이미 안으로 들어간 뒤라 그는 뒷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옆에 있던 다른 이가 음식에 양념을 치듯 그에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분명 소박하게 차려입었는데 말입니다, 보자마자 눈이 다 밝아지지 뭡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을 싹 다 죽이는 미모였습니다.”

    “저는 얼굴 반쪽만 봤는데도 굉장한 미모였습니다!”

    누군가가 핀잔을 주었다.

    “그게 뭔 소린가? 거리가 이리 먼데, 예쁜지 안 예쁜지 그게 보이겠나? 자네가 거짓말하는 게지.”

    그러자 이야기를 한 자가 기세를 더욱 세웠다.

    “뒷모습만 봐도 저리 예쁜데, 미인이 틀림없네!”

    결국 그들은 잠시 후 기회를 보아 그 소저의 얼굴을 보러 가기로 했다.

    유신지와 루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 소저가 지온임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유신지는 이마를 찌푸리며 고민했다. 

    ‘사람의 이목을 끄는 여인이다. 한낱 뒷모습에도 이리 많은 이들을 불러 모으는데, 앞으로는 어쩌란 말인가?’

    원겸은 비록 지온을 본 적은 없으나 제 부인에게 이미 수차례 지온에 대해 들었던지라, 목소리를 낮춰 유신지에게 물었다.

    “조방궁의 지 소저인가?”

    유신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원겸이 의아한 듯 물었다.

    “두 사람 모두 그녀와 친한가보구먼?”

    유신지가 허허 웃더니 대답했다.

    “형님, 잊으셨습니까? 본래 저희 둘째와 혼약이 있었던 소저가 아닙니까? 두 집안끼리 사이가 나쁘지 않아 몇 번 본 일이 있었지요.”

    “오…….”

    유신지의 말에 원겸이 한 가지 일을 떠올리고는 요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강왕부의 저 치가 우리 집안 마차와 부딪힌 일이 있었는데, 그 후로 사람을 보내 내게 여동생이 있는 지 알아보고, 혼담을 넣으려 한 일이 있었다.”

    유신지는 어찌된 영문인가 싶어 가만히 들었다.

    “집안 하인이 아무리 없다고 해도 믿지 않고 연달아 몇 번이나 찾아오더니, 결국 다른 이에게 묻고 나서야 믿더구나. 그리고 나중에 집안 마부가 따로 보고를 올렸는데, 그날 지온 소저를 조방궁에 데려다 줬다고 했다.”

    유신지와 루안의 얼굴색이 동시에 시커멓게 변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독 두꺼비 같은 새끼가 그녀를 점찍었다는 건가?!’

    여전히 허풍을 치고 있는 요의에게 시선을 돌린 루안은, 우두둑하고 쥐어지는 주먹을 막을 길이 없었다.

    ‘놈이 채씨 가문을 어찌 대했는지 생각하면, 저놈이 그녀를 찾아내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나 있겠는가. 잠깐, 조금 전에 저들이 아까 봤던 미인을 보러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인상을 쓴 루안은 생각을 이었다.

    ‘그럼 오늘 바로 저놈이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겠군. 아무래도 신경을 좀 써야겠어. 정말 정신 나간 짓을 하면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 할 테니…….’

    * * *

    지온이 생신연이 벌어지고 있는 연회장에 들어서자 떠들썩하던 연회장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도성의 훈귀가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정국공부 노부인의 생신연을 축하하러 올 정도라면 분명 지위가 상당한 규수임이 틀림없건만, 그들에게 있어 지온은 낯선 규수였다.

    이것이 모두가 정적에 휩싸인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역시나 지온의 차림새가 무척이나 특별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지온의 옷차림은 속세의 옷으로 보이면서도 선기가 넘치는 것이, 선녀처럼 표홀해 보였다. 이러한 옷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지온의 정체에 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노부인의 시선 역시 지온에게 닿아 있었다.

    웃음을 머금은 정국공 부인이 앞으로 나가 제 시어머니에게 지온을 소개했다.

    “어머니. 여긴 이미 작고하신 지씨 가문의 어르신, 지 재상님의 큰 손녀입니다. 지금은 조방궁에서 수양을 하고 있어 대장공주님을 대신하여 어머님의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모여 있던 이들의 얼굴에 알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 그 소저로구나? 요즘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소저잖아. 화신점이라던가? 요즘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

    ‘정국공 노부인은 대장공주의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다. 이리 중요한 자리에 대장공주를 대표해 오다니, 신임을 크게 받는 모양이야. 어쩌면 앞으로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

    축하 인사를 올린 지온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장공주께서는 노부인을 생각하시어 오래 전부터 하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두셨습니다. 다만 수년간 조방궁에서 수행하시다보니, 많은 분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이제는 어려운 일이 되었지요. 하여 공주마마께서 제게 대신 참석하라 명하셨습니다.”

    노부인이 한숨이 내쉬었다.

    “내가 저를 보면 슬퍼할까싶어 이리 한 게야. 이게 다 둘째 녀석이 복이 없어 이리 된 것을…….”

    마침내 고개를 떨군 노부인이 눈물을 훔쳤다. 노부인이 말한 둘째는 대장공주의 부마(*駙馬: 공주의 남편에게 부여되는 칭호)를 말함이었다.

    남편을 잃은 대장공주와 자식을 잃은 노부인이 얼굴을 마주하면 슬픔이 차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어머니, 오늘은 슬퍼하시면 아니 됩니다. 그리하시면 공주마마의 효심을 몰라주시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국공 부인이 다독이고 나서자 옆에 있던 다른 이가 함께 거들었다.

    “그렇지요. 오늘 기쁘고 즐겁게 지내셔야 공주마마께서도 마음을 놓으실 것입니다.”

    그제야 노부인이 애써 눈물을 감췄다.

    축하 인사를 올리고 난 지온은 그만 뒤로 물러났다. 그녀에게 다가온 유 대부인이 물었다.

    “구경할 수 있도록 사람을 불러다 주면 어떤가? 하필이면 오늘 민이가 오질 않았네. 왔으면 자네와 같이 다니면 딱 좋았을 것을…….”

    지온이 감사를 표하며 대답했다.

    “마침 길이 익숙지 않아 혹시나 귀빈을 만나게 될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유 대부인이 웃음을 지었다.

    “마음 푹 놓게. 대장공주님의 이름이 있으니 자네를 곤란하게 하는 이는 없을 것이야. 다만 남객(男客)들과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면 될 것이네.”

    공손히 대답을 한 지온은 정국공부의 시녀를 따라 나섰다.

    그렇게 장원을 반 정도 돌아보고 높은 곳에 서서 경치를 감상한 지온은, 다시 여객(女客)들이 모인 장소로 돌아와 시녀를 향해 말했다.

    “난 여기 앉아 있을 테니, 자네도 시중을 들 필요 없네.”

    시녀는 지온의 말대로 그만 물러갔다.

    생신연에 온 여자 손님들이 적지 않았지만, 낯설고 신분도 특이한 지온에게 누구하나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지온은 개의치 않고 회랑에 앉아 주변 풍광에만 집중하여 감상할 따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조심스레 다가와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았다.

    “지온 소저.”

    고개를 돌리자 채씨 가문의 모녀가 보였다.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채씨 가문과 정국공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격이 차이나는 가문이었기에 오늘과 같은 자리에 두 모녀는 와본 일이 없었다.

    더구나 요즘 채씨 가문은 강왕부의 팔공자와 엮이게 되어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상황이지 않던가? 처음엔 모녀가 누군지 몰라 대화를 시작했던 부인들도, 모녀가 채씨 가문의 사람들이란 것을 알면 피해버렸다.

    좌불안석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모녀 두 사람은, 어렵사리 발견한 지온이 마치 구세주 같았다.

    “이분이 채 소저이신가요?”

    제 어미를 의지하고 서 있는 소녀를 보니, 과연,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비록 다소 초췌한 모습이긴 했지만, 찌푸린 미간이 오히려 가진 아름다움에 애처로움을 더하는 듯했다. 지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강왕부의 여덟째 공자가 사람 보는 눈은 있나보군.’

    채 소저가 기대에 차 물었다.

    “저희가 왔는데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소저?”

    “급할 것 없지요.”

    지온이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그가 소저를 보고 싶어 하니 분명 계획을 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저는 소식을 기다리고 계시면 되겠지요.”

    채 소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중얼거렸다.

    “저는, 저는 무섭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온이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 있다가 연회장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흰 서로 가까이 앉아야 합니다. 그쪽에서 쪽지를 보내오면 채 소저는 실수인 척 술을 쏟으세요. 그리고 환복을 핑계로 나가시면 제가 함께 나가겠습니다.”

    누군가 함께 한다고 하니 그제야 채 소저도 용기가 생겼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강왕부의 시녀 하나가 연회의 시작을 알리며 손님들에게 연회장으로 입장해 주실 것을 요청해왔다.

    그런데,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정국공 노부인이 피곤하단 말과 함께 일찍 연회에서 일어나 쉬러 들어가더니, 사람을 보내 지온을 따로 불러들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 지온은 채 소저에게 안심하란 눈짓을 하고는 시종을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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