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95)화 (95/385)
  • 95화. 정국공부

    그러나 그것은 유신지의 실책이었다.

    미처 장락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원겸에게 잡혔던 것이다.

    “유 아우, 뭐하러 가는 길이냐?”

    유신지가 대답했다.

    “별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그러자 원겸이 그를 잡아끌며 말했다.

    “별일이 있는 게 아니면 나와 함께 정국공부에 가면 되겠구나. 오늘이 정국공부, 노부인의 생신이라 몸 힘든 네 형수 대신 내가 얼굴을 비추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도무지 훈귀가의 자제들과는 대화가 안 풀려서 말이지. 그래도 네가 있으면 의지가 될 것 같아서 그런다.”

    유신지가 머뭇거렸다.

    “전 친우와 약속이 있는데…….”

    “같이 가면 되지 않겠느냐.”

    원겸이 말했다.

    “정국공부는 풍광도 좋으니, 두 사람이 나와 어울려 함께 놀러 간 셈 치면 되지 않겠느냐?”

    원래 원겸과 잘 어울렸던 유신지는 루안을 바라보았다. 루안이 입을 열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사실 유신지를 이대로 떨어뜨려 버릴까도 생각한 루안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자신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유신지 역시 무조건 가지 않겠다고 할 것 같았다.

    ‘될 대로 되라지. 정국공부면 정국공부, 어디든 다 똑같다.’

    그렇게 방향을 돌린 세 사람은 정국공부로 향했다. 원겸 공자가 데려온 이들이니 문지기들이 잡는 일 따윈 당연히 없었다. 더구나 두 사람의 신분이 평범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만 루안이 다소 민망한 상황이었는데, 들어간 후 계속해서 다른 이들이 흘끔거렸기 때문이었다.

    과거 루안이 천 리를 도망쳐 도성에 들어와 송사한 일은 무척 큰 사건이었다. 

    누군가는 그가 늑대와 같은 야심을 품고 제 형의 왕위를 노렸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북양왕이 악랄하여 부친이 죽자마자 독한 마음을 품고 제 어린 아우를 죽이려 했다고도 했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지만,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긴 것은, 전대 북양왕이 살아생전 어린 아들을 과도하게 총애했기 때문이란 것이 결론이었다.

    그것이 어린 아들에겐 야심을 일으켰고, 장자에겐 질투와 한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명문 집안들은 그것을 본보기 삼아 집안의 자제들에게 절대 규율과 법도를 어겨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안 본인은 오히려 안분지족하며 지냈다.

    과거를 보고 관직에 오른 그는 마치 왕부의 공자였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듯, 삼년 내내 이런 장소에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그가 온 목적을 다들 가늠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겸은 알고 지내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그들에게 돌아왔다.

    유신지가 말했다.

    “형님, 이런 곳에 오실 시간도 있으시고 학업이 바쁘진 않으십니까?”

    원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바쁠 것이 뭐가 있겠느냐? 서책이야, 네가 읽은 서책은 나도 다 읽은 것이지. 그러나 써내는 문장이 너만큼 예리하지가 못하니 어쩌겠느냐. 아버지께선 이미 이런 내 능력을 받아들이셨다. 나보고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고 하시더구나.”

    두 대에 걸쳐 부자(父子) 모두가 재주를 가진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원 재상은 그의 재능이 또래를 압도하여 당대의 풍류를 선도했지만, 다음 대인 원겸은 달랐다. 원겸도 시 짓는 재주가 나쁘지 않았지만, 유신지에 비해 손색이 있었다.

    원겸과 유신지는 나이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유신지는 열아홉에 이미 가볍게 탐화로 과거에 합격했지만, 한발 늦게 과거를 시작한 원겸은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유신지가 그런 원겸을 다독였다.

    “형님은 학업에 뿌리가 튼튼하시니 평소처럼만 하시면 어렵지 않게 통과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책론의 경우 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걸 시험관이 좋아하거든요.”

    그러면서 유신지가 루안을 슬쩍 곁눈질하며 말했다.

    “문학적 재능으로 보자면 저의 그 글이 루 형의 것에 비교되긴 힘들죠. 제가 루 형보다 더 높은 등수가 될 수 있었던 건, 제가 되는 게 좀 더 당시 상황에 걸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원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구나. 하지만 아버지께선 그런 말을 안 좋아하셨다.”

    그것은 당연했다. 원 재상은 제 재능만으로도 충분히 남들을 압도할 수 있었으니 운이나 요령 따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따금 루안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이어지는 대화는 무척이나 깊고 즐겁게 이어졌다. 

    그때였다.

    그들의 귓가로 폭탄이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이 바라보자 사람들 사이에 득의양양하게 서 있는 요의가 한눈에 들어왔다.

    초록은 동색이요, 유유상종이라더니, 이들이 있는 쪽은 대부분 문사의 후예들인 반면에, 요의 주변엔 귀족 자제의 방탕아들이 주를 이뤘다.

    잠시 저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원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런 소릴 하다니. 채씨 가문은 떠밀리다 못해 목이라도 맬 지경인 것 같던데…….”

    유신지가 얼른 물었다.

    “지금 채 소저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아직도 그 짓거리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멈출 리가 있겠느냐? 소왕야는 채씨 가문을 몰아붙여 그 집 딸을 첩으로 바치게 만들 생각이다!”

    목소리를 낮춘 원겸이 근래 채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고는 말을 이었다.

    “이게 대체 어디서 배워온 무뢰배 같은 수작질이란 말이냐?”

    가만히 생각하던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처리가 어렵습니다. 강제로 몰아붙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협을 했다고 볼 수도 없지요. 이대로 어전 앞에 가져간다고 해도 확실히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참으로 음험하지 않으냐? 채씨 가문의 아들이 나와 함께 국자감(*國子監: 교육기관)에 있었는데, 듣자니 소문 때문에 계속 힘들어하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휴가를 신청하여 집으로 돌아갔다더구나.”

    원겸이 물었다.

    “아우야. 넌 항상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고는 하지 않았느냐? 이번에는 무슨 좋은 방법이 없는 것이냐?”

    유신지가 루안을 보았다.

    “루 형, 어떻소?”

    루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 일은 신분이 높은 분께서 오셔서 한마디 하시면 해결될 일이오. 그저 채씨 가문의 힘이 없어 그런 분을 움직이지 못할 뿐이지.”

    그의 말에 원겸과 유신지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원씨 가문과 유씨 가문은 설령 강왕부에 그리 말할 수 있는 신분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움직이는 정도는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를테면, 황제라던가, 종정 어른이라던가 아니면 강왕비 앞에서 이야기라도 전할 수 있었다.

    다만 그리하면 다른 이에게 빚을 져야 했고, 상대와는 원수를 지게 된다. 이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집안 어르신께 불려가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불타는 정의감은 결국 허무해지는 법이다.

    요의와 주변 방탕아들이 또다시 시끌벅적해졌을 때, 명문 가문의 여가솔들이 도착했다.

    마침 멀리 마차가 멈추는 곳까지 내다보이는 위치에 있던 그들은 기회를 틈타 여가솔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들을 찧어대기 시작했다.

    내심 불쾌감을 느낀 루안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 돌연 유신지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어? 저거, 지온 소저 아니오?!”

    * * *

    가마에서 내린 유 대부인은, 자신을 맞으러 나온 정국공 부인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어찌 혼자 오신 겝니까? 아드님 두 분은 어디다 두시고요?”

    정국공 부인이 웃으며 묻자 유 대부인이 말도 말라는 듯 대답했다.

    “우리 집 두 망아지 놈들을 아직 모르시는가? 이런 자릴 좋아하질 않는 큰놈은 그림자도 안 비추고, 둘째 녀석은 동창들과 복습할 공부가 있다며 아침 댓바람부터 사라졌네. 어휴, 그 두 녀석들이 왔다가는 또 무슨 일을 칠지 모르느니, 차라리 안 오는 게 내 속이 편해.”

    이에 정국공 부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불평을 하시는 겝니까, 아니면 자랑을 하시는 겝니까? 두 아들분이 모두 뛰어난 기재에 학문 역시 훌륭한 것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다고요.”

    유 대부인이 대답했다.

    “좋기는, 무슨……! 서책이나 조금 읽었다 뿐이지……. 첫째고, 둘째고 어찌나 말들을 안 듣는지, 원……! 자네 집 아이들이 착하지.”

    정국공 부인이 손을 내저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죠! 그러다 사람들이 언니 목이라도 조르면 어쩌려고요! 자제분들이 서책이라도 읽으니 충분히 훌륭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를 해가며 안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떼었을까, 하녀 하나가 급히 부인들에게 다가왔다.

    “부인, 손님이 한 분 오셨습니다.”

    정국공 부인이 물었다.

    “어떤 분이시냐? 어찌 그리 어려워해?”

    “조방궁에서 오셨는데, 대장공주님의 초청첩자를 가져오셨습니다.”

    정국공 부인이 의아한 듯이 채근했다.

    “그럼 어서 뫼셔야지, 어찌 보고를 하는 것이냐?”

    노부인의 생신연에 대장공주가 사람을 보내 축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그것이 오신 분이 대장공주님을 모시는 궁인이 아닙니다. 또, 조방궁의 도장도 아닌지라…….”

    궁인이나 도장은 대장공주와 모두 주종 관계였다. 때문에 둘은 신분에 상관없이 노부인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리고 가져온 선물을 올리면 끝이었다.

    그러나 궁인도 아니오, 도장도 아니라면 찾아온 객의 신분을 다시금 정의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국공 부인이 물었다.

    “어떤 분이시더냐?”

    “그 소저 말로는 자신은 지씨로, 돌아가신 지 재상님의 가문에서 왔다 했습니다. 현재는 조방궁에서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에 유 대부인이 작게 아! 하는 소리를 내자 정국공 부인이 물었다.

    “언니, 아는 소저인가요?”

    “시조부님과 지 재상께서 과거 절친한 관계이셨지. 그 아이, 내가 아는 아이일세.”

    정국공 부인도 그제야 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른 듯했다.

    “설마…….”

    “맞네. 전에 우리 둘째와 혼약이 있었던 그 소저네.”

    유 대부인이 거리낄 것 없이 담백하게 이야기를 해버리자 오히려 정국공 부인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유씨 가문이 혼사를 물린 일은 그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 떠벌리고 다닐만한 일은 아니었음에도 유 대부인이 이리 툭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정말 마음에 응어리처럼 남은 것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었다.

    유 대부인의 웃음 어린 목소리가 정국공 부인의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 둘째와 연이 모자랐을 뿐, 사실 정말 괜찮은 아이라네. 내가 너무 아쉬워서 매파 노릇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웬만하면 우리 집안으로 들이고 싶은 게지.”

    얼굴을 보니 거짓이 아닌 것 같아 정국공 부인의 얼굴에도 덩달아 미소가 떠올랐다.

    “언니가 이리도 칭찬하는 것을 보니 정말 좋은 소저가 분명한가봅니다. 가요. 함께 가서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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