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래봐야 초대첩자
연무장에서 땀을 쏟고 난 후, 지온은 기분 좋게 사방전으로 향했다.
지온이 막 사방전에 들어서자마자 청옥이 달려와 그녀를 맞았다.
“사저!”
어딘가 의뭉스레 보이는 청옥의 모습에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왜요?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청옥이 목소리를 낮췄다.
“사저, 혹시 저희가 화신점을 처음 시작했을 때 평안부를 드렸던 분 기억하세요?”
“처음 화신첨을 뽑았던 향객이셨죠? 평안부를 가져오셨나요?”
“네, 뒤에 있는 전(殿)에 계세요.”
고개를 끄덕인 지온은 옷차림을 정리한 후 부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 * *
손님 자리엔 부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차림에서 귀티가 흘렀다.
다만 그녀는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보였다. 눈도 빨갛게 부어오른 것이 아마도 눈물을 흘린 듯했다.
지온이 들어온 것을 본 부인이 자리에서 허둥지둥 일어나더니 청옥을 바라보았다.
“선고…….”
청옥이 웃으며 소개했다.
“선인, 이분은 저의 사방전의 전주이십니다.”
지온을 찾아온 이는 채씨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예를 갖춘 지온이 입을 열었다.
“부인, 앉으시지요.”
그리고 함옥을 향해 말했다.
“안신차(安神茶)를 가져다주세요.”
부인은 눈앞에 있는 지온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화신첨에 대한 소문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던가? 눈앞에 있는 지씨 가문의 큰소저는 능운진인의 제자이자, 도력 또한 상당한 사람이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이리 직접 보니, 워낙 어린 나이라 망설여지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겨우 열대여섯 살 정도인 듯하구나. 우리 집 아이보다 커봐야 몇 살 차이 밖에 안 나는데, 정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선인께선 차를 좀 드시지요.”
그녀가 딴생각을 하던 찰나, 이상한 향내를 풍기는 차가 그녀 앞에 놓였다.
향에 정신을 차린 부인이 차를 한 모금을 마시자 어지럽고 흐리기만 했던 머리가 조금이지만 곧바로 맑아졌다.
“좋은 차로군!”
그녀의 말에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평안부를 한쪽으로 옮긴 지온이 입을 열었다.
“부인께선 어떤 소원이 있으신지요?”
정신을 바짝 세운 부인이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본가는 채가로, 바깥양반은 태복시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네. 집에 열다섯 살 여식이 하나 있는데, 며칠 전 조방궁에 향을 올리러 왔다가…….”
지온의 신색이 점점 무거워졌다. 부인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가 물었다.
“부인께서 말씀하신 분이 강왕부의 팔공자가 맞으신지요?”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
“지난 며칠 사이에 집안이 온통 쑥대밭이 되었네. 그동안 잘 지내왔던 친지들이며 친우들이 어쩌다 그에게 다 매수가 된 것인지, 매일같이 찾아와 이런저런 소리를 해대는데, 성격이 불같은 우리 딸은 이미 제 화를 못 이겨 병이 나고 말았네. 노야가 관직이 높은 것도 아니라 어디 도움을 청할 곳도 마땅치 않고…….”
지온이 그녀의 찻잔을 채우며 따뜻하게 말했다.
“그럼 채 소저께선 첩은 결코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요?”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바깥양반이 양방(*兩傍: 과거에서 향시의 거인과 회시의 진사에 급제한 사람)출신이네. 그런데 어찌 여식을 첩실로 보낼 수 있겠는가? 더구나 교교도 뜻이 없으니 우리 역시 딸을 팔아 영광을 취할 생각도 없다네.”
지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부인의 소원이 무엇인지 이해하였습니다.”
지온을 바라보는 부인의 얼굴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소저, 그럼 우린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먼저 몸부터 챙기시지요.”
지온이 말했다.
“부인의 마음 상태도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억지로 버텨서는 안 됩니다. 따님께서도 이미 과도한 고민으로 병이 나셨지요? 지금처럼 계속 지내시면 다른 이들이 더 무엇을 하지 않아도 두 분이 먼저 버티지 못하실 것입니다.”
부인이 처량하게 말했다.
“그렇긴 하겠지. 그러나 우리가 어찌 마음 놓고 몸을 돌볼 수가 있겠는가?”
지온이 그녀의 손을 작게 토닥였다.
“화신마마께서 계십니다. 부인께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지요. 오늘 돌아가시면, 부인께선 나가지 마시고 누가 찾아오든 아무도 만나지 마시지요. 이 일은 반드시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니 따님이 마음 놓고 몸부터 돌보게 하시지요.
그리고 삼 일에서 오 일 뒤에 부인의 마음이 진정되면, 부군의 이름으로 강왕부에 서신을 보내도록 하시지요.”
채 부인이 흠칫 놀랐다.
“강왕부에 서신을 보내라니?”
지온이 손에 든 찻잔을 가볍게 흔들어 잔잔하게 퍼지는 물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히 소왕야께 대인은 이 혼담에 대해 아주 좋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지요…….”
부인이 매우 놀라 소리쳤다.
“지온 소저!”
지온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이는 거짓으로 하는 것입니다.”
간신이 마음을 가다듬은 부인이 물었다.
“왜 그리 하는 것인가?”
“서신에는 이리 쓰셔야 합니다. 부인의 부군께서는 괜찮은 혼담이라 생각하나 소왕야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여식이 계속 허락을 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여식을 많이 설득했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으니 소왕야를 뵙고 확실하게 여쭙고 싶다…….”
“아니…….”
부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거짓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제 딸더러 그런 소도둑 같은 놈을 만나라니, 양에게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지온의 말이 이어졌다.
“며칠 후면 정국공부(鄭國公府), 노부인의 생신이 있습니다. 소왕야께 성의를 표시할 수 있도록 생신연 첩자를 보내 달라 하십시오.”
지온이 고개를 들며 빙긋 웃었다.
“그날, 저 역시 갈 것입니다.”
부인은 망설였다. 정국공부의 생신연이라면 당연히 온갖 고관대작들로 만석일 터였다. 혹시라도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제 여식의 운명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말 지온 소저를 믿어도 되는 건가? 그녀 역시 어린 소저인데……그렇다고 안 하면? 지금 같은 겁박을 받는 상태라면 어차피 딸에게 미래라는 게 있기나 할까?’
마지막으로 그녀가 머리에 떠올린 것은 원씨 가문의 며느리와 기사회생에 성공한 상인이었다.
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하겠네!”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다시 말했다.
“만약 그가 하지 않겠다고 하면 다시 제게 말씀해주시지요.”
* * *
강왕부.
화원에 있는 그네에 요의가 대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어린 내시 둘이 그의 옆에 있었는데, 하나는 화첩을 펼쳐 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여지(*荔枝: 지금의 리치)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요의가 뚫어지게 보는 화첩 속 사람은 벌거벗고 있었다.
그렇게 화첩을 보던 그가 울컥, 짜증이 올라왔는지 화첩을 밀쳤다.
“재미없구나! 어차피 그린 것들, 다 가짜지!”
떨어진 화첩을 주워든 어린 내시가 그를 달랬다.
“가짜가 싫으시면 진짜 사람을 보실는지요?”
요의는 여전히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뭐 볼만한 게 있다고? 집에 있는 것들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집 밖이라고 해봐야 도성에 기루도 뭐 별거 없고…….”
다른 집안의 처녀나, 힘없는 집안의 딸이라고 해봐야 반반한 얼굴들이 없었고, 아리따운 규방의 규수는 집 밖을 나서질 않았다.
가만히 머리를 굴리던 요의가 기억 하나를 떠올리고는 미련이 남는 듯 물었다.
“원씨 가문에 진짜 여식이 없다고?”
어린 내시가 대답했다.
“진짜 없답니다. 원 재상 집안엔 나이든 부인과 아들 하나뿐이고 그 며느리는 말씀하신 소저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습지요.”
요의는 속이 답답했다.
그날 본 게 원씨 가문의 마차가 분명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 소저 역시 혼인을 하지 않은 복색이 분명했는데 어찌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선녀님, 선녀님! 정말 저희는 인연이 없는 것입니까?”
다시 그네에 벌러덩 눕는 요의의 얼굴에는 애수가 가득했다.
원씨 집안의 소저라면 정실로 받아들이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선녀 같이 아름답기까지 했으니…….
‘선녀님을 못 찾는다면 채 소저도 괜찮지, 귀여우면서 화끈하니까.’
그러나 어찌나 고집이 황소고집인지 감히 제 첩 자리를 마다하고 있질 않던가!
‘흥, 잘해줄 때 마다하고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니. 그럼 내가 손을 쓴 것도 감수해야지. 채가야, 채가야……. 앞으로 며칠이나 더 버티는지 보자!’
그때, 누군가 화원으로 들어왔다.
“팔공자님, 채씨 가문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요의가 귀찮은 듯 내시를 향해 말했다.
“읽어봐.”
“네.”
서신을 받은 내시가 읽자 내용을 들은 요의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못 버티겠던가 보지? 그러게 처음부터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나왔으면 좋았지 않아!”
내시가 조심스레 물었다.
“서신에는 어찌 회신하면 되겠는지요? 그런데 채 소저가 뵙고 싶어 한다는데, 어디서든 볼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생신연에서 뵈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의는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정국공부의 생신연은 채씨 가문으로선 꿈도 못 꾸는 곳이야. 나와 엮여 자신들도 이득을 챙겨보겠다는 것이겠지! 그들은 제 딸을 보내고, 나는 그들의 신분을 올려준다? 흐흐, 그래, 그래. 그래 봐야, 초대첩자니, 주면 되지!”
* * *
초대첩자를 받은 채씨 가문의 안주인은 조방궁으로 사람을 보내 이 소식을 전했다.
지온은 역시나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을 확인하고 언제나처럼 외출을 준비했다.
정국공부는 여양대장공주의 시댁으로 대대로 벼슬을 해온 뿌리 깊은 공신 가문이었다.
며칠 전 대장공주가 보내왔던 첩자가 바로 정국공부의 생신연 초대첩자였다.
그것은 출세를 위한 입장권이었으며, 또한 시험이기도 했다.
지온은 대장공주가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에 생각 끝에 평소처럼 그저 자기 일을 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이번 기회를 통해 채씨 가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은 일 말이다.
* * *
어렵게 맞이한 휴무일.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루안은 모처럼 밖으로 나가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그가 아직 문밖을 나서기 전, 누군가 찾아왔다.
“유씨 집안의 대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루안이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야우가 먼저 벌떡 튀어 올랐다.
“대공자라는 사람은 대체 할 일이 그리도 없답니까? 공자님이 어렵게 하루 쉬는 날인데 또 이리 찾아와 귀찮게 하다니……. 넷째 공자님, 그냥 만나지 마시죠? 요 며칠 내내 술을 마시셨잖습니까? 그리 마시면 안 좋아요.”
루안도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매일 밤 약주를 마시는 그라지만, 이런 식으로 마셔대다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망설이고 있자니 다시 보고가 올라왔다.
“대공자께서, 혹시 공자님이 만나주지 않으신다면 향을 올리러 가시겠다 하십니다.”
야우가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루안이 곧장 대답했다.
“기왕 왔으니 들라 하지.”
“…….”
야우가 침묵하는 사이, 이윽고 유신지가 방실거리며 들어왔다.
루안의 행색을 본 유신지가 말했다.
“내가 루 형을 귀찮게 한 게요? 나가려던 것 같소?”
루안이 목석같이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상관없소. 어차피 나갔어도 대공자가 귀찮게 했을 것 같군.”
루안의 말 속에 숨은 가시를 못 들은 척 껄껄, 웃음을 터트린 유신지가 대꾸했다.
“기왕 나가려던 거 같이 나가면 어떻겠소? 오늘은 휴일이라 장락지(長樂池)가 볼만할 거요. 가서 뱃놀이하거나 시회를 들어도 좋고.”
유신지를 제 집안에 두고 싶지 않았던 루안이 금방 그에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