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93)화 (93/385)
  • 93화.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인간

    주루.

    유신지와 루안의 대화는 나름 잘 이루어졌다.

    서로 나눌만한 주제가 넘쳤던 것이다.

    시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고, 정치에 대해 논할 수도, 그리고 사건을 놓고 대화를 할 수도 있었다.

    전엔 루안이 사람들을 피하고 멀리해서 그랬다지만, 지금은 그가 거부하지 않으니 당연히 대화가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내들의 수다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거리에서 소란이 일더니, 이윽고 군중 틈 사이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공자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수행하는 이들까지 대동한 그의 행차는 위세가 넘쳤다.

    낯이 익은 것이, 루안이 가만 보니 강왕부의 여덟 번째 아들, 요의(姚誼)가 아닌가?

    루안이 미간을 좁히며 내심 읊조렸다.

    ‘소왕야(小王爺)……. 또 무슨 일을 벌인 것인가?’

    유신지가 제 시종 부주를 불러 물었다.

    “아래에 무슨 일인게냐?”

    “강왕부의 팔공자께서 방금 일을 벌이셨습니다.”

    유신지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도성에 돌아온 후로 그는 좋은 일을 벌인 적이 없지. 또 어느 여염집 소녀를 희롱한 게냐?”

    부주가 울상을 지었다.

    “여염집 딸이면 모르겠으나, 희롱한 것이 관리의 여식이랍니다.”

    루안이 물었다.

    “어느 댁 소저인가?”

    “태복시승(*太僕寺丞: 관직명) 채 대인 집안의 여식입니다.”

    부주가 대답했다.

    “채 소저께서 막 향을 다 올리시고 댁으로 돌아가시려던 찰나에 채 소저를 발견한 소왕야가 몇 마디 희롱하는 말을 던졌습니다. 성격이 불같은 채 소저께서 그 자리에서 욕을 하셨고 결국 소왕야가 채 소저께 강왕부로 시집올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루안과 유신지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신지가 차갑게 말했다.

    “태복시승의 딸이라면 강왕비의 눈에 차지 않을 테니, 부인이 아니라 첩으로 들이게 되겠군. 관리의 여식을 이런 식으로 첩으로 데려가겠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루안은 비교적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비록 지금은 강왕부의 세력이 강할지 몰라도, 폐하께서도 아둔한 분이 아니시오. 그가 이대로 안하무인 지내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실 테지.”

    루안의 말에 유신지가 여전히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이 있으니 앞으로 채 대인 집안도 조용하긴 힘들지 않겠소? 누가 감히 채 소저에게 혼담을 넣을 수가 있겠소?”

    유신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좋았던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 두 사람 모두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답답한 속에 연신 차만 들이키던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강왕이 언제 도성으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더 심해지지 않겠소?”

    예법으로 보자면 이미 선제의 양자로 들어간 황제는 강왕을 숙부라 불러야 맞았다.

    그러나 세상에 어느 누가 피로 이어진 친부모를 끊어낼 수 있겠는가?

    강왕비가 이미 도성으로 돌아왔으니, 강왕도 곧 도성으로 돌아오게 될 터였다.

    황제는 일국의 군주이자 신민의 아비다. 그런데 황제 위로 아비가 하나 더 나타난 것과 같으니 상황이 어찌 되겠는가? 혼란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루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유신지는 순간 루안이 황제의 심복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앞에선 해봐야 좋을 것 없는 말이란 생각에, 유신지가 금방 화제를 돌렸다.

    “지난번 그 사건은 어찌 처리됐소?”

    * * *

    길가에선 야우와 한등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등이 연신 눈알을 굴리며 입을 뗐다.

    “……공자님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죠. 그런데 매번 여기에 올 때마다 유씨 가문의 대공자를 만나시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같이 술을 드시러 가시던데…….”

    깜짝 놀란 야우가 대번에 소리를 질렀다.

    “뭐?! 사내?!”

    한등이 순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공자니까 당연히 사내죠. 집안 좋고, 생긴 것도 잘 생겨서 우리 공자님이랑 같이 계시면 도성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라 이겁니다. 눈이 다 부실 정도라니까요?

    아무튼, 도성에 있는 여인이라면 당과 빠는 꼬맹이부터 허리 꼬부라진 할매들까지, 보고 다리 한 번 안 풀려 본 사람이 없을걸요?”

    야우가 황급히 물었다.

    “그, 그 대공자라는 사람은 혼인은 했냐?”

    “안 했죠?”

    한등이 낄낄 웃었다.

    “두 분, 과거도 같이 봤습죠. 공자님은 4등으로 급제하시고 그분은 탐화를 했는데, 그 후에도 한 분은 형부로, 다른 한 분은 대리시로 가셔서 똑같이 형옥(刑獄)을 담당하고 계시니까 할 이야기도 엄청 많으실 겁니다. 그래서 매번 만날 때마다 이야기가 그리 길어지시는 거겠죠.”

    야우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물었다.

    “그……대공자가 나이가 몇인데? 집안에서 혼인하라고 재촉도 안 한대?”

    “우리 공자님이랑 나이는 비슷할걸요? 차이가 나 봐야 한 살 적은가? 그쪽 집안에서 재촉하는지 안 하는지는 저도 모르죠. 여하튼 아직 혼인도 안 했고, 지금도 혼담이 오가는 사람도 없어요.”

    “…….”

    야우는 침묵하며 곤혹스러워했다.

    이 상황은 너무 불길하고도, 불길하지 않은가!

    ‘주인님께서 쓸데없는 생각이 많으신 줄 알았더니, 설마 넷째 공자님께서 진짜…….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러다 넷째 공자님이 생각을 고쳐먹지 않으시면 내가 임무를 완수할 수가 없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북양으로 돌아갈 수 없고, 북양으로 돌아가질 못하면 노총각으로 늙어 죽게 되겠지! 안 돼! 무조건 공자님을 제 길로 끌고 돌아간다!’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난 야우가 주루로 향하고 홀로 거리에 남은 한등이 가만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흥, 공자님의 제일 심복은 나거든요! 어딜 와서 경쟁하려고…….”

    * * *

    구경꾼들에겐 채 소저가 희롱을 당한 사건도 한낱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태복시승을 지내고 있는 채(蔡) 대인의 가문은 그 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날아온 베개와 함께 분노한 소녀의 목소리가 문지방을 넘었다.

    “꺼지거라! 팔인교를 내 앞에 대령한다고 해도 나는 절대 그 집 문턱을 넘지 않을 것이다!”

    아낙에게 떠밀려 나온 매파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매파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생각이 과하신 것 같습니다, 채 소저. 소왕야께선 친왕의 아드님이시며, 황제 폐하의 친아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혼인하려거든 궁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찌 소저를 팔인교에 태워 데려가시겠습니까?”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채씨 집안의 안주인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아이를 데려다 첩으로 삼겠다는 말인가?!”

    매파가 웃으며 얼굴 가득 주름을 잡았다.

    “종실의 첩은 그냥 첩이 아니지요, 모두 품계를 받습니다. 평범한 집안은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곳이지요.”

    매파의 말에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안주인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저 몹쓸 년을 당장 매우 쳐서 쫓아내거라!”

    이미 오래전부터 잔뜩 화가 나 있던 채씨 가문의 시종들은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호랑이나 늑대처럼 매파에게로 달려들었다.

    빗자루나 밀대를 움켜쥔 시종들이 매파를 향해 달려들자 매파는 다급하게 도망쳐 대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고 보니 배알이 상했는지, 매파가 된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아? 어디 어찌 되나 두고 보자!”

    그러자 퉤, 하는 침 뱉는 소리가 나더니 채씨 가문의 문이 쿵 닫혔다.

    그러나 사람을 내쫓았다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안주인이 여식을 위로하고 있을 때 하녀가 다가와 말을 전했다.

    “이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이부인은 같은 집안 동서였는데, 아마도 집안에 일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듯했다.

    안주인은 연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게. 집안이 엉망이라 나가서 맞아주진 못하겠구먼.”

    “네, 부인.”

    하녀가 대답하고 나간 뒤, 곧 마흔 줄로 보이는 부인이 들어왔다.

    체면치레는 할 만큼 차려입은 부인이었으나, 채씨 가문의 안주인에게 흐르는 귀티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방이 엉망인 것을 본 그녀는 매우 놀랐다.

    “아니 왜 이리 난리가 난 겝니까? 교교(嬌嬌)야, 울지 말아라. 울지 마!”

    그녀의 말에 채 소저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고, 안주인은 그녀를 붙들고 분통한 속내를 쏟았다.

    “동서, 대체 이 집안에 무슨 불운이 들은 것인지 모르겠네. 멀쩡하게 향을 올리고 오던 길이었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자가 매파를 보내더니, 글쎄 우리 교교를 첩으로 들이겠다지, 뭔가? 왕의 아들이 되어 어찌 그런 소릴 한단 말인가! 우리 노야가 비록 육품 밖엔 안 된다지만, 그래도 우리 교교는 명명백백한 관가의 소저가 아닌가!”

    “그렇지요! 이리 어여쁜 우리 교교를 어찌 함부로 첩으로 보낸단 말입니까!”

    그렇게 이부인의 위로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안주인의 흥분이 가라앉자 이부인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하지만 형님, 그분이 평범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친왕의 아들이자, 황실의 친지가 아닙니까? 폐하를 뵈면 형님이라 부를 사람이 아닙니까. 황가면 첩이라도 품계를 받지요…….”

    듣다 보니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안주인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제 동서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그러자 이부인이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첩이란 말에 화가 났던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형님. 그분은 평범한 분이 아니시잖아요. 진국공(鎭國公)에 봉해진 분이 아닙니까?

    형님도 지금 강왕부가 어떤 권세를 누리는지 모르지 않으시잖아요. 이러다 정말 그분이 우리 집안과 척이라도 지면, 앞으로 셋째의 앞날에도 영향이 있을 겁니다.”

    이에 안주인의 얼굴에 서리 낀 듯 찬 기운이 내려앉았다.

    “둘째 동서, 자네 양심이 있는 것인가? 어디 다른 사람 편에 서서 질녀를 첩 자리에 들어가라 하는 게야!”

    “아니 어떻게 그리 말씀을 하십니까? 이게 사실인 것을요! 그분은 황제의 남동생입니다. 앞으로 군왕에 봉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럼 교교는…….”

    화를 참지 못한 안주인은 들고 있던 찻잔을 던져 와장창 깨버리고는 문을 가리켰다.

    “당장 눈앞에서 꺼지시게!”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채씨 가문은 금방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요의는 참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데 재능이 뛰어난 인간이었다. 그는 드러나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채씨 가문의 친지나 친우에게 손을 쓰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지금의 상황을 좋지 않게 보는 누군가가 나타나더라도, 자신에게까지 죄를 씌우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매파를 보내 혼담을 넣었기로서니,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역시나 채씨 가문과 같은 집안에 속한 이들에게 말 좀 잘해달라며 부탁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냐는 말이다!

    그런 요의의 행동에 불쌍해지는 것은 채씨 집안뿐이었다. 죽을 듯 속이 뒤집혔지만, 어쩔 도리가 없으니 그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채 소저는 며칠이나 눈물로 지새워 정신마저 흐릿해진 지경이었다.

    채 노야의 부인은 그런 제 딸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 그런 놈 때문에……. 이럴 줄 알았으면 향을 올리러 가는 것이 아닌 것을……. 화신마마님도 무심하시지, 향은 받으시고 어찌 우릴 이리 버려두시…….”

    푸념하던 부인은 돌연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 휙 하고 몸을 돌려 옆에 있던 하녀에게 물었다.

    “화신첨을 뽑으면 화신마마께서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그렇습니다.”

    하녀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런데 부인, 화신첨을 뽑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부인은 도리어 환한 웃음을 지었다.

    “뽑을 필요 없다, 이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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