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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92)화 (92/385)
  • 92화. 비밀임무

    난택산방을 나온 지온은 조금 전 대장공주에게 했던 말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장공주가 자신을 부른 것은 당연히 자신을 쓰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가 자신을 이용하게 하려면 일단 숨기고 있던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대장공주가 자신을 쓸 만하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자신이 옥형선생의 손녀인 옥종화이며, 할아버지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는 것을 밝힐 수는 없다.

    ‘그러면 대장공주가 먼저 날 요녀라 치부하고 눌러 죽이려 들겠지.’

    그렇다면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무슨 이유가 있어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우연하게도 지씨 가문의 대노야인 지원이 삼 년 전에 사망했다.

    비록 지 노야의 사인은 알지 못하지만, 마침 사망한 때가 딱 맞아떨어져 핑계로 사용하기에 아주 적당했던 것이다.

    생각에 잠긴 채 걷던 지온의 귀로 놀란 듯한 기분 나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지온이 돌아보자, 능양진인이 보였다.

    말을 건 이는 능양진인의 뒤에 선 그녀의 제자였다.

    ‘이름이 옥…… 뭐였었지?’

    지온은 기억조차 하지 않았던 이였다.

    “능양사숙을 뵙습니다.”

    지온이 웃으며 인사하자, 차갑고 딱딱한 얼굴의 능양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뒤에 있던 제자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묻잖아!”

    지온은 흘긋, 그녀를 보기만 했을 뿐 말은 여전히 능양진인에게 하고 있었다.

    “사숙, 화옥사저께서 떠나고 사숙의 문하가 참으로 어지럽습니다. 조방궁 내에서야 그렇다 쳐도, 밖에서도 이런 식이면 조방궁의 체면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제자가 크게 화를 내며 지온을 향해 눈을 잔뜩 치켜떴다.

    “너 그거 지금 무슨 뜻이야? 내가 체면을 떨어뜨려? 너야말로 속이 시꺼멓겠지! 난택산방엔 왜 온 건데! 와서 대장공주님의 환심이라도 사보려고? 우리 스승님이 계신데 너 따위가 가당키나 할 것 같아?”

    지온이 담담한 웃음을 지었다.

    “대장공주님께서 누가 보고 싶으시면 당연히 보실 수 있으신 거지. 그보다, 얼굴을 봤으면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도 모르는 건가요, 사매는?”

    “네가…….”

    “닥치거라!”

    능양진인이 강하게 입을 열었다.

    “네 사저다!”

    “스승님?”

    제자는 억울했다. 자신은 스승님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니던가!

    “배분의 높고 낮음도 모르는 것이야!”

    한편, 능양진인은 분노가 치솟았다.

    그나마 화옥은 제 속을 숨길 줄이라도 알았지, 이리 대놓고 사람을 긁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말로 이기지도 못하면서!’

    호된 질책 앞에 제자는 어쩔 수 없이 지온에게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사저를 뵙습니다.”

    “네, 그렇게 하셔야죠.”

    지온이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사숙, 대장공주님을 뵈러 오셨는지요?”

    그러자 제자가 또다시 고개를 바짝 쳐들더니 과시하듯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선 정기적으로 대장공주님께 경을 강의하시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말했다.

    “대장공주님께서 오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으시니, 사숙께선 조금 신경을 쓰시지요.”

    그러고는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사숙.”

    지온이 시녀와 함께 멀어지자 제자가 분통을 터트렸다.

    “어쭙잖은 조언은……! 우리 스승님이야말로 대장공주님이 얼마나 총애하시는데!”

    능양진인과 제자는 그대로 난택산방으로 걸어가 그들이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나온 것은 매고고였다.

    “마마께서 피곤하시어 하루 쉬시고자 하십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지요.”

    멈칫한 능양진인은 저도 모르게 지온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저 간악한 것! 난택산방에 들리더니 대장공주가 바로 날 안 만나? 이거 또 당하는 거 아냐?’

    * * *

    난택산방에서 돌아온 지온은 그 일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서아도 밖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고 궁인이 찬합을 전해왔다.

    “난택산방에 새로 온 요리 어멈이 만든 간식이 일품입니다. 대장공주님께서 지온 소저가 생각나신다며, 제게 가져다 드리라 하셨습니다.”

    감사히 간식을 받은 지온은 하로에게 답례품으로 보낼 향환을 가져오도록 시켜, 이를 궁인 편에 보냈다.

    찬합 주변을 둘러싼 시녀 세 사람이 재잘재잘 수다를 떨어댔다.

    “이 대추 소를 넣은 조니소병(棗泥酥餠) 좀 봐! 정말 예쁘다.”

    “백합 모양의 백합소(百合酥)가 더 예쁜데? 한 겹 한 겹이 진짜 꽃이 핀 것 같잖아. 하로, 너도 이렇게 만들 수 있어?”

    “만들 수는 있지. 근데 이렇게 여러 겹으론 못 만들어.”

    “식사에 이렇게 공을 들이시다니, 역시 대장공주님이시다. 어?”

    의운이 찬합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첩자를 꺼냈다.

    “이게 뭐지? 아가씨!”

    첩자를 받아 든 지온은 완전히 뜻을 이해할 때까지 여러 번 확인한 후에야 서아에게 첩자를 넣어두라 건넸다.

    “며칠 후에 나갈 일이 있을 테니, 준비해 둬.”

    * * *

    유신지는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멀쩡하게 잘 될 일이었는데, 어쩌다 루 형이 훼방을 놔서는……!’

    다른 사람에겐 다 져도, 절대 질 수 없는 사람이 루안이 아니겠는가!

    그런고로 다음 날 업무를 마친 유신지는 다시 조방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유신지는 또다시 루안을 만나고 말았다.

    점포에서 나오는 루안을 발견한 유신지가 풀죽은 모습으로 말했다.

    “루 형, 오늘도 만두를 사러 온 거라고는 하지 마시오.”

    “아니오,”

    루안이 종이봉투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구운 오리를 사러 왔소.”

    “…….”

    마른세수를 한 유신지가 물었다.

    “또 마실 거요?”

    “대공자가 원한다면…….”

    루안이 차분한 얼굴로 대답하자 유신지는 울컥 울분이 치솟았다.

    ‘그래, 마시면 마시는 거지! 설마 루안, 저 자식이 매일 오진 않겠지!’

    “가십시다. 오늘은 다른 집이오!”

    대공자가 친근한 웃음을 보였다.

    “어젠 술이 부족했던 것 같으니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봅시다!”

    루안도 당연히 거절할 리 없었으니, 두 사람은 또 다른 주루를 찾아 들어갔다.

    한편, 길가에 있는 돌난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야우가 한등에게 물었다.

    “집안 주방장 실력이 별로인가?”

    한등이 대답했다.

    “그냥저냥 괜찮죠?”

    “내가 온 지도 벌써 삼 일째인데, 근데 어째 넷째 공자님은 매일 여기서 먹을 것을 사시냐?”

    한등은 그를 슬쩍 쳐다봤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라니까!”

    야우가 채근하자 한등이 귀찮은 듯 말했다.

    “먹을 것을 사신다는 건 눈가림이고, 진짜는 사람을 만나고 싶으신 거죠. 근데 공자님께서 매번 가서 볼 마음을 먹질 못하시는 거예요. 이런 걸 보고 마음이 크면 두려움도 커진다는 건가 봅니다.”

    한등의 대답에 야우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뭐라고?! 넷째 공자님께서 누굴 만나시려는 건데?! 소저야? 어느 댁 분이신데! 어떻게 생겼냐? 성격은 어떻고?”

    가만히 야우를 쳐다보던 한등이 돌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아 쥐었다.

    “뭐야, 왜 이래?”

    야우가 한등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이거 놔! 난 남자 싫어한다고!”

    한등이 입을 열었다.

    “인피면구를 쓴 게 아닌지 확인을 해봐야겠다!”

    “무슨 놈의 인피면구……! 너 지금 뭐라는 거야!”

    한등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세자님의 제일 심복인 야우가 한낱 매파처럼 굴 리가 없지! 넌 가짜가 분명하다!”

    “…….”

    침묵하며 얼굴을 문지르던 야우는 그저 울고 싶었다.

    “난들 이러고 싶겠냐! 주인께서 이런 임무를 주신 걸 나더러 어쩌라고…….”

    ‘내가 누구더냐! 세자…… 아, 아니지, 이젠 전하라 불러야 옳지. 북양왕 전하의 수하 중 가장 득세하여 북양왕부의 장사(長史)조차 눈치를 보는 자가 아니던가! 젊은 나이에 꿈을 이뤄, 청춘에 이미 봄날을 맞은 것이 나였는데……흑흑…….’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전하께서 부르시더니 도성엔 다녀오라 말씀하셨다.

    야우는 당연히 망설임 없이 그에 응했다.

    겉으로는 넷째 공자님인 루안과 북양왕부가 서로 척을 진 상태였기에 도성에서 넷째 공자님을 만나는 것은 당연히 비밀스럽게 수행해야 하는 임무였다. 당연히 심복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왕야께선 날 믿으시는 게야.’

    야우는 그날 자신 앞에서 연신 한숨을 쉬어대던 북양왕을 떠올렸다.

    “넷째가 그렇게 도성으로 떠난 지 벌써 3년이다. 듣자니 주변에 시녀도 하나 없다더구나.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순간 야우가 당황하여 입을 열었다.

    “넷째 공자님께선 늘 다른 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이라면 더욱이 향기가 강하니 익숙해지기 어려우시겠지요.”

    “그러나, 그 아이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지 않은가!”

    야우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북양왕이 다시 물었다.

    “넷째에게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것은 아니겠지?”

    “…….”

    야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가 지나면 넷째 나이가 몇이냐. 스물셋이 아니냐! 내가 그 나이엔 아이가 벌써 셋이었어!”

    야우가 힘겹게 대답했다.

    “어쩌면 넷째 공자님께선 부족할지언정 모자란 분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북양왕의 귀에는 야우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부인을 들이지는 않을 수도 있지.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 생각이 날 때가 없단 말인가?”

    야우는 대체 이런 질문엔 뭐라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애해각에서 수학할 때 서원에 있던 이들이라고는 사내들뿐이었는데 설마 그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 허어~! 진짜 그 아이가 그 길로 빠진 거면 내가 부왕 얼굴을 어찌 뵙겠나!”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이보게, 야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임무를 맡을 사람은 자네뿐이야. 다른 이들은 마음이 놓이질 않아.”

    북양왕의 넋두리가 끝나자 그제야 안도한 야우가 대답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주인님.”

    “도성에 한 번 다녀오게. 본왕을 대신하여 상황을 살피고 와.”

    북양왕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혼인하지 않는 게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말이야. 문제가 있겠지, 문제가 있어.”

    “…….”

    “만약 문제가 있다면, 자네가 해결하고 반드시 그 아이를 혼인시키게.”

    야우가 말했다.

    “그러나 넷째 공자님께서 처하신 상황을 생각하면 좋은 집안을 고르기는 힘들 것입니다.”

    북양왕이 손사래를 쳤다.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집안까지 고르겠나. 녀석이 도성에서 얼마나 머무를지 아무도 몰라. 돌아오지 않는다고 혼사를 미루다가, 십 수 년이 지나버리면 그대로 노총각 늙은이가 돼버리겠지. 중요한 건 넷째가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네. 알겠는가!”

    야우가 힘겹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가봐. 자네 어머니가 준비하던 혼인도 날짜를 미뤄. 임무에 성공하면 돌아오게. 그때 혼인도 할 수 있을 거야.”

    “전하!”

    기억에서 헤어 나온 야우가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닦으며 한등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말해봐. 공자님께서 눈여겨보는 소저가 있다고,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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