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90)화 (90/385)

90화. 대장공주

오후가 되어서야 화신점을 보려는 사람들의 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신기한 것은, 오전에만 못해도 이삼백 명이 화신점을 본다며 첨통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화신첨을 뽑지 못했다는 것이다.

청옥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화신마마께서 진짜 신령이라도 발휘하신 건가? 인연이 안 돼서 화신첨이 안 나오는 거야?’

청옥보다 단도직입적인 성격의 함옥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물었고, 지온은 느긋하게 부채질을 하며 대답했다.

“도박장에서 어떻게 속임수를 쓰는지 아세요?”

흠칫 놀란 함옥이 고개를 흔들었다.

“평범한 방법이지요. 주사위 안에 수은을 채워요. 그럼 주사위가 아래로 쳐져서 잘 움직이지 않게 되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그냥 중량 차이를 이용한 거예요. 우리 화신첨이 다른 백첨자보다 아주 조금, 정말 조금 더 무겁거든요.”

“아!”

탄성을 터트린 함옥이 지온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사저가 속임수를 썼구나!”

지온이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백중에 하나라고 해도 화신점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확률도 높은 확률이에요. 쉽게 뽑히면 화신점의 희소성이 떨어지지 않겠어요?”

“그럼 원씨 가문의 며느님과 그 유삼이라는 상인은 어떻게 화신첨을 뽑은 거예요?”

지온이 함옥을 향해 눈을 깜빡거리더니 대답했다.

“이전까지의 화신첨은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화신첨을 바꾼 건 이번이거든요.”

“…….”

어이가 없어진 함옥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밖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지온 소저 계신지요? 대장공주께서 찾으십니다.”

전(殿)에 있던 소녀들은 놀란 얼굴로 지온을 돌아보았다.

살랑거리던 부채를 멈춘 지온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왔구나.’

* * *

난택산방.

공당(*供堂: 공양 드리는 방) 안에서는 목탁이 토닥토닥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편하게 울렸다.

궁인들은 모두 밖을 지키고 있었고 지온만이 매고고를 따라 공주를 알현코자 안으로 들어갔다.

여양대장공주는 부들방석에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경을 외고 있었다.

지온이 공손하게 몸을 낮춰 절을 했다.

“신녀 지온, 대장공주마마를 뵙습니다.”

목탁 소리가 멈추고 대장공주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이 지온으로 향했다.

오송원의 나비 사건 때도 매고고가 그녀를 데려왔었다.

당시 무척 아름다웠던 소녀로 기억하고 있고 지금 다시 살펴보아도 여전히 아주 아름다운 소녀였다. 도성의 다른 명문 규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녀.

‘그러나 이 아이가 그런 이들을 하였단 말이지…….’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마마.”

매고고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대장공주는 경을 필사하는 책상 옆까지 걸어가 그 옆에 앉았다.

그녀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방전에서 화신점이라는 것을 본다 들었네. 화신첨을 뽑은 이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그렇습니다, 공주마마.”

“보아하니 자네도 자네의 스승도 모두 적잖은 능력을 익힌 모양이야.”

대장공주가 말했다.

“본궁이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 사람을 불러 점을 한 번 볼까 했었네. 그러다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겨 이리 불렀는데, 번거롭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먼?”

대장공주가 부르는데 감히 누가 번거로워한단 말인가?

지온이 대답했다.

“신녀의 영광일 따름입니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가 본궁을 대신하여 점을 한 번 봐주겠나?”

한쪽에 있던 매고고가 귀갑(*龜甲: 거북이의 등딱지)을 챙겨오자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마마, 귀갑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장공주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귀갑이 필요치 않으면 동전을 쓰려는가?”

지온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장공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눈으로 보고 입으로 풀어 해석하는 경지에 올랐단 말인가? 자네 나이엔 쉽지 않을 것인데…….”

말을 멈추었던 그녀가 다시 이었다.

“그럼 한 번 해봐.”

고개를 든 지온이 자세하게 그녀를 살폈다.

아마도 얼마 전에 앓았던 탓인지 대장공주는 다소 말라 보였다. 하지만 정신 상태는 나쁘지 않아 보였고 입가에 보이는 미소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안 좋은 부분이 있다면, 손가락을 다친 것인지 작은 고약을 손가락에 붙여놓았다는 것이었다.

살피는 것을 마친 지온이 입을 열었다.

“마마께선 마음에 풀지 못한 일이 있으십니다.”

“오? 무슨 일인가?”

지온이 밝은 웃음을 드러내며 솔직하게 말했다.

“신녀의 일입니다.”

흠칫 떨린 대장공주의 손이 손잡이를 꾹 움켜쥐었다.

마음을 다스린 대장공주가 눈앞에 있는 소녀를 주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신첨으로 소원을 이뤄주고, 이리 신통한 예측이라니, 자네의 그 능력은 스승보다 더 강한 듯하네!”

칭찬하는 듯 들린 말이었지만 어딘지 지온에게 위협을 느끼는 듯한 감정이 묻어나는 칭찬이었다.

매고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온 소저가 대장공주의 경계심을 건드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온은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이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공주마마.”

대장공주가 웃었다.

“본궁이 과찬을 한 것이 아니야. 조방궁 전체에서 누군가의 소원을 이뤄주는 곳은 자네의 사방전이 유일하지 않은가. 설마하니 자네, 귀신과 소통하여 화신마마께 복을 내려 달라 하는 것인가?”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본궁이 자네 일로 마음에 풀지 못한 일이 있는 줄은 어찌 알게 되었는가?”

“그것은 마마께서 신녀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

지온의 시선이 대장공주의 손가락으로 옮겨갔다.

“마마께선 손가락을 다치셨지요?”

대장공주가 손가락을 들어 살피며 지온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마의 주변엔 많은 궁인이 있어 마마를 대신하여 움직이니 마마께서 다칠 일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손가락은 팔꿈치나 무릎과는 달리 실수로 부딪혀 다칠 수도 있는 곳이지요.

안전한 환경 속에서 지내시는 마마께서 쉽게 다치지 않을 만한 곳을 다치셨으니, 제 생각에 마마께선 다치셨을 때도 아마 위험하지 않은 일을 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치게 되신 가장 큰 이유는, 마마께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으셨기 때문이겠지요. 하여 신녀는 공주마마의 마음에 풀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장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 화초를 손보다 실수로 손가락을 찔렸던 것이다.

“그리고 마마께선 병환에서 회복하시어 신색도 좋으시고 보기에 특별한 우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만약 있다더라도 오래된 일이거나, 아니면 다른 이의 일이겠지요.

마마께선 그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으셨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오늘 저를 찾으셨기에 마마가 마음에 두신 일이 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지온이 고개를 숙였다.

“이 세상에 귀신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귀신을 위장하는 것이 있을 뿐이지요. 신통한 예측도 그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대장공주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걷혔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라…….”

그녀의 말이 무거워졌다.

“그렇다면, 네 죄를 알렸다?”

지온이 고개를 들자 서슬 퍼런 대장공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본 왕조가 세워지며 온갖 귀신에 관한 일들을 엄금했네. 자네도 분명 귀신을 믿지 않으면서 화신점이란 것을 만들어 혹세무민하다니, 그러다 어느 날 자네가 화신마마의 화신(化身)이라 청하면 천하가 다 그에 응할 것이 아닌가!”

죄명이 커도 너무 크지 않은가!

매고고가 차가워진 숨을 들이마시며 지온을 보았다.

대장공주는 지금 그녀가 요녀가 되어 백성들을 꾀어내려는 것이 아닌가,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머리가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어서 무릎 꿇고 죄를 빌지 않고……!’

그러나 지온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점이라는 것도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통찰하는 학문입니다. 이를테면…… 마마께서 신녀를 부르신 것은, 이미 마마께서 신녀의 저의가 불량하다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매고고는 침묵하는 공주를 보며 애가 탔다.

‘저 소저는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야? 어찌 공주마마와 줄다리기를 하려 들어!’

설령 공주마마가 그리 생각한다 할지라도 일단 부드럽게 숙이고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꿰뚫어 보이는 것을 좋아한단 말인가? 더구나 그는 윗사람이 아닌가?

역시나 대장공주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담이 아주 큰 아이로구나.”

“신녀는 이것이 마마께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경의라 생각했습니다.”

지온이 진심으로 말했다.

“꿀 바른 듯한 화려한 말을 신녀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와서 그런 말들로 마마를 대하는 것은, 공주마마, 신녀의 성심을 다한 진심이 아닐 것입니다. 신녀가 가진 것은 마마께 있어 그저 작고, 작고, 작을 뿐이오니, 제가 가진 것 중에 유일하게 귀한 것은 이 성심을 다한 이 진심뿐입니다.”

그리고 지온은 그제야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신녀의 언행이 무도하였습니다. 마마, 벌을 내려 주십시오.”

* * *

퇴근한 유신지가 막 문을 나서자 제 바보 같은 아우가 자신을 기다리고 선 것이 보였다.

“여긴 어쩐 일로 왔느냐?”

유신지가 유모지의 머리를 쿵 하고 쥐어박으며 말을 이었다.

“집에서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이리 싸돌아다니다니. 지난번 사건으론 부족했던 것이냐?”

지난 사건 이야기에 유모지가 순간 부르르 떨더니 불평을 터뜨렸다.

“겁 좀 그만 줘!”

“내가 겁을 줬다니?”

마침 시종인 부주가 건네는 엿물을 두른 군밤을 받은 유신지는 군밤을 까며 말을 이었다.

“너를 묶고, 도끼로 토막 내려던 사람이 나는 아닐 텐데?”

그 소리에 당장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맨 유모지가 거의 울듯이 애원했다.

“형! 그 이야기 좀 하지 마, 제발!”

그날 그렇게 돌아온 유모지는, 그 후로 꽤 오래 악몽을 꾸다 이제야 슬슬 괜찮아지던 참이었다.

웃음을 보인 유신지가 깐 군밤을 건네며 위로했다.

“그래, 그래. 하여간 여긴 어쩐 일이냐?”

그 소리에 유모지가 갑자기 흥분하며 입을 열었다.

“형, 형도 그 소식 들었지? 원겸 형님이 후사를 보게 되었잖아. 형수가 회임한 것도 그렇고, 그 상인의 일도 그렇고……. 화신점이 그렇게 영험하면 우리도 가서 한 번 볼까?”

“그러니까 지금 날 찾아온 것이 조방궁에 가자고 온 것이냐?”

유모지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잖아. 가서 점이라도 봐서 안정을 찾는 게 시급한 것 같지 않아, 형?”

일리는 있었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 맞긴 한데…….’

유신지는 속내를 드러냈다. 

“가고 싶으면 네가 가면 되지, 나는 왜 찾아온 것이냐?”

유모지가 우물쭈물하자 유신지는 금방 깨달았다.

“오! 지온 소저가 무서운 것이냐?”

그러자 한참을 눈만 끔뻑거리던 유모지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혼약했던 사이니, 다시 보면 어색할 것 같아서 그렇지.”

‘어색은 무슨……! 영산에서 데리고 놀러 다닐 땐 전혀 안 어색했던 모양이지?’

속으로는 어이없어 웃으면서도 유신지는 마차에 오르며 유모지에게 말했다.

“계속 서 있을 것이냐? 어서 오르거라!”

마침 유신지 역시 지온을 보러 가보긴 할 생각이었다.

영산에서 돌아온 후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지온의 일에 관여할 틈조차 없었다.

유삼이란 상인이 화신첨을 뽑은 일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지다 못해 도성을 절절 끓게 했으니 그도 당연히 들었었다. 그러나 소문을 들었어도 유신지는 지온을 믿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난번에 나더러 소문을 내라고 한 것만 봐도 분명 지온 소저는 생각이 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어려움이 있어 제 도움이 필요했더라면, 진즉 자신에게 부담 없이 도와달라 했을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온이 언급한 날이 되자마자 상인의 문제는 단박에 해결되었고, 심지어 원겸 형님의 아내가 회임했다는 소식까지 적절한 순간에 퍼졌다.

‘역시 하늘은 능력 있는 사람을 총애하는 법인가.’

두 가지 일이 한 번에 벌어진 덕분에 화신점의 명성이 하늘 끝까지 치솟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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