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89)화 (89/385)
  • 89화. 그 아이를 오라하게

    옥비를 본 지온은 황제의 병이 이미 손 쓸 수 없이 깊어졌단 것을 깨달았다.

    의안왕이었던 그가 금벽이를 비(妃)로 삼았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옥종화의 이름을 붙여놓고, 자신의 얼굴을 뒤집어씌워 놓다니. 그것이 저 자신을 속이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미 그의 옆에는 가장 좋은 옥종화의 대체품이 있어요. 그게 있는 이상, 그는 옥종화와 비슷한 다른 여인들을 더 수집하지 않을 거예요. 그의 마음에 옥비보다 더 옥종화에 잘 어울리는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녀는 지금 지씨 가문의 큰소저가 아니던가? 아무리 닮아도 일부러 옥종화로 모습까지 위장한 금벽보다 닮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온이 몸을 돌렸다.

    루안의 손이 여전히 문을 누르고 있었던 탓에 서로의 거리는 너무도 가까워, 마치 그의 품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 상황이 어떻든 당신보다 더 위험하진 않아요.”

    루안은 정신이 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전부터 이상했어요. 당신과 그는 서로 잘 안 맞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사람이 당신을 그렇게 믿는다니. 그게 이것 때문인가요?”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약 이름이 뭐죠?”

    계속되는 지온의 질문에 루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신경 쓰지 마시오.”

    지온이 빙긋 웃으며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그도 반항하지 않고 지온이 원하는 대로 맥을 보도록 놔두었다.

    이윽고 지온이 입을 열었다.

    “요즘 술 마시는 습관이 생겼나 봐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몸에서 아주 흐릿하긴 했지만, 술 냄새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가깝게 붙어 있다 보니 상대가 조금이나마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지온이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았다.

    “당신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알고 있다니, 나도 안심이네요.”

    “내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알고 있으니, 당신도 안심하시오.”

    * * *

    크게 화가 난 서아가 말했다.

    “비키라고요! 안 먹고, 안 마실 거예요!”

    한등은 아무렇지 않은 듯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잠깐 앉아 있으면 어떠십니까? 여기 화첩이…….”

    진지하게 한등을 두들겨 패야 하나 고민하는 서아의 귀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온이 나오는 것을 본 서아는 당장 한등을 밀쳐버리고 날듯이 지온에게 달려갔다.

    “아가씨!”

    서아는 지온을 붙들고 위, 아래, 좌우, 사방을 연신 살핀 끝에 어느 옷가지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제야 서아는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름을 덜었다.

    “아가씨, 그만 돌아갈까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자, 한등이 잊지 않고 난간에서 소리쳤다.

    “주인장, 포장한 간식 있죠? 지금 가시는 분들께 챙겨 보내세요!”

    지온이 고맙다는 듯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 모습에 눈이 풀려버린 한등은 별실에 들어오는 순간까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지온 소저는 정말 선녀님 같아. 그러니까 석불 같은 우리 공자님께서 금기를 깨신 거겠지.’

    루안은 여전히 뒤돌아선 채로 창가 앞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한등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너무 빨리 끝내신 거 아니에요?”

    돌아선 루안이 한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스산했다.

    “뭐라고?”

    한등이 재빨리 말을 거두며 억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이야기가 너무 빨리 끝난 게 아니냐는 거지요. 언제 들어가셨는데, 벌써 이야기를 다 끝내신 것입니까?”

    “할 이야기를 다 했으니, 그럼 끝난 것이지.”

    루안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한등은 눈치 빠르게 창문을 닫더니 두꺼운 천막까지 내려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했다.

    잠시 후, 별실 안으로 사람 하나가 들어와 부복하며 엎드렸다.

    “속하, 야우(夜雨). 넷째 공자님을 뵙습니다.”

    * * *

    오월의 초하루.

    조방궁의 새벽종은 이제 막 울렸지만, 산문밖엔 이미 바글바글하니 사람들로 가득했다.

    산문이 열리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꼭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앞다투어 달리기 시작했다.

    “밀지 마시오!”

    “내 신발, 내 신발!”

    “아악! 누가 내 발 밟은 거야!”

    엉망진창인 상황에 아기 울음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삼청전 앞에 선 능양진인은 저들이 사방전 문 앞으로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선고님, 점을 보러 왔습니다!”

    “내가 먼저 왔으니, 비키시오!”

    “내가 먼저 소리쳤으니, 응당 내가 먼저지!”

    사방전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담청색 도포를 차려입고 미소를 짓는 청옥은 온화해 보였다.

    화신마마의 금신은 그녀의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촛불 빛이 눈부시게 비추는 가운데 마치 금빛이 그녀에게 쏟아지는 듯 선기가 흘러넘쳤다.

    ‘화신마마님을 모시고 공양하는 선고님이라 그런지 역시 다르네, 달라.’

    ‘안 그러면 화신점이 어떻게 그렇게 신통방통하겠어?’

    시장통 같던 사방전의 입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청옥이 두 손을 모으며 도가의 예를 취했다.

    “선인들께선 다들 서두르지 마시지요. 화신점은 인연을 보는 것이니 천천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잽싸게 청옥의 말에 반응하여 말했다.

    “선고님 말이 맞지!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었다가 화신마마님 기분이라도 상하셔서 복을 내려 주지 않으시면 어쩌냐고! 천천히 하시자고, 천천히!”

    “그럽시다. 줄을 서시오!”

    청옥이 다시 한번 예를 올리며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인들.”

    모였던 사람들은 두 줄로 줄을 섰다. 차례차례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온순할 수가 없었다.

    삼청전 아래에 있던 제자 하나가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쏟았다.

    “수완 한 번 끝내주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당에서 찐빵 하나 더 달라고 구걸했던 주제에……. 이젠 무슨 고인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네.”

    어두운 얼굴의 능양진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자는 능양진인의 비위를 맞출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것들 너무 방자하게 굴고 있습니다. 조방궁 전체가 저들 것인 양 날뛰는데, 혼을 한 번 내줘야 하지 않을까요?”

    능양진인이 차갑게 대답했다.

    “혼을 내? 네가 무엇을 가지고 혼을 낼 것이냐? 너희는 내가 보기 아니꼽다고 사람 배를 골리는 너희들 같은 줄 아느냐?”

    비위를 맞추기는커녕, 스승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은 제자는 당황하여 얼른 대답했다.

    “제자는 그저 스승님께서 너무 속상하실 것 같아…….”

    능양진인이 차갑게 웃었다.

    “내가 속상할 것이 무엇이냐? 조방궁에 향불이 늘어나고, 명성이 늘어나는데, 주지인 내 얼굴에도 역시 금칠이 되지 않겠느냐? 주지인 내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어린 장사와 대거리를 하겠느냐! 체통 생각을 하여야지!”

    그러고는 휙, 하고 불진을 휘두른 그녀가 낙영각으로 몸을 돌렸다.

    ‘참으로 눈치도 없지! 화옥, 그 아이와는 비교조차 되질 않으니!’

    화옥을 떠올린 능양진인의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화신점, 화옥.

    모두 같은 사람 때문에 벌어진 사단이 아니던가!

    * * *

    아팠던 여양대장공주의 몸은 거의 나은 상태였다.

    탕약을 들고 각루를 오르던 매고고가 사방전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있는 대장공주를 보고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 탕약을 드실 시간이옵니다.”

    대장공주는 탕약을 받아 한 번에 털어 마시고는 궁인이 건네는 밀전을 마다하며 물었다.

    “그 일은 대체 어찌 한 것이라던가?”

    손을 저어 궁인을 내보낸 매고고가 홀로 대장공주를 모시며 대답했다.

    “제가 알아보니 그 상인이…….”

    매고고가 세세하게 이야기를 전할수록 듣고 있던 대장공주의 눈이 점점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운하를 준설하고 강왕비가 도성으로 돌아오는 이 두 가지 일이 한 번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만한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로구나. 그 아이는 그것을 어찌 알았던 것이야?”

    매고고가 웃었다.

    “저 역시 그것이 궁금하여 사람을 보내 사방전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정기적으로 관보를 받아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정책과 시행령을 모두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랬던 것이었구먼!”

    대장공주가 감탄했다.

    “그 아이처럼 어린 여아가 그리 꾸준하게 관보를 보기란 쉽지 않네. 더구나 그 안에서 무언가를 보고 실제로 반영할 수 있을 정도라니. 그런 능력으로 관리의 길에 들어섰더라면 분명 청운(*靑雲: 높은 관직)을 밟았을 것이야.”

    “그렇지요. 지 소저의 능력이 오래된 관리들 못지않습니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원씨 가문의 그 일은 또 어찌 된 것인가?”

    매고고가 대답했다.

    “원씨 가문의 며느리 기씨가 암암리에 잘 알고 있던 의원을 찾은 후 제 집안의 여동생과 왕래를 끊었다 합니다.”

    안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장공주 역시 낯선 것이 아니었던지라 매고고의 대답에 금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소인이 담 태의에게 물어보니, 원씨 가문에서 이미 여러 번 실력이 뛰어난 의원에게 진맥을 받은 것을 보면 아마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 했습니다. 회임이 되지 않는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예를 들어 마음이 우울한 것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였지요.

    원씨 가문의 공자와 그 아내가 원부에서 나와 광명사 근처에서 한 달쯤 지냈으니 괴롭게 하는 일들도 없고 마음도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운 좋게 회임을 하게 되었을 수 있었겠지요.”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의술에서 마음의 괴로움은 질병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는데 회임이 안 되는 것이 어디 대수겠는가.

    이해한 대장공주가 말했다.

    “그러니 애초에 귀신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단 말이지.”

    매고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고고는 대장공주의 시선을 따라 사방전 앞에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향객의 행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마,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지온 소저는 모든 것을 의도한 것입니다.”

    대장공주는 말없이 침묵했다.

    분명 멀쩡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화신점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이것이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이유란 말인가?

    ‘어린 여아가 왜 그리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야?’

    “그 아이가 바라는 것이 너무 클까 걱정인 게야.”

    매고고가 공주에게 말했다.

    “커봐야 얼마나 크겠습니까? 천하 여인의 지존 자리라고 해봐야 궁 안의 그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궁 안에 있는 그들 중에 지온 소저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요물 같은 것을 치울 수만 있으면 마마께서도 안심하실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그러십니까?”

    요물이란 말에 대장공주는 미간을 좁히며 낮은 목소리로 분노를 드러냈다.

    “다른 일은 그렇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마가 낀 것이야!”

    매고고가 담담하게 화제가 다시 이끌어왔다.

    “그럼 이번 내기는 마마께서 지신 것입니다.”

    말이 없던 대장공주가 미소를 보였다.

    “앞으로 자네와 쉽게 내기를 하면 안 될 듯해. 이기는 법이 없으니…….”

    매고고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마마께선 혼란을 일으키진 않을까 저어하시잖습니까. 그러니 자연히 조심 또 조심하실 수밖에 없지만, 저는 그런 걱정이 없으니 대범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대장공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를 들라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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