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증명
찾아온 이는 루안이었다.
마침 형부 관아와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사건 조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루안이 말했다.
“저는 형부의 낭중으로 형법을 집행합니다. 시정에서 함부로 말을 달리는 일은 형법에 저촉되는 일인데, 어찌 저와 상관이 없겠습니까?”
“허!”
요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서, 날 데려다 조사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이런 같잖은 일을 폐하께서 신경이나 쓰실 거라고 생각해?”
그러고는 경멸하는 시선으로 그를 쓸어 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니지!”
폐하는 자신의 친형님이었다.
루안의 입이 열렸다.
“국공야께서 오해하셨나 봅니다. 폐하께선 매일 보셔야 할 공무가 태산 같으신데 이런 사소한 일에 어찌 신경을 쓰게 하시겠습니까? 국공야께선 종친의 일원이시니 응당 종정(宗正)어르신의 관리를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종정 어른이란 말에 요의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의 종정 어른은 영종황제의 맏형으로, 강왕조차 백부라 호칭하는 인물이었다.
나이가 워낙 많은 그는 수염을 늘어뜨린 채로 훈계 늘어놓길 좋아했는데, 하필 배분이 워낙 높다 보니 중간에 그를 말릴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의 눈에 찍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저 나 죽었소 하고 그 훈계를 고스란히 듣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의는 그까짓 지루한 훈계 따위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종정 어른이 폐하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댈 것이 걱정이었다. 그러다 폐하께서 체면에 못 이겨 자신에게 금족령이라도 내리면 어쩐단 말인가?
‘이제 막 도성에 돌아와 신나게 놀아보려 했더니만!’
“쓰, 쓸데없이 말만 많아서! 본 공자가 잠깐 실수를 했느니라.”
그리고 요의는 눈을 희번덕희번덕 굴리며 루안 옆을 지나쳤다.
“가만히 뭣들하고 있는 것이야! 어머니께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계시니, 어서 가자!”
급히 그의 뒤를 따라나선 시종들은 말과 일산을 챙기더니 다시금 위세를 부리며 사라졌다.
그렇게 요의를 쫓아 보낸 루안은 지온에게 다가가 말도 걸지 않았다.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제 부하를 데리고 그대로 떠났다.
“아가씨…….”
서아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 대인이 꼭 아가씨를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지 않는가?
지온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마차를 수습하고 있을 때, 시종 하나가 다가와 쪽지를 전달해주었다.
쪽지를 살펴본 지온이 마부에게 말했다.
“점포에 들러야 할 일이 생겼어요. 잠시 후에 우리 가문에서 사람들이 데리러 올 테니, 그만 부인께 돌아가 보세요.”
원씨 가문의 마부는 곤란한 듯 망설였다.
“하오나…….”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국공야께서도 이미 가셨잖아요.”
마부는 그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 * *
지온은 서아를 데리고 간식을 파는 점포에 들어갔다.
점소이가 그녀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별실에 등을 보이고 선 루안이 보였다.
함께 들어가려던 서아 앞을 시종이 막아섰다.
“누님, 간식이나 좀 드시겠습니까?”
서아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 덜컥하고 문이 닫혔다.
* * *
별실 안.
지온이 배시시 웃었다.
“왜 그래요, 화났어요?”
루안이 인상을 썼다.
“내가 왜 화가 나지?”
지온이 진지한 얼굴로 해명했다.
“이건 정말 우연히 벌어진 일이지, 제가 그를 도발한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화나지 않았다니까.”
“인상을 그렇게 쓰고 있으면서 화가 안 났다고요?”
지온은 은근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질투했다고 인정한다고 제가 또 어떻게 하는 것도 아닌데…….”
“…….”
침묵하던 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농담하지 마시오.”
지온이 정말 답도 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어쩔 수 없죠.”
‘그녀는 늘 이렇게 제멋대로였지.’
루안이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자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저더러 오라고 해놓고 그렇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할 거예요?”
그제야 얼굴을 푼 루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씨 가문의 며느리가 회임했단 소식을 들었소.”
“맞아요.”
“그럼 두 번의 화신첨이 모두 증명된 셈이로군.”
지온의 대답은 여전했다.
“맞아요.”
고개를 돌린 루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지? 화신첨을 뽑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니, 그런 명성이 퍼지면 어쩌려고? 조방궁은 황가의 궁관이오. 그러다 궁에서 당신을 불러들일 수도 있는데, 그것이 두렵지 않소?”
지온의 얼굴에 가느다란 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좋은 일이 아닌가요?”
그녀의 대답에 루안은 온몸의 화가 급히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그가 낮게 일갈했다.
“자신의 목숨을 장난 거리로 삼지 마시오!”
* * *
팔보찬합을 연 한등이 서아 앞으로 찬합을 밀었다.
“누님, 간식 좀 드시죠!”
굳은 얼굴의 서아는 미동조차 없었다.
한등은 순진한 얼굴로 그녀에게 웃음을 지었다.
“이 집 간식 진짜 맛있습니다. 진짜예요,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한등이 간식을 하나씩 짚어가며 말했다.
“이건 대추 소를 넣어 만든 마경단, 조니산약고(棗泥山藥糕)라는 겁니다. 맛이 시원하면서 달콤한 것이 먹어도 물리질 않아요.
그리고 이건 소나 양젖을 끓이고 굳히면서 만들어진 유지를 소라 모양으로 만든 소유포라(酥油鮑螺)라는 것인데, 얼마나 푹신하고 부드러운지 모릅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사라져 버린다니까요? 도성에서 소유포라를 만드는 집 중에 이 집이 가장 제대로 잘 만듭니다.
그리고 이건 실국수라는 건데, 서북에서 온 겁니다. 바삭하면서 풍미가 얼마나 좋은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해댔지만, 서아는 간식을 건들지도 않았다.
깊은 좌절을 맛본 한등이 물었다.
“누님, 간식 안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럼 뭐 좋아하시는데요? 제가 사람을 시켜서 사오라고 할게요.”
서아의 무거운 입이 그제야 열렸다.
“아가씨가 먹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 * *
루안은 정말 화가 났다.
감정의 변화 때문에 그의 얼굴에 뜬 홍조가 더욱 붉어졌다.
“대체…….”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순간 지온이 앞으로 나서며 그의 손을 낚아챘다.
흠칫 놀란 루안은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지온이 워낙 손을 세게 잡고 있어 힘을 줬다가 혹시라도 그녀가 넘어질까 걱정이 됐다.
그 사이 지온의 다른 한 손이 루안의 손목 안쪽, 맥문(脈門) 위에 올라갔다.
그러자 매우 놀란 루안은 그제야 더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힘을 주어 손을 빼냈다.
몸을 휘청거리긴 했지만, 창틀을 붙잡아 자세를 바로 한 지온이 입을 열었다.
“나더러 목숨을 장난 거리로 삼지 말라더니, 당신은요? 이게 당신이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이유인가요?”
제 손을 몸 뒤로 숨긴 루안의 표정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무애해각은 다양한 기인과 능력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재능 넘치는 문인 기재도 있었고 뛰어난 장인 직공도 있었다.
그러나 옥종화는 다른 학생들과 달랐다. 과거를 볼 필요가 없었던 그녀는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금기서화(琴棋書畵)는 물론, 의복성상(*醫卜星相: 의술, 점, 별자리, 관상)까지 관심이 가는 것은 모두 배웠던 것이다.
그중 의술 역시 그녀가 대강이지만, 섭렵한 분야 중 하나였다.
지온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뭘 먹은 거예요? 그가 당신에게 먹인 거예요?”
루안의 입술이 잠시 벙긋거렸지만,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온이 다시 물었을 때 그는 그저 이렇게 대답했다.
“지온 소저, 너무 깊이 관여하시는군.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오.”
그의 말에 지온은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당신이 죽어도 나와 상관없다는 말인가요?”
그러나 이번엔 루안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상관없었지. 당신이 누구라고 상관이 있지?”
순간 멈칫한 지온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옥종화였다면 당연히 기세등등하게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다시는 옥종화로 돌아갈 수 없는 지온이었다.
“알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역시 무엇을 하든, 대인과 상관없겠지요.”
말을 마친 지온은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 * *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곧고 바르게 앉아 있던 서아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한등은 깜짝 놀랐다.
‘아니, 들어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공자님이 일 처리를 이렇게 못하시는 분이 아닌데?’
한등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지온의 뒤에서 나타난 루안이 손을 한 번 휘둘러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어!”
눈이 휘둥그레진 서아는 당장에 달려들 기세였다.
‘뭐야? 지금 강제로 사람을 가둔 거야?’
한등은 이미 그녀 앞을 막아서며 방긋 웃음을 짓고 있었다.
“누님, 서두르지 마시죠! 아가씨께선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으니, 잠깐 앉아서 기다리실까요?”
“비켜요!”
서아가 버럭 화를 냈다.
“우리 아가씨는 분명 가시려고 하셨다고요!”
문이 이리 닫히는 것을 본 상황에 서아가 어찌 편히 앉아 기다릴 수 있겠는가?
문을 닫을 때 보니 그 루 대인이라는 사람의 몸이 아가씨 뒤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보기엔 멀쩡해 보이더니,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어! 어디서 못된 짓 한 번 해보려고!’
“아니에요!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나셨습니다!”
한등이 방실방실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죠. 아니면 제가 옆집에 파는 차탕(*茶湯: 기장이나 수수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설탕을 탄 간식)이라도 사오라고 할까요? 옆집의 여지떡도 엄청 맛있는데.”
* * *
한편, 별실에 있는 지온은 문에 손을 얹은 채 움직임이 없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루안 역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밖에선 서아와 한등이 말다툼을 이어가는 소리가 소란스레 들려왔지만, 두 사람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척에 선 거리에 서로가 내쉬는 호흡 소리만이 선명했다.
‘그가 먼저 이렇게 가깝게 다가온 적이 있었나?’
지온은 어렴풋이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루안은 다른 이가 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까이 갔다 그에게 냄새가 남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남녀도 유별했으니, 그는 언제나 철저히 예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옥종화를 대할 땐 늘 경계하며 멀리하더니, 지온에게는 이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더는 의안왕이 아니오.”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지만, 목소리는 무척이나 작았다.
“당신도 옥비를 봤겠지. 세상에 당신보다 그녀와 닮은 이가 있을까? 황제의 인내심에 도전하지 마시오.”
지온의 마음이 슬그머니 떠올라 너울너울 나부끼듯 흔들렸다.
그녀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는 안 그럴 거예요.”
“확신할 수 있는 건가?”
“당연하죠.”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멈추었던 지온이 말을 다시 이었다.
“지난 삼 년간, 그는 옥비만 총애하지 않던가요? 그건 그가 했던 말 때문이에요. 자신은 영원히 평생토록 오직 그녀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그 말 때문이에요.”
듣기엔 비웃는 것 같았지만, 지온은 무척 진지한 얼굴이었다.
“다른 비와 빈들을 모두 들였으니 이미 그는 약조를 어기게 된 셈이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것이라 드러나는 부분만 봐서는 안 돼요. 그는 아마도 과거의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옥비를 만들어 냈을 거예요.
그는 자신을 두 사람으로 분리했어요. 황제인 그는 당연히 하고 싶은 것을 하겠지만, 그가 의안왕일 땐 오직 옥종화 하나만을 사랑할 거예요.”
잠시 멈칫했던 루안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를 한 번 뵌 게 다인 데 그걸 다 알았다고?”
지온의 웃음이 처량했다.
“저는 폐하가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의안왕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거든요.”
겉으로 보이는 그는 태자의 좋은 동생이었다. 그저 밝고 활달해 보였던 그의 마음속엔 질투와 아집이 가득했고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서 그는 태자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는 태자가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은 어떻게든 그것을 해 보이려 저 자신을 몰아붙였다.
마치 그것만이 스스로가 태자보다 더 강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며, 옥종화였던 자신이 기댈만한 가치 있는 인물이 되는 길이라 여기는 듯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마음이 병든 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