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87)화 (87/385)
  • 87화. 부 한 수

    청옥은 흥분했다.

    단 이틀 만에 묻는 이 하나 없는 고립된 섬 같던 사방전이 모르는 이 하나 없는 곳이 된 것이다.

    ‘이렇게 쉽다니.’

    “사저, 사저…….”

    그녀가 흥분에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가 해냈어요! 해냈어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지온은 손에 든 쪽지를 보고 있었다.

    “곧 세 번째 달이네요. 이번엔 점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할 거예요.”

    청옥과 함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이 쪽지를 서아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리 잠깐 나갔다 와야겠다.”

    청옥이 머뭇거렸다.

    “사저, 그럼 저 밖에 있는 이들은…….”

    “사매가 장사니까, 사매가 알아서 해야죠.”

    흥분했던 마음을 청옥이 가라앉혔다.

    ‘맞아. 내가 장사니까, 사방전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해.’

    이제 앞으로 자신들은 밥조차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어린 선고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큰일도 감당해야 해.’

    “알겠어요.”

    * * *

    지온은 서아를 데리고 조용히 조방궁을 나섰다.

    마차 한 대가 패루(*牌樓: 길을 가로질러 세우던 커다란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차를 지키던 아낙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살갑게 다가와 지온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이윽고 마차는 어느 주루로 들어갔다.

    지온을 마차에서 내려 준 아낙네는 정원을 지나 별실로 들어갔다.

    별실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는데, 지온이 들어가자 몸을 일으키며 지온에게 예를 갖췄다.

    “지온 소저.”

    지온이 미소와 함께 마주 예를 갖췄다.

    “기씨 부인.”

    오늘 기문혜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굴도 붉고 촉촉한 것이, 온몸에서 행복하고 안락한 분위기가 넘쳐 흘렸다. 조방궁에서 수심에 잠긴 얼굴로 지온을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친절하게 다가온 기문혜가 지온을 손을 잡고 지온을 자리에 앉히더니 시비에게 음식을 내오라 시켰다. 시비가 나간 뒤 기문혜가 입을 열었다. 

    “본래 조방궁에 찾아가서 감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보는 눈도 많고 그렇게 하면 일이 복잡해지다 보니 제 부군께서 걱정하시더군요. 번거롭게 지온 소저를 여기까지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이리 큰 선물을 주셨는데 걸음 한 번 하는 것이 무어라고요! 몸도 불편하신데, 당연하지요.”

    기문혜가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드셨으면 다행이지요.”

    지온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큰 선물이었다.

    원 재상의 부는 천금을 주고서도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던가? 이 부가 세상에 나오게 한 화신점의 명성은, 분명히 이 땅 방방곡곡에 울려 퍼질 터였다.

    자신은 역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두 번의 화신첨이 모두 예상보다 더 큰 소득으로 돌아왔어.’

    지온의 상념을 비집고 기문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남편과 다시 살던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복중에 아이가 있으니 원한다면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요. 그래도 제가 돌아가자 하니 남편도, 시아버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셨지요. 그리고 시어머니께서도 예전과는 다르게 저를 곤란케 하지 않으십니다.”

    기문혜가 아직은 평평한 아랫배를 만졌다.

    “전에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좋은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온 소저, 모두 지온 소저의 화신첨 덕분입니다.”

    지온이 대답했다.

    “부인께 자녀의 연이 닿은 것일 뿐입니다.”

    “부인이라 하지 마세요. 제 성은 기, 이름은 문혜입니다. 제가 그래 봐야 지온 소저보다 서너 살밖에 많지 않으니, 괜찮으시면 절 언니라 부르시면 어떠십니까?”

    지온은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지금으로선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 원씨 가문의 며느리가 지온에게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라는 것은 자신의 뒷배가 되어주겠다는 것과 같았다.

    지온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기문혜가 말했다.

    “친동생을 잃었지만, 다시 동생이 생겼네요. 참으로 인연입니다.”

    그러고는 꿀물을 술 대신 삼아 시원하게 한 잔을 마셨다.

    * * *

    자리가 파한 후, 지온은 기문혜를 원씨 가문 댁으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저택의 옆문에 도착했을 때, 먼저 와있던 작은 가마 한 대가 지온의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문을 지키고 있던 아낙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문을 지키던 아낙이 기문혜의 마차를 보더니 말했다.

    “함부로 귀찮게 할 생각이랑 마쇼! 우리 작은 부인께서 돌아오셨으니까!”

    그러고는 시녀를 밀어 버리고, 돌아온 기문혜를 맞았다.

    그때 가마의 주렴이 열리더니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언니!”

    아낙은 난감했다. 부인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또 상대의 신분이 걸려 함부로 행동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기문혜가 직접 나서주었다.

    “원아, 마차에서 나를 좀 내려다오.”

    가마에서 내린 기문영은, 붉어진 눈으로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내리는 제 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왜 그래? 왜 나더러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 내가 뭐 잘못했어?”

    눈물을 닦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기문혜의 마음은 차가웠다.

    자매로 서로 의지하며, 십여 년이란 시간을 함께 자란 사이였다. 기문혜 자신이라고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동생에게 받은 물건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확인된 후 그녀는 며칠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장 찾아가 왜 내게 이런 짓을 했는지 따질까도 생각했고, 아니면 내가 나도 모르는 실수로 동생을 상처 주어 이런 원한을 맺히게 한 게 아닐까 반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 끝에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자매의 정이 얻기 어려운 것을, 그것이 거짓이었던 것을 어찌하겠는가.

    “뭘 잘못했는지, 네가 몰라?”

    담담한 기문혜의 음성에 기문영이 흠칫했다.

    언니는 자신에게 한 번도 저렇게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진짜 알아차렸어?’

    기문영의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기문혜가 회임했다는 소식은 듣고 그녀는, 아마도 언니 부부가 이사하면서 전에 있던 물건들을 가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상황을 살피려고 방문을 했던 것이었는데 문지기 아낙이 그녀를 붙잡은 것이다.

    여태 기문영이 언니 기문혜를 보러 왔을 때 웃으며 맞아주지 않던 이들이 있었던가? 그런데 기문영은 이젠 문조차 통과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불안했던 기문영은 기문혜의 말을 듣자 제 발을 저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문혜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역시 그랬던 것이로구나.’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는지 탄식만 나올 뿐이었다.

    기문영의 심장은 이미 벌벌 떨려왔지만 억지로 아닌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뿐이었다.

    “언니 무슨 말이야? 못 알아듣겠어.”

    기문혜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내가 이해되게 말해줄게. 네가 보낸 물건들, 이미 다 확인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찾아오지 마. 난 앞으로 동생 없는 셈 치고 살 테니까.”

    이토록 직설적인 말에 오히려 기문영은 더욱 오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문혜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기문영은 그저 소리만 질렀다.

    “언니, 누구한테 속은 거야?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물건은 내가 선물한 건 맞지만 손을 거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발걸음을 멈춘 기문혜가 몸을 돌리더니 마른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문영아, 아직도 모르겠어? 자매 사이의 정은 서로 노력해야 하는 거야. 한쪽이 원치 않아서 손을 놔버리면 그대로 끊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고. 난 증거 같은 거 필요 없어. 난 네게 악의가 있었다는 확신이면 충분하거든.”

    마차에 다시 오른 기문혜가 주렴을 내리며 명령했다.

    “들어가자.”

    “네.”

    마차는 저택으로 들어갔고, 더는 누구도 기문영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 * *

    기문혜가 다시 마차에 오르자, 골목 입구에 있던 지온 역시 마차 창문의 주렴을 내렸다.

    “돌아가자.”

    지온의 말에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차가 지나는 시정은 떠들썩했다.

    그때였다.

    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비켜라! 비켜!”

    갑작스레 일어난 소란에 시가지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감히 도성의 대로에서 말을 달리다니!

    관부에서 공무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훈귀가문의 사람이 틀림없었다.

    부모들은 급히 아이를 안아 올리며 옆으로 비켜섰고, 노점을 하던 노점상들도 얼른 펼쳐 두었던 물건들을 옆으로 치웠다.

    하지만 마차는 그리 쉽게 비킬 수가 없었다.

    원씨 가문의 마부가 급히 방향을 틀긴 했지만 역시나 완전히 비켜날 수는 없었다.

    달리던 말이 마차와 부딪혔다. 말의 비명과 함께 두 마리 말이 모두 넘어졌다.

    “아가씨!”

    서아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바닥에 처박혔다.

    마차를 그리 격하게 틀었으니, 지온 역시 정신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타고 있던 사람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말고삐를 당기긴 했지만, 몸의 중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말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리 심각하게 떨어진 것은 아니었는지 금방 몸을 벌떡 일으킨 그는, 따르던 이들을 밀어내고 분기탱천하여 화를 냈다.

    “비키란 말 못 들었느냐? 본 공자를 넘어지게 만들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마부가 얼른 달려왔다.

    “공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아가씨가 안에 타고 계시니, 제발…….”

    그러나 말을 탄 사내는 이미 마차의 장막을 들어 올려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본 뒤였다.

    목소리가 순간 멈추었다.

    기마복을 입은 젊은 사내의 얼굴에 의혹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내는 갑자기 제 눈을 비볐다.

    “벌건 대낮에, 내 눈이 어떻게 됐나?”

    아니면 왜 선녀가 갑자기 나타난단 말인가?

    그의 눈은 당연히 아무렇지 않았다. 안에 있던 이가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예요? 어디 다치신 곳 없으세요?”

    서아가 긴장한 채 묻자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마부가 달려가 사과했다.

    “공자님, 공자님의 말이 너무 빨라 저희가 미처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소인은 원 재상 댁 사람이온데, 혹여 실수한 것이 있다면 부인께 말씀을 드리고 다음에 다시 한번 찾아뵈어 사죄드리겠습니다.”

    마부는 꽤 노회한 자였다. 먼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란 것을 확실히 한 후에 다시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비록 몸을 낮추긴 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원 재상이라는 이름 앞에 그저 엉덩이를 내뺄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제가 잘한 것도 없는 상황에 재상에게 미움을 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원씨 가문의 사람이었나? 그럼 저 소저가 원 소저란 말이고? 원씨 집안에 이리 아름다운 소저가 있을 줄은 내 전혀 몰랐군!”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는 것을 느낀 마부는 얼른 막아서고 나섰다.

    “공자님. 별다른 일이 없으시거든 소인, 그만 아가씨부터 먼저 보내드리고 오겠습니다.”

    원씨 가문의 아가씨마저 희롱하는데 지온의 신분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날벼락이 아니겠는가!

    “뭘 그리 서두르는가! 원 소저, 나는 요의(姚誼)요. 강왕부에 살고 있고…….”

    마부의 얼굴색이 대번에 변했다.

    성이 요(姚)라니! 강왕부에 살고 있다면, 왕가의 후손이 아닌가!

    ‘큰일일세, 큰일이야!’

    강왕부 사람이면 원씨 가문의 이름을 들이밀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이러다 지씨 가문의 큰소저에게 일이라도 생기면 작은 부인께는 대체 뭐라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왕부의 공자는 그런 마부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저 지온에게 엉겨붙어 말을 걸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공야, 조금 전 시정에서 말고삐를 함부로 놀리신 분이 국공야이십니까?”

    강왕의 아들들은 국공(國公)에 봉해졌기에 여기서 부른 국공야는 요의를 말함이었다.

    멈칫한 요의가 고개를 돌리자 젊은 관원이 수하 관리와 함께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청색 관복을 입은 것을 보니 높아봤자 오 품의 관원이었다. 그러나 그를 보자마자 요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루안! 그게 네놈과 무슨 상관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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