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86)화 (86/385)
  • 86화. 또 왔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누군가 한 마디를 뱉었다.

    “보름이라더니, 정말 딱 보름이 아닙니까? 참으로 신통합니다!”

    곧이어 다른 이가 초를 치고 나섰다.

    “운이 아니겠는지요? 처음에 뽑았던 원씨 가문의 며느리도 있지 않습니까? 벌써 두 달이나 됐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때, 원씨 가문과 비교적 가까운 부인 하나가 문득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오늘 다과회에 원씨 가문의 참정 부인도 초대했지요? 사실 저희 가문과 원씨 가문은 가까이 있어 참정 부인과 함께 오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부인과 함께 가려고 사람을 보냈더니, 참정 부인이 급히 출타하였다지 않습니까? 보아하니 광명사 쪽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이 다과회는 전부터 약속되어 있던 것이고 아드님이 보고 싶으셨으면 잠깐 돌아오라 하면 되었을 텐데, 그리 급하게 움직일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시선을 나누던 부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중얼거렸다.

    “설마……진짜 아이가 생겼나?”

    * * *

    침상 머리에 기댄 기문혜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 위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윽고 문사(文士)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준수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가 기문혜가 누운 침상 옆에 앉았다.

    “어떻소? 불편한 곳은 없소?”

    그가 기문혜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기문혜가 미소를 지었다.

    “없습니다, 좋기만 하지요!”

    “조금 전에 다 게워내지 않았소…….”

    “어머니께서 다들 이렇다고, 석 달만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원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집으로 오면 챙겨주기 편하다며 집으로 들어오라 하시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기문혜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원래는 돌아가는 것이 옳겠지만, 저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원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문혜, 당신이 전과 달라진 것 같소.”

    “어디가 달라진 것 같나요?”

    원겸은 애정을 가득 담아 그녀의 손을 꼭 붙들었다.

    “전에는 그리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소. 언제나 예의를 지켜야 하고 어머니 체면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고 했었지.”

    마음이 복잡해진 기문혜가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제가 계속 이렇게 지내면, 날 방자하다고 여기실 건가요?”

    “내가 왜 그러겠소?”

    원겸이 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는 그의 손길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런 당신 모습이 난 너무 좋소. 내가 아주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지오.”

    기문혜도 함께 웃으며 그의 품에 기댔다.

    “당신이 어떻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내게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럼 지금 내가 하는 말을 꼭 기억하시오. 앞으로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날 딱딱한 얼굴로 바라보지 마시오. 당신 자신을 탓해서도 안 되오. 우린 그동안 아이와 인연이 닿지 않았을 뿐이었던 것이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니요. 당신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인이오.”

    기문혜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좋은 부군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그날 조방궁에 갔던 것이 너무도 다행이었다.

    그날 화신점을 봤던 것이 너무도 다행이었다.

    “왜 그러시오? 어디가 불편한 것이오?”

    원겸이 당황하자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기뻐서 그렇습니다.”

    그녀가 눈물을 쓱쓱 닦았다.

    “이제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께선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이미 당신의 부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지내길 바라실 수밖에 없으실 거예요.

    이번에도 제게 회임 소식이 있자마자 바로 찾아오셔서 이리저리 챙겨주지 않으셨습니까?”

    부인의 말에 원겸은 정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부인이 그리 생각해주면 됐소. 어머니께서 부인을 차갑게 대하시는 것은 내가 어머니의 말을 듣질 않으니 그러시는 것이오. 어머니는 그냥 투덜대시기만 할 뿐, 정말 당신을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오.”

    기문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깨달았다. 남편 앞에서는 시어머니의 좋은 이야기를 하고 절대 서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았다. 한 번이나 두 번은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길어지면 남편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리고 시어머니 앞에서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언쟁을 벌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겉으론 그렇지 않은 듯 넘기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전엔 마음이 비어있어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임신했으니 자신도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생긴 것이다.

    ‘역시 화신첨을 뽑은 것에 감사해야겠어.’

    그때 시녀가 말했다.

    “작은 부인, 조씨 가문 댁 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기문혜의 여동생인 기문영이 찾아왔단 소리였다.

    원겸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처제와 이야기 나누시오.”

    “그러실 것 없습니다.”

    기문혜는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채 시녀에게 말했다.

    “가서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잠들었다 전하시게.”

    “네, 부인.”

    원겸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처제와 싸운 것이오?”

    기문혜가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어찌 그 아이와 싸우겠습니까? 정말 피곤해서 그런 것이지요. 당신, 잠깐 저와 같이 자줄 수 있나요?”

    언제나 사이가 좋았던 자매였던지라 원겸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기문혜는 침상 머리에 기대어 이따금 부채를 부치며 옆자리에 누워 잠에 빠진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영산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그동안 기문영이 보내온 물건들을 전부 모아 잘 아는 늙은 의원에게 검사를 맡겼다.

    역시나 일부 원단에서 무언가를 넣은 것이 발견되었다.

    자신은 지난 삼 년간 매일 매일 아이를 낳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원흉이 언제나 자신의 옆에서 위로해주던 친동생이라니?

    그녀는 원씨 가문에서 혼담이 왔을 때를 떠올렸다.

    * * *

    자매 둘은 같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기문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언니, 원겸 오라버니랑 언제 잘 된 거야? 내가 언니랑 매일 붙어 다녔는데, 나도 몰랐잖아?”

    기문혜는 그때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며 대답했었다.

    “바로 얼마 전이야. 갑자기 오라버니가 우리 집에 혼담을 보내고 싶다고, 나한테 너도 그러고 싶은지 묻더라고…….”

    “그럼 그전에는 표현한 적 없었던 거야?”

    “없었지. 오라버니는 예의 바른 사람이잖아. 매번 오라버니를 만날 때마다 너랑 같이 있었는걸.”

    “그렇구나…….”

    그리고 다음 날, 기문영은 병이 났다.

    기문혜의 혼사가 확정되고서야 기문영의 병은 나았고, 기문영은 살도 홀쭉하게 빠졌었다.

    그때 자신은 여동생이 그저 아파서 그렇게 살이 빠졌다고 생각했었다,

    * * *

    ‘하지만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니…….’

    기문혜는 화가 나지는 않았다.

    동생이 자신의 남편을 좋아했던 것도 말이다. 그때는 다들 혼인을 하지 않았었고 동생은 어린 소녀였으니, 동생의 연심은 비난받을 것도 없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용서할 순 없었다.

    동생의 질투심 때문에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매일 같이 시어머니의 질책 속에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지난 수년간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그저 참으라고, 시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했을 뿐이었다.

    자매란 단어는 정말 쉽게 떨어지지 않는 단어가 아닌가?

    ‘앞으론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야!’

    * * *

    “그 이야기 들었어? 원씨 가문의 작은 부인이 회임했대!”

    “참말인가? 쉽지 않았구먼! 그 집안은 독자라, 삼 년을 꼬박 기다렸지 아마?”

    “아닐 말이여? 내일 축하하러 갈 텐가?”

    “좋지! 같이 가세!”

    원씨 가문을 찾아갈 만한 집안들은, 원씨 가문을 찾아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원씨 가문을 찾기 어려운 가문들에서는 열띤 토론이 한창이었다.

    “작은 부인이 처음 화신첨을 뽑았던 사람 아니야?”

    “맞네, 맞어! 며칠 전엔 상인이 은혜를 갚으러 찾아갔을 때도 이번 점은 맞았어도 원씨 가문의 작은 부인은 효험이 없었다면서 중히 볼 게 아니라더니, 이번에 또 이런 소식이 들리네, 그려?”

    “자식을 구하는 일이 어디 급하게 한다고 될 일인가? 아이가 들어서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이 아닌가, 안 그려?”

    “그렇지! 이것도 빠른 게지, 겨우 두 달째가 아니었나!”

    “두 번 모두 다 통했으니, 이거 화신점이 진짜 소원을 들어주는 건가?”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품은 채 다음 달 화신점을 떠올렸다.

    ‘어쩌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어쩌면 진짜 소원이 이루어질 수도 있잖아?’

    ‘소원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 * *

    이틀이나 두문불출했던 능양진인은 정신이 많이 회복된 것을 느끼고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스승님…….”

    제자들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한 제자가 건네는 차를 받으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다들 얼굴이 왜들 그리 안 좋은 것이야? 궁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서로 눈치만 보며 말이 없던 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제자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제자가 드릴 말씀이 있사온데, 절대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능양진인은 기분이 상했다.

    “이 스승이 그렇게 기운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더냐? 흥분할 일이 뭐가 있다고. 말이나 하거라!”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며 망설이던 제자가 결국 목소리를 냈다.

    “원씨 가문의 며느리가 회임했습니다.”

    찻잎을 가지러 가던 능양진인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제자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능양진인의 시선 아래 제자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오늘 원씨 가문에서 은혜를 갚으러 찾아 왔…… 스승님? 스승님……!”

    눈앞이 새카맣게 변한 능양진인은 기어코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 * *

    조방궁은 언제나 향불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이렇게 향불이 빼곡한 날은 손에 꼽았다.

    상인 유삼에 비해 원씨 가문이 은혜를 갚은 방식은 비교적 간단했다.

    원씨 가문은 관리들을 보내어 조방궁에 있는 여러 전(殿)마다 향을 올리는 것으로 은혜를 갚았는데, 사방전에 도착한 그들은 무늬가 진 고급 비단의 일종인 능백(綾帛)을 펼쳐 사방전에서 공양하고 있는 화신마마에 대해 칭송하는 부(*賦: 작자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산문에 가까운 글)를 한 편 낭송하고 시주를 공덕함에 넣는 것으로 은혜 갚기를 끝냈다.

    요란한 악기들의 연주도 없었고, 선물들도 없었으며, 더욱이 이곳을 싹 다 고쳐 주겠다거나 하는 다짐 같은 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들이 낸 시주조차 그리 많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나마 정성을 들였다 할 만한 것이 있다면, 한 편 받은 부(賦)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부(賦)를 쓴 이가 원 재상이라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지 않겠는가!

    원 재상 어른은 어려서부터 기재로 이름이 높았다.

    젊었을 때부터 시문이 어찌나 훌륭한지, 그의 이름이 사림을 떠들썩하게 울렸고, 시부(詩賦)가 한 번 나오면 서생들이 종일 읊어대는 통에 거리에 그 시부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지난 수년간 원 재상 어른의 관직이 높아지며 시를 짓거나 부를 쓰는 일이 현저하게 적어져 많은 이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오늘 원 재상이 직접 부를 지어 내린 것이다.

    이 소식에 도성의 반을 차지하는 서생들이 대거 움직였다.

    난삼(*襴衫: 관직에 있거나 학자가 입는 예복)에 방건(方巾)을 한 문인들로 조방궁이 가득 찼다. 문인들은 화신부를 줄줄 읊어대며, 내용 중에 인용한 부분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글자 하나, 글귀 한 절을 두고 감상하고 음미했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유삼이 시전을 통해 화신점에 대한 소문을 떨쳐주었다면, 원씨 가문은 문인들의 세상인, 사림에 명성을 퍼트려 준 것이다.

    현재의 세상 발언권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은 문인이었다. 문인이 안다는 것은, 세상이 안다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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