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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84)화 (84/385)
  • 84화. 은혜를 갚으러 왔습니다!

    제자는 즐겁게 낙영각을 나섰다.

    화옥 사저가 사라지고, 이제 스승님 곁에 남은 제자 중 자신이 스승님과 가장 가까웠다. 만약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한다면, 기분이 좋아진 스승님께서 자신을 대제자로 뽑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되면, 어쩌면 자신이 새로운 적전제자가 될지 몰랐다.

    ‘그럼 다음 대 지주가 되는 거야!’

    스승이 맡긴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지난 보름간 도성엔 이미 화신점에 관한 소문이 모두 퍼져있었다. 심지어 시정의 어린아이들도 화신점을 알지 않는가?

    시간만 버린 상인은 돈을 벌 기회마저 놓치며 더 큰 손해를 보게 생겼으니 분명 화가 잔뜩 나 있을 터였다.

    온갖 대금조차 해결하지 못했다던데, 아마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없을 게 뻔했다.

    ‘슬쩍 부추겨서 돈까지 벌 수 있게 해준다고 하면 와서 난리를 안 치고 배기겠어?’

    상인이 일을 크게 만들어 사방전의 체면을 잔뜩 구겨놓으면, 그때 스승님께서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된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스승님은 다시 사방전의 전주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직분도 잃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될 테니, 그 후에 그들을 정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거야…….’

    생각할수록 의기양양해진 제자는 빨라진 걸음으로 금방 궁문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북과 징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가 고개를 돌려보니 많은 향객들이 구경하듯 몰려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야?”

    그녀가 어린 선고 하나를 붙들고 질문하자 어린 선고가 부러운 듯 대답했다.

    “사저, 선인 하나가 은혜를 갚으러 왔다네요.”

    “아…….”

    고개를 끄덕인 제자는 어린 선고를 놓아주었다.

    은혜를 갚으러 오는 일이야 흔하게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도 이렇게 행사를 크게 벌이는 일이 드물기는 했다.

    ‘어느 전(殿)에 계신 사숙께서 이리 운이 좋으신 것인지 모르겠네? 딱 봐도 들어올 선물이 적지 않아 보이는데, 돌아오면 잔치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으려나…….’

    제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은혜를 갚으러 왔다는 선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방실방실 웃고 있는 그는 상인으로 보였다.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뒤로 긴 행렬이 이어졌다. 요란하게 북과 징을 울리는 이들과 몇몇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흘긋 바라보긴 했지만 제 할 일부터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문득 제자의 귀로 대화 소리가 스쳤다.

    “진짜 은혜를 갚으러 왔다고? 화신점이 정말 용하단 말이야?”

    그녀의 발이 멈췄다.

    그곳엔 구경하는 향객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맞댄 채 속닥이고 있었다.

    “저 사람 입은 것 좀 봐. 돈을 번 게 분명하지!”

    “보름만 기다려보라고 했다더니, 진짜 딱 맞춘 거잖아?”

    “그러니까! 처음엔 허풍이나 치는 건 줄 알았는데 진짜 신통한 거였어.”

    “다음에 나도 한 번 봐볼까?”

    뭔가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선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요?”

    대화를 나누던 향객들이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를 향해 웃으며 예를 갖췄다.

    “선고님. 선고님들의 화신점이 정말 신통합니다! 저 사람이 진짜 은혜를 갚으러 오지 않았습니까!”

    이 말에 제자의 머리가 웅웅 울렸다. 제자는 억지로 이성을 유지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두 분 선인 말씀은 그 화신첨을 뽑았다는 그 사람이…….”

    “맞습니다!”

    향객이 유삼을 가리켰다.

    “저 상인이 보름을 기다리는 동안 객잔에 묵을 돈도 없어 마방(*馬房: 말을 묶어두는 곳으로 말을 관리하는 이들이 묵을 수 있는 허름한 방이 함께 있었음)까지 옮겨가야 했다더군요. 그래도 이를 악물고 빙백을 팔지 않고 참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제 강왕부에서 그가 가진 빙백을 전부 사들이기로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지 뭡니까!”

    “네, 네에?!”

    제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가 기뻐 그러는 줄로 오해한 향객이 축하를 건넸다.

    “조방궁은 역시 조방궁이지요. 참으로 영험합니다! 다음번엔 저희도 점을 보러 가겠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소원을 이루어주다니요!”

    제자는 향객에게 예의를 차릴 정신도 없이 그대로 다시 조방궁 안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유삼은 데려온 이들과 함께 북과 징을 요란하게 울려대며 천천히 사방전으로 향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한껏 끈 후에야 사방전 앞에 도착했다.

    * * *

    청옥과 함옥은 평소처럼 사방전을 관리하고 있었다.

    안 좋은 표정의 함옥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다 어딜 간 거지? 그래도 며칠 전엔 구경이라도 왔었잖아.”

    청옥이 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엔 향은 안 올리고 구경이나 하러 온다고 화냈잖아.”

    함옥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너무 비교되잖아. 그래도 인기 있는 게 낫지!”

    서아에게 조향법을 가르치던 지온 역시 함옥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없으면 좋지 않아요? 조용하고, 일도 없고.”

    “하지만…….”

    함옥이 말꼬리를 흐렸다.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시주가 안 들어와서 밥이라도 굶을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함옥이 소리를 꽥 질렀다.

    “사저!”

    그러나 함옥은 지온의 말에 가슴이 찔렸다.

    ‘맞긴 맞지. 시주가 너무 적을 게 걱정이 되긴 하잖아, 뭘.’

    어쨌든 사방전을 운영하는 데도 돈이 들어갔고, 자신들 역시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계속 사저가 주는 밥을 먹을 수는 없잖아.’

    순간 무슨 생각을 떠올린 함옥이 말했다.

    “아! 보름 지나지 않았어요? 사저, 화신첨이 효험을 발휘했겠죠?”

    가만히 손가락을 세어본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시간이 됐겠어요.”

    “그럼…….”

    함옥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웅성웅성, 돌연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은, 꼭 짐승에게 쫓기듯 사방전 앞까지 몰려와 놓고는 정작 안으론 들어오진 않고 그저 둥그렇게 무리 지어 잔뜩 귀만 기울이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함옥이 매우 놀라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한 무리의 일행이 당당한 모습으로 사방전 앞에 놓인 넓고 환한 광장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무리에 가장 앞에 선 이는 지난번 향을 올리러 왔던 상인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는 차림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원기 왕성한 모습에, 얼굴 가득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초췌하게만 보였던 그날의 사내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사방전 앞에 도착한 그가 손을 들자 음악 소리가 곧장 멈추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손을 흔들자 일꾼들이 선물함을 대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청옥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선인…….”

    유삼이 빙긋 웃고는 그녀를 향해 공수했다.

    “선고님, 은혜를 갚으러 왔습니다!”

    지진이 나기라도 한 듯이 청옥의 가슴이 떨렸지만, 청옥은 내색하지 않은 채 웃으며 물었다.

    “선인, 소원을 이루신 것이겠지요? 축하드립니다.”

    유삼이 대답했다.

    “화신마마께서 살펴주신 덕분에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름 전만 해도 저는 강에 뛰어들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저, 유삼, 이번 난관만 잘 넘어간다면 반드시 화신마마의 신상을 금으로 다시 만들어 드리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선고, 이제 제가 은혜를 갚으러 왔습니다!”

    * * *

    능양진인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보름이란 시간을 깔아둔 상태가 아니던가? 여기에 그 상인이란 자가 찾아와 난리를 한 번 쳐주면 그 몹쓸 계집의 계략은 철저하게 실패하게 될 것이었다.

    ‘그때 가서도 어디 사방전을 쥐고 안 놓을 배짱이 있나 보자!’

    그녀가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심부름을 시킨 제자가 헐레벌떡 들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스승님! 큰일 났습니다! 그 상인이…… 그 상인이 진짜 기사회생을 했습니다!”

    * * *

    유삼은 정성이 가득한 태도로 공손하게 향을 올리고 큰돈을 시주했다.

    청옥이 감사를 표하고 말했다.

    “화신마마의 금신(金身)은 언제나 이곳에 계실 것입니다. 선인께서는 이제 막 밑천을 다시 회수하신 것이 아닙니까? 신상을 다시 만드는 것은 급하지 않으니 차라리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시어 우선 하시던 일을 운용하시고 연말쯤 다시 찾아오시는 것이 어떠시겠는지요. 그때가 되면 선인께서도 손에 조금 더 여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도 사실 얼마 전에 새로 단장을 하여 그렇습니다.”

    유삼이 허허 웃었다.

    “선고께선 참으로 자비롭고 선하십니다. 저의 사정을 생각해주시어,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데려온 이들에게 선물을 놔두라 명하고는 인사를 하고 사방전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 사람들이 안으로 물밀 듯 밀려들며 너도나도 말을 쏟아냈다.

    “선고님, 저도 점을 보고 싶습니다!”

    “저도요, 저도요!”

    “내가 먼저 왔으니 자네들은 뒤로 물러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겨우 조금 앞서 놓고?”

    “맞아! 아까는 아무 말도 없었잖아!”

    청옥은 제 주변을 겹겹으로 둘러싼 이들을 향해 연신 사정을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인분들, 죄송합니다! 화신첨은 한 달에 딱 한 분씩만 뽑을 수 있는지라 이번 달은 이미 끝났습니다. 다음 달에 다시 오시지요.”

    “치사하게 그럴 거요? 우리가 시주도 하겠소!”

    “하겠소! 하겠소!”

    청옥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주의 문제가 아닙니다. 화신마마님의 화신점은 신력이 필요하여 달에 한 번만 볼 수 있지요. 더 많이 뽑더라도 효험이 없습니다.”

    “맞아요, 그런 거예요!”

    함옥이 맞장구를 쳤다.

    “화신마마님의 신력도 한계가 있으신데, 너도나도 다 달려들면 마마님도 지쳐 쓰러지죠. 그럼 신통할 리가 있겠어요?”

    두 사람의 말에 그제야 납득한 향객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네.”

    “다음 달에 다시 와야겠어, 다음 달에…….”

    그런 그들을 보며 함옥은 말을 잃었다.

    “아니, 그래도…….”

    함옥은 뒷말을 삼켰다. 

    ‘화신점은 안 봐도 향은 올릴 수 있는 거잖아!’

    * * *

    “사저…….”

    뒤에 있는 전(殿)에 들어온 함옥이 정성스레 지온에게 차를 올렸다.

    “한참 일 하셨잖아요, 좀 쉬세요!”

    지온이 함옥을 슬그머니 옆으로 바라보았다. 지온은 웃음이 나왔지만, 그녀의 뜻에 따라주기로 했다.

    “그럴게요!”

    장갑을 벗은 지온이 소매에 묻은 향분을 털었다.

    함옥이 냉큼 다가와 아양을 떨어대며 지온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함옥은 안마를 잘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마워 지온은 사소한 것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뭐가 묻고 싶은 건데요?”

    “윽…….”

    “할 말 있으면 그냥 해요.”

    지온이 말에 함옥이 곧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 선인이 보름 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걸 어떻게 계산한 거예요?”

    지온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자 함옥이 득달같이 이미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은 관보를 넘겼다.

    관보를 편 지온이 그중 한 곳을 가리켰다.

    “이건 사매도 이미 알았던 내용이죠? 운하를 준설하면 앞으로 몇 개월은 배편으로 오는 운송이 아주 느려지게 될 거예요. 곧 여름이 다가오는데 남부에서 생산되는 빙백이 당분간 오지 못하면 가격은 계속 오를 뿐 내려가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지온은 다시 몇 장을 넘겨 다른 한 곳을 가리켰다.

    “강왕비가 도성에 온다고 되어있고, 시간을 대략 계산해보니 십여 일이면 도착할 것 같았어요. 강왕비의 성정이 어떠한지는 조금만 알아봐도 알 수 있는데, 겉치레를 많이 따지는 분이시죠. 더구나, 지금은…….”

    자신이 낳은 아들이 황제가 된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니 도성에 들어오자마자 분명 물건들을 대규모로 구매하려고 하겠죠. 비싸고 희소한 물건일수록 비싼 값에 매입했을 거예요.”

    함옥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와, 그런 거였구나! 전엔 마냥 신기하기만 했는데, 이유를 알고 나니까 사실 엄청 간단한 거였네요?”

    지온이 웃었다.

    “어렵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거지, 하려고 하면 어렵지 않아요. 사실 많은 일이 막상 해보면 또 쉽죠.”

    함옥은 나름 드는 생각이 있었다.

    “듣기엔 간단해 보여도 그걸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도 쉬운 건 아닌 것 같아요. 먼저, 평소에 바깥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잖아요. 예를 들어 강왕비나 뭐 그런 사람들이 한 일을 보고 그 사람들의 성격을 파악해야 뒷일을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요. 그리고 관보에 나온 소식들도 빠트리면 안 돼요. 그걸 빠트리면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 그걸 사용해야 할 때 생각이 나야 한다는 거예요.”

    지온이 빙긋 웃으며 함옥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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