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82)화 (82/385)
  • 82화. 기다리면 알게 되겠죠?

    그렇게 왕가의 자식들은 모두 황궁에서 나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태자였던 선제는 영종황제의 붕어 이후 당연하게 황위를 물려받아 황제가 되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조카에게 백부의 황위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었겠지만, 강왕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겐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황궁에서 나간 후 강왕은 아주 착실하게 살았다.

    조정의 일엔 조금도 참여하지 않고, 그저 제집에서 먹고 마시며 자녀를 보는 등, 즐기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 많은 이들의 안심을 샀다.

    여양대장공주 역시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삼 년 전.

    선제가 쓰러져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다. 선제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충분히 느낄 새도 없이 등 떠밀리듯 양자를 들여야 했다.

    대장공주는 그제야 강왕이 이런 상황을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인이 완성하지 못한 일을 아들을 통해 완성하려는 게야!’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시고 강왕 일가가 봉지로 돌아갔을 때, 내 이미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하였네.”

    침상 맡에 머리를 기댄 대장공주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폐하께선 선제 곁에서 자라셨으니…….”

    대장공주는 오랜 정을 생각해서라도, 그가 선을 지킬 거라고 생각했었다.

    매고고가 조용히 말했다.

    “그분께서 원치 않더라도 주변에서 끌고 갔을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대장공주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강왕 부부가 더 남은 인내심이 없나 보구먼.”

    아들이 황제가 되었으니 본인들은 자연히 태상황과 태상황후의 자리에 앉고 싶지 않겠는가?

    삼 년도 오래 참은 것이니 이제 도성으로 돌아와 풍파를 일으키려 할 터였다.

    그때 밖에서 궁인이 찾아와 말했다.

    “공주마마, 사방전에서 문안을 여쭐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멈칫했던 매고고가 물었다.

    “사방전이라면 지온 소저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본래 이런 사소한 일은 궁인도 대장공주에게까지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송원의 나비 사건 이후 매고고가 그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부러 찾아와 물었던 것이다.

    순간 마음이 동한 매고고가 말했다.

    “마마, 아니면 한 번 찾아오라 하는 것이 어떠시겠는지요? 마마께서 수행하시느라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외부에 누구라도 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쓴 탕약 냄새가 가득한 실내에 매고고의 음성이 낮게 울렸다.

    “지온 소저가 나이는 어려도 일은 꼼꼼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지난번 나비를 불러들였던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공주마마의 이름으로 능양진인을 상대하긴 했으나, 선대 태자 전하와 공주님과의 정이 있으니, 공주마마께서 그것을 아시게 되시더라도 노하시지 않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대장공주는 한 숟가락씩 탕약을 천천히 떠먹었다.

    당시 자신은 정말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었다. 모두 그 아이가 선을 너무도 절묘하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제 사매들의 누명만 벗겨내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도 문안 인사를 위해, 며칠 걸러 한 번씩 시녀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 역시 정성은 느껴지나 귀찮지는 않을 만큼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향환의 일도 있지요.”

    매고고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알아보니 능양진인이 새로운 향환을 올리기 전에 지온 소저가 진인을 찾아갔었습니다.”

    멈칫한 대장공주가 탕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찌 된 게야?”

    매고고가 천천히 상황을 설명했다.

    “……먼저 화옥이 지온 소저를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일을 벌였으나 지온 소저가 도리어 반격했고 그 일을 빌미로 지온 소저가 향환 문제를 끄집어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능양진인을 압박하여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향환을 올리게 한 것이지요. 그 때문에 저희 역시 뭔가 문제가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장공주의 긴 침묵이 이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문 일들을 하나하나 파헤치니 끝에는 지온이 서 있었다.

    “그럼 본궁이 그 아이에게 고마워해야겠네.”

    공주의 말에 매고고가 조용히 말했다.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저희에게 도움을 준 것은 맞습니다.”

    아니었다면 대장공주는 지금까지 능양진인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황궁에 있는 ‘그’가 이미 공주를 오래전에 죽일 마음을 품었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나 이 일에 그 아이까지 엮이게 하는 것은 좋지 않아.”

    대장공주의 말에 매고고가 초조한 듯 말했다.

    “지온 소저가 스스로 그리하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공주마마!”

    “이유가 무엇인가?”

    대장공주의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 일은 목숨이 달린 큰일이네. 그 아이는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고아이지 않은가. 더구나 앞으로 입신양명을 하려는 사내도 아닌데 무슨 이유로 이런 흙탕물에 발을 담그겠는가?”

    맞는 말이었기에 매고고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장공주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니, 매고고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매고고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 화신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지요?”

    미간을 찌푸린 대장공주가 매고고를 쳐다보았다.

    “화신첨을 뽑은 사람이 비는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결국 첫 번째로 화신첨을 뽑아 아들을 빌었던 이의 소원은 역시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외부에선 시줏돈을 벌기 위해 지온 소저가 규수의 체면마저 버렸다며 떠들고 있지요. 지온 소저는 현재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어찌 그런 말들이 나와?”

    대장공주가 의아해하자 매고고가 말했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소문을 냈을 것입니다. 아마 사방전에 향객을 늘리려는 생각이었겠지만, 다른 이가 그것을 악의적으로 물고 늘어진 것이지요.”

    대장공주가 물었다.

    “낙영각인가?”

    “당연히 그쪽도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린 여아와 그리 신경전을 벌이다니, 그 사람도 참 나이가 들수록 어찌 더 철이 없어져?”

    그러나 매매고는 다른 생각인 듯했다.

    “향환의 일을 지온 소저가 밝혀낸 것이라면 그리 물고 늘어지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요.”

    직접 찾아가 겁박까지 하는 존재를 어찌 그저 어린 여아로 대하겠는가?

    대장공주가 매고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매(梅), 자네 다른 뜻이 있어 보여.”

    매고고가 빙긋 웃었다.

    “노비, 마마와 내기를 할까 싶습니다.”

    “오?”

    대장공주 역시 웃으며 말했다.

    “자네와 내기를 한 지도 참으로 오래됐네. 이야기해봐. 무엇으로 내기를 할 생각인가?”

    “내기는……지온 소저가 의도를 가졌는지, 아니면 의도치 않았던 것인지를 두고 하면 좋을 듯합니다.”

    대장공주가 생각에 잠겼다.

    매고고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는 아무런 기반도 없이 조방궁에 왔지만, 겨우 몇 달 만에 사방전을 손에 넣었습니다. 공주마마께선 그 아이가 시비에 휘말릴 것을 걱정하시지만, 저는 오히려 그녀가 시비 거릴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송원의 나비 사건부터 주지를 겁박한 것도 그렇고, 노비의 생각엔 이 화신점에도 분명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마, 혹시 내기에서 소인이 이기거든 지온 소저를 불러 알아나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긴 침묵 끝에 대장공주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그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지 않아? 설마하니 그저 높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기 위해서?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찌 무턱대고 그 아이를 쓸 수 있겠나?”

    매고고가 웃음을 지었다.

    “공주마마께서 너무 앞서나가셨습니다. 저는 그저 지온 소저에게 기회를 한 번 줘보잔 것이니, 말씀하신 것들은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대장공주의 얼굴에도 웃음이 드리워졌다.

    “자네 말이 맞아.”

    그리고 뒷말이 이어졌다.

    “좋아, 내 자네와 내기를 하겠네.”

    * * *

    능양진인이 낙영각으로 돌아오자 곧장 제자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스승님, 스승님! 알아냈습니다!”

    자리에 앉은 능양진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물었다.

    “뭐라더냐?”

    “두 번째 화신첨을 뽑은 사람은 상인으로, 상품 대부분이 불에 타버려 커다란 손실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여 얼마 남지 않은 물건을 다 팔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사방전에서 보름만 기다려보라 했다고 합니다.”

    능양진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허, 재미있구나. 처음엔 삼신 할매 노릇을 하더니, 두 번째는 재신 노릇을 하는 것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란 신은 다 가져다 쓸 참인가 보구나.”

    제자가 따라 비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 아들을 바랄 땐 그래도 시간을 끌더니 이번엔 시간까지 이야기하다니 말입니다.”

    제자의 말이 능양진인을 일깨웠다.

    “그래, 시간에 제한이 있으니 이번에는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겠구나.”

    “스승님…….”

    다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때리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능양진인이 곧 명령을 내렸다.

    “가서 이 일을 퍼트리거라. 아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이름을 알리고 싶다면, 도와주어야지!”

    * * *

    소문을 퍼트리는 이들이 있으니 화신점에 관한 일은 도성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시정(*市井: 인가가 모인 곳)에는 그 이야기로 토론을 벌이는 이들이 나왔을 정도였다.

    지난번 화신점에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원씨 가문이 웃음거리가 된 것에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면,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돈이 걸렸잖아, 돈이! 돈 안 벌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첨자 하나만 뽑으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세상에 그런 일이 있단 말이야?’

    청옥은 요즘 사방전을 방문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 중 향을 올리는 이들은 소수였다.

    더구나 매일 아침 사저가 순찰하기 위해 찾아올 때마다 어떻게든 사저를 보려고 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었다.

    “저 사람이 지씨 가문의 큰소저야?”

    “맞아.”

    “저리 반듯하게 생겨서는 왜 점쟁이 노릇을 한다니?”

    “네가 몰라서 그래. 부모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집안은 숙부와 숙모가 건사하고 있는데, 사는 게 힘들기도 했겠지. 그나마 조방궁에 의탁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뭐. 그러니 시주라도 많이 벌고 싶지 않겠어?”

    그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키득키득 웃음을 지었다.

    관가의 소저가 시주를 탐낸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 아닌가?

    지 어르신은 제 자손이 이 정도로 변변찮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몰래 기녀를 키우질 않나, 집안 가산을 두고 싸우질 않나, 이제는 하다하다 점쟁이 노릇을 하는 사람까지 나온 마당이었다.

    분이 난 함옥은 화가나 씩씩거렸다.

    “사람들 진짜 너무 함부로 말하는 거 아냐? 누가 시주를 탐내! 사저 같은 명문의 후예가 뭐가 부족해서 시주를 탐내냐고!”

    지온이 부적을 써 내리며 말했다.

    “저들 말도 틀리지 않아요. 이름이 알려지면 향객이 늘어날 테고 그럼 자연히 시주도 늘어나지 않겠어요?”

    “하지만…….”

    지온이 웃으며 함옥의 말을 끊었다.

    “지난번에 내가 찾아보라 했던 이유는 찾았어요?”

    생각을 돌린 함옥이, 보물과도 같은 관보를 꺼냈다.

    “찾았어요! 여기 정령(*政令: 정치상의 명령)에 운하를 준설하겠다고 되어있어요! 그럼 배편이 느려진다는 말이니까, 물건도 늦게 도착하게 될 거예요. 그 사이 본격적인 여름이 오면 도성에선 분명 빙백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날 테니 자연히 빙백의 가격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고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요.”

    함옥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랐을 때 지온의 음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이유 중에 한가지일 뿐이에요.”

    “에?”

    어리둥절해진 함옥이 물었다.

    “또 무슨 이유가 있는 건데요?”

    지온이 대답했다.

    “곧 있으면 보름이니까, 기다리면 알게 되겠죠?”

    “아, 사저……!”

    지온이 빙글빙글 웃었다.

    “비밀은 끝까지 숨겨두어야 재밌는 거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