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81)화 (81/385)
  • 81화. 강왕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물었다.

    “어르신께선 무슨 일로 향을 올리러 오셨는지요?”

    ‘뭐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인가?’

    내심 구시렁거린 사내가 대답했다.

    “장사치니 당연히 장사가 잘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를 살핀 지온이 말했다.

    “어르신의 모습을 보니 어려움이 있으신 듯 보입니다.”

    사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민을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시겠는지요?”

    장사에도 기밀이란 것이 있어, 사실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무엇을 더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사내는 속 시원히 털어놓기로 했다.

    사내는 행상을 하는 이로, 장거리를 오가며 매매를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남부의 진주나 옷감 따위를 북부에 있는 도성으로 들여오고, 다시 또 북부의 모피나 약재를 남부로 운송하여 파는 일이었다.

    지난 일 년은 그에게 운이 너무도 따라주지 않았던 한 해였다.

    북부의 약재를 싣고 남부로 향하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엄청난 약재 값을 물어주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그는 이를 악물고 창고를 털어 초나라의 곡식을 사들였다. 그렇게 일이 잘되고 있었는데, 이번엔 행상 중에 폭우를 만나고 말았다.

    그렇게 두 번의 배상으로 큰 손실을 겪고 나니 장사 밑천마저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그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집안의 전답이며 집들을 담보로 걸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았다.

    그 돈으로 포목(*布木: 각종 옷감)을 사들인 그는 물건을 다시 도성으로 보내려 했지만, 대체 무슨 조화인지 이번에는 창고에 불이 나버린 것이다.

    결국, 남은 물건들은 모조리 팔아도 간신히 운송비나 나올까 말까 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사내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일어서고 싶어도 이젠 어렵게 됐습니다. 돌아가면 이제 집안의 전답들을 다 팔아야 할 텐데, 처와 아이들이 고생하겠지요.”

    지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에 대한 평가를 하였다.

    “정말 운이 나쁘셨네요.”

    사내는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방법이 없으니 일단 집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정 안 되면 황아장수(*荒아장수: 집집을 찾아다니며 끈목, 담배쌈지, 바늘, 실 따위의 자질구레한 일용 잡화를 파는 사람)일이라도 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지요.”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아직 의지가 있으시니 좋은 일입니다.”

    잠시 말이 없던 지온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점괘로 보아 어르신께선 아직 끝난 것 같지 않습니다.”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온은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방금 창고에 불이 났다고 하셨지요?”

    “그랬습니다.”

    “창고는 부두에 있는 대창고를 말하는 것인지요?”

    “맞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여러 집의 다른 포목들도 거의 다 타버렸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밑천이라도 많아서 버티겠지만, 저는 이제 남은 것이 없는 상황이지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가져오시려던 물건이 빙백(*氷帛: 시원한 명주천이나 비단)이라 하셨지요?”

    사내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여름이 올 테니 빙백(氷帛)이 여름옷을 만들기에 적합하지요. 집안 전체를 담보로 잡아 다시 일어서보려 했는데 어쩌다…….”

    “그러니 이번에 난 화재로 도성에서 빙백을 찾기란 쉽지 않겠네요.”

    “그렇습니다.”

    사내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물건이 없으면 가격이 오르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빙백은 고정적으로 나오는 산지가 있습니다. 한 한 달만 지나면 새로운 물건이 도착할 텐데…….”

    지온이 탁자를 톡톡 치며 그의 뒷말을 잘랐다.

    “앞으로 보름만 기다리시지요. 어쩌면 일이 잘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사내가 멈칫 놀랐다.

    “어찌 보름을 기다리고 하십니까? 아직 장에 물건이 많지 않을 때 내다 팔아야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습니다. 기다리다 새로운 물건이 오면 또 손해를 보겠지요.”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상황에 조금 더 손해를 보나, 덜 손해 보나 크게 문제가 되겠는지요? 어차피 전답들과 건물들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조금 더 비싸게 팔아봐야 은자 몇이나 더 벌 수 있겠습니까?”

    사내가 침묵했다.

    이 어린 선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들 한 달쯤 지나면 새로운 물건이 오는 것을 아는 상황이었다.

    물론, 벌써 초여름이 되었기에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었다.

    * * *

    사내가 떠났다.

    지온은 그가 떠나기 전에 전운부(*轉運符: 운이 좋아지게 만드는 부적)를 챙겨주었다.

    요즘 점 보는 것을 배우고 있던 함옥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사저, 왜 보름을 기다리라고 한 거예요? 무슨 특별한 뜻이라도 있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이 진짜 기다리긴 할까요? 안 기다리면 괜히 화신첨만 날리는 거 아니에요?”

    서아에게 차를 정리하라고 말한 지온이 대답했다.

    “기다릴 거예요. 이미 재기할 방법이 없는 상황인데도 향을 올리러 왔잖아요. 거기다 가지고 있는 마지막 돈까지 공덕함에 넣은 것을 보면 점을 잘 믿는 사람이에요. 더불어 내가 운이 들었다는 말까지 했으니, 속으로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분명 시키는 대로 해보긴 할 거예요.”

    가만히 생각하던 함옥이 말했다.

    “그게 바로 관상의 기술인가요?”

    함옥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긴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관상이 기술이 이렇게 간단하려고요? 그냥 그 사람의 심리를 가늠해 본 것뿐이에요.”

    함옥이 머리를 긁적였다.

    “엄청나게 복잡한 것 같은데…….”

    “천천히 해요. 공부하다 보면 알 게 될 거예요.”

    함옥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사저, 그런데 ‘보름’이란 기간을 기다리라 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그건 아직 대답 안 해줬어요.”

    지온이 탁자에 놓인 얇은 서책을 들며 말했다.

    “비밀의 답은 여기 있으니까 직접 봐요.”

    함옥이 받은 서책에는 ‘관보’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관보가 무엇인지는 함옥도 알고 있었다. 관보는 조정에서 정기적으로 법령과 공문, 상소 등을 발행한 것으로, 그렇게 발행된 관보는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게 그 상인의 포목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함옥은 글과 행간에서 답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관보를 이리저리 계속해서 살폈다.

    함옥을 놔두고 사방전을 나선 지온의 눈에 태의가 궁인들과 중정을 가로질러 뒤쪽으로 가는 것이 들어왔다.

    지온은 금방 지시를 내렸다.

    “하로, 난택산방에 가서 대장공주님께 무슨 일이 있으신지 알아보고 와.”

    “네.”

    대답을 한 하로는 곧장 난택산방으로 향했다.

    * * *

    침상 머리에 기대어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양대장공주는 병색이 완연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한 그녀가 말했다.

    “감기일 뿐인데 뭐 하러 이리 많은 이들을 고생시켜?”

    그러나 매고고의 표정은 무거웠다.

    “최근 몇 년간, 한 번 앓아누우시면 길게 아프시고는 하셨는데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마마는 나이가 드셨으니, 건강이 젊을 때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공주마마. 아직도 마마가 젊고 건강하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대장공주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앞에서 그리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자네뿐일 것이야.”

    궁인이 태의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자 매고고는 태의에게 안으로 들라 전했다.

    그런데 예상 밖에도 능양진인이 태의와 함께 찾아왔다.

    태의가 맥을 짚고 처방전을 내길 기다리던 능양진인이, 공주의 앞에 다가와 잘못을 빌었다.

    “빈도가 소홀하여 마마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대장공주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것이 자네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주변에 시비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 생활을 살피는 것은 그들의 일이지.”

    능양진인은 여전히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향환에 문제가 없었다면 마마의 몸도 이리 쇠약해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빈도의 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태의를 내보낸 매고고가 들어오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향환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 진인께서 이미 전에 말씀해주셨지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마마께서 결정하신 것이니, 진인은 다시 그런 말씀을 꺼내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

    매고고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마께선 그저 찬 기운을 쐬신 것뿐이니 며칠 쉬시면 괜찮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진인께서도 여기 계시지 마시고 돌아가셔서 궁 일을 보시지요.”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능양진인이 떠났다.

    * * *

    이윽고 방에 두 사람만이 남자 대장공주 옆으로 다가가 앉은 매고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마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 달쯤 지켜보니, 확실히 단순한 이가 아니었습니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나도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그런데 향환 건으로 드는 생각이 있었지.

    매(梅), 자네가 옳았네. 나는 이 정도면 충분히 뒤로 물러났다고 생각했네. 조방궁에 들어와 바깥일에 대해 한 번을 물은 일이 없거늘, 여전히 누군가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야.”

    병색이 완연한 대장공주의 모습을 보자 매고고의 마음에 근심이 찼다.

    “공주마마…….”

    그러나 대장공주는 그 일로 상심하지 않았다는 듯 금방 다른 일을 꺼냈다.

    “강왕비(康王妃)가 도성에 언제 들어온다고?”

    매고고가 가만히 계산을 해보더니 대답했다.

    “대략 보름 후가 될 것입니다.”

    대장공주가 담담하게 읊조렸다.

    “삼 년이나 참다니, 그것도 쉽지 않았겠지.”

    매고고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가의 일이란, 예상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태자가 변을 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은 선제는 병으로 쓰러졌다. 선제가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바람에 결국 선제는 의안왕을 양자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채 몇 달 지나지 않아 선제는 세상을 떠났고 의안왕은 황위를 계승하여 황제가 되었다.

    예법으로 보자면 의안왕은 선제의 양아들이고, 선제는 그의 부친이며, 대장공주가 그의 고모가 된다. 그러나 그를 낳은 친부모인 강왕과 강왕비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들이 황제가 되었는데 여전히 분수에 맞게 사는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는 성인의 반열에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당시 이러한 이유로 의안왕을 양자로 들이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대장공주는 다른 왕족을 골라 양자로 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제가 와병 중인 상황에 혼자 큰일을 결정할 수 없었고, 끝내 일은 강왕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강왕을 떠올린 대장공주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이미 오래전부터 황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게야.’

    그녀와 강왕의 조부는 선종황제(宣宗皇帝)였다.

    여섯의 아들을 둔 선종황제는 본처가 낳은 적자(嫡子)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그가 바로 훗날의 영종황제(英宗皇帝)였다.

    몸이 약했던 영종황제는 자손을 많이 보지 못했는데, 태어나 죽지 않고 자란 자녀가 겨우 일남일녀 둘 뿐으로 그들이 바로 선제와 대장공주였다.

    선제 역시 어려서는 몸이 많이 약해 늘 오래 살지 못할 거란 의심을 받았었다.

    영종황제 역시 그 부분을 크게 걱정했고,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선제와 함께 공부를 가르쳤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강왕이었다.

    강왕은 몸이 건강했고, 학문 역시 뛰어나, 당시 조정에서 가장 좋아하던 인물이었다.

    만일 선제가 몸이 약해 살아남지 못했다면 황제는 강왕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선제가 무사히 살아남아 성장하기 시작했고, 선제의 건강 역시 점점 나아지자 다른 이에게 황위를 물려주자는 의견도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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