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80)화 (80/385)
  • 80화. 두 번째 화신첨

    3일이 지났다.

    사방전에서 나오던 지온은 밖에 서 있는 루안을 볼 수 있었다.

    지온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사건은 다 처리하신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루안이 고개를 돌리더니 한등에게 말했다.

    “가서 향을 올리고 오너라.”

    코를 비비적거린 한등이 대답했다.

    “네.”

    한등은 향을 올리러 가며 생각했다.

    ‘지난번에 공자님더러 기녀 같다고 해서 그런가? 이번엔 공자님이 대전에도 안 들어가시네. 정말 소심하시기는. 그냥 한 말을 가지고…….’

    지온 역시 시녀들에게 말했다.

    “따라오지 않아도 돼.”

    시녀들은 군말 없이 대답하고는, 돌아갈 사람만 돌아가고 남아서 일을 도울 이들은 일하러 갔다.

    지온과 루안은 천천히 외진 곳으로 향했다.

    “그 화농이 기재는 기재였소. 아쉽군. 처음에 그를 제대로 이끌어 줄 사람만 만났더라도 그 재능을 날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는 뭐 하던 사람이었나요? 정말 시 짓는 것을 독학한 건가요?”

    “그렇더군. 이장 말로는 어렸을 적엔 다른 지역에서 살았던 자라 했소. 영산은 그의 본가로,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의지할 곳이 없어져 돌아온 것이라더군. 그래서 촌에 살던 이들은 그를 잘 알지 못했고. 젊었을 땐 마을 이장이 그가 혼인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하려고 했지만, 집안도 가난하고 성격도 이상하여 결국 장가도 못 갔다더군.

    그 화농이 쌓은 지식은, 그가 일하며 주변에 열린 시회에서 들었던 것으로, 천천히 배워간 것이었소. 그는 돈이 조금 모이면 그것으로 서책을 사 모았다더군…….”

    서책은 가격이 무척이나 비쌌기 때문에 평범한 집안에서도 문인을 하나 배출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 화농은 서책 사는 것을 즐겼으니, 가난하여 혼인하기 어려웠던 것도 이해가 갔다.

    나무 아래에 선 루안이 지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에 선생님께선 저 자신을 뛰어난 기린아(*麒麟兒: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이)라 여기는 것을, 경계하라 말씀하셨소. 세상에 총명한 이는 셀 수 없이 많으나 학문을 한 이가 적을 뿐이라 하셨지.

    이제 다시 생각하니, 선생님의 말씀이 역시 틀리지 않았소. 평범한 화농이 홀로 학문을 연구하여 그 정도 경지에 올랐소. 만약 그에게 학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면, 어쩌면 그는 세상에 손꼽히는 한 명의 명사가 되었을지 모르지. 역시 이래서 선생님께서 무애해각을 세우셨던 것이었소.”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마치 학문을 가르치고 싶은 듯이 들리네요, 대인.”

    잠시 침묵하던 루안이 대답했다.

    “본래 난 관리가 되고 싶지 않았소. 나중에 모든 것에서 홀가분해지면 무애해각에 가서 가르치는 일을 해도 되겠지.”

    지온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음성이 이어졌다.

    “무애해각은 선생님께서 심혈을 쏟으신 곳이었소. 그리고 지금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지. 내가 돈을 충분히 모으면, 그땐 선생님을 따라 다시 무애해각을 재건할 것이오.”

    “…….”

    긴 침묵 끝에 지온이 나지막이 물었다.

    “돈을 모으던 이유가 다시 무애해각을 세우기 위해서였어요?”

    루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3월이 지나고 4월이 되었다.

    날씨는 점차 더워져 사람들의 옷차림도 두꺼운 윗도리에서 얇고 하늘거리는 차림으로 바뀌었다.

    보름이나 멈추었던 화신점의 첨통도 다시 향객들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청옥은 여전히 향객들에게 화신점을 열심히 권했지만, 하려고 드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함옥은 향객 두 사람이 소곤대는 소리를 직접 듣게 되었다.

    “볼 수 있는데 왜 안 보려고?”

    “이야기 못 들었어? 첨자에 아무것도 안 쓰여 있다는데 뭐 하러 흔들어?”

    “점괘가 안 쓰여 있다고? 그럼 뭘 보는 건데?”

    그러자 대화를 하던 향객이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내가 들었는데, 저 첨자 중에 아흔아홉 개 첨자는 그냥 흰색 첨자고 딱 한 자루만 화신첨이래. 화신첨을 뽑으면 화신마마께서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더라고. 그리고 한 달에 한 번만 뽑을 수 있어서 누군가가 뽑으면 그달은 더는 화신점도 보지 못한다네?”

    “엄청 신기하네!”

    “신기하긴 뭐가 신기해? 지난달에 화신첨 뽑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 원씨 가문 알지? 그 집의 어린 며느리가 뽑아서 아들을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더라고.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원씨 가문에서 어디 말이라도 나오디? 이미 웃음거리 다 됐어.”

    “점괘가 다 맞는 경우가 어디 있다고……. 그걸 진짜 믿진 않았겠지.”

    “내 말이……. 점은 그냥 운을 바라고 보는 거고, 가뜩이나 여기서 보는 게 신통하지 않다더라고. 그러니 굳이 우리가 화신점을 볼 이유가 없잖아?”

    “그건 그러네.”

    “지금 사방전의 전주(殿主)가 능운진인의 제자라던데, 능운진인의 그 높던 명성도 제자 손에 망가지게 생겼네…….”

    “지 재상님의 손녀라지? 멀쩡한 대갓집 소저가 집에서 시집갈 생각은 안 하고 왜 이런 일들을 벌이는지, 참…….”

    “그러니까……. 향 다 올렸지? 우리 앞에 있는 전(殿)에 가서 점이나 보자. 백이면 백 다 맞는 건 아니라도, 여기보단 낫잖아!”

    “그래.”

    두 사람이 문을 나서자 함옥이 참았던 불만을 쏟아냈다.

    “사람들이 왜들 말들이 이렇게 헤퍼? 안 보면 그만이지, 이러쿵저러쿵 뒷말들은 왜 하는 건데!”

    지온은 계속 서책을 보며 말했다.

    “저들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점이 신통치 않으면 당연히 볼 필요가 없죠.”

    “사저!”

    함옥이 초조한 듯 말했다.

    “걱정도 안 되세요? 요즘 사방전에 오는 향객들 수가 전과는 비교도 안 된단 말이에요!”

    지온이 웃으며 함옥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왜요? 시주가 적어 밥도 못 먹을 것 같아서요?”

    “농을 할 때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향객이 들어오자 함옥이 얼른 입을 다물고 향객을 살폈다.

    향객은 중년의 사내였는데, 무척 화려한 옷차림이 무색하게 기운이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함옥은 사내가 상인이라고 생각했다.

    청옥이 다가가 그를 맞았다.

    “선인, 향을 올리러 오셨는지요?”

    눈빛마저 텅 비어 보이는 사내는 시간이 좀 흐른 후에야 대답했다.

    “아, 그렇소…….”

    청옥은 어린 선고에서 가서 향촉을 가져오라 말했다.

    혼이라도 나간 듯한 모습으로 들어온 사내였지만, 향은 올릴 땐 더없이 진중했다.

    정성을 다해 머리를 조아린 사내는 심지어 어린 도고가 그를 도와 향을 꽂는 것마저 마다하더니 제 품을 뒤적였다.

    사내는 한눈에 보기에도 값나가는 재질의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품을 뒤적여 나온 것은 은립(*銀粒: 작은 은 조각) 하나뿐이었다.

    은립을 본 사내는 쓴웃음과 함께 이것을 공덕함에 넣었고, 청옥은 그런 그의 모습을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방궁엔 왕족이나 귀족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이 정도 시주는 큰돈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가진 것 중 유일하게 값어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순간 마음이 동한 청옥이 앞으로 나섰다.

    “선인, 선인께 아무래도 말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 있으신 듯합니다. 이달에는 아직 아무도 화신첨을 뽑지 못했는데, 혹시 운이라도 한 번 시험해보시겠는지요?”

    사내가 기운 없이 물었다.

    “무슨 점이오?”

    어린 선고에게 첨통을 가져오라 말한 청옥이 미소와 함께 설명을 해주었다.

    “……하여 혹 선인께서 화신첨을 뽑으신다면, 선인께 닥친 어려움도 순리대로 해결될 것입니다.”

    사내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당한 일은 화신마마께서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쩌오?”

    그래도 청옥은 그에게 첨통을 밀었다.

    “해보지 않고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잠시 침묵한 사내가 결국 첨통을 받아 들었다.

    “한 번 해보겠소. 하늘이 아직 내게 살길을 내줄는지…….”

    차륵차륵.

    첨통이 그의 손에서 흔들리며 안에 든 첨자 중 하나가 서서히 밀려 나오더니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첨자를 주운 청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선인, 화신첨입니다!”

    자신의 운이 그리 좋을 줄 생각지도 못했던 그가 멈칫했다.

    “뽑았소? 아까 첨통 안에 든 첨자 아흔아홉은 그저 하얀 백첨자라 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선인께서는 이 중에 단 한 자루뿐인 화신첨을 뽑으신 것이지요!”

    청옥이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선인. 선인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분명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잘 풀릴 것입니다!”

    사내의 얼굴에 잠시 웃음이 비쳤다.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진 그가 진심으로 말했다.

    “좋은 말씀 감사하오.”

    성공 여부에 어딘지 오묘한 구석이 있는 것이 장사였다. 같은 거리에서, 같은 물건을 파는 점포라도, 어떤 가게는 유달리 장사가 잘되지만, 다른 가게는 안 되다 못해 자릿세마저 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것은 성실함이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장사를 하는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운을 더 믿었다.

    그 때문에 원씨 가문의 며느리인 기문혜가 화신첨을 뽑고도 밋밋한 반응을 보였던 반면, 장사꾼인 사내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백 중 하나의 기회를 잡았을 정도라면 아직 자신의 운도 완전히 끝난 게 아니지 않겠는가? 어쩌면 다시 한번 일어설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사내는 겨우 남은 종잣돈을 떠올리며 운용해 볼 곳이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청옥의 음성이 들려왔다.

    “선인, 점괘를 보셔야 하니 뒤에 있는 후전(后殿)으로 오시지요.”

    “응?”

    사내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대더니 물었다.

    “첨자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데 점괘를 들어야 하는 것이오?”

    청옥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의 운명이 다르니 운 또한 다르지요. 그러니 같은 첨자를 뽑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사람마다 달라집니다.

    선인, 선인께 대운이 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운을 제대로 된 곳에 사용하지 않으시면 헛되이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오…….”

    잠깐 생각을 하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고의 말이 일리가 있소.”

    장사하는 이들이라 역시 말이 잘 통했다.

    청옥이 손을 벌리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 * *

    뒤에 있는 전(殿)으로 간 사내는 등불 근처에서 서책을 읽고 있던 소녀를 보았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손에 들었던 서책을 내려놓은 지온이 일어서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흠칫 놀린 사내가 물었다.

    “소저는……?”

    “저희 사방전의 전주이십니다.”

    함옥이 차를 내오며 대답했다.

    “…….”

    사내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나이가 있는 진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신의 여식보다 어린 소녀가 아닌가.

    ‘나이도 어려 보이고, 행색도 속가(俗家)인 듯 보이는데 점괘를 볼 수나 있을까?’

    지온은 그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에게 차를 권할 뿐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며 차를 입에 머금었던 사내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쓴맛에 정신이 돌아왔다.

    차는 쓴맛이 나 마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쓴맛이 사라지자 머릿속이 냉수욕이라도 한 듯 맑아지며 차분해지는 것이 아닌가?

    조방궁의 산문을 지날 때만 해도 겹겹이 쌓여있던 무거운 마음이, 순간 풀어지며 가슴이 가벼워졌다.

    ‘좋은 차로군!’

    사내가 공수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내는 이런 차로 객을 맞이할 정도라면, 어쩌면 저 젊은 선고에게 진짜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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