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79)화 (79/385)
  • 79화. 겁쟁이

    유씨 가문의 모자가 어떤 암투를 벌였는지, 지온이 알 리가 없었다.

    이 일로 다들 나들이를 계속하려는 생각도 가셔있었다.

    며칠 후에 사건 보고가 올라가면 한바탕 시끄러워질 터이기에 더 그랬다.

    유씨 가문에서 힘을 써서 다른 이들이야 유모지가 위험한 일을 겪었다는 것은 알지 못하겠지만, 관아에 놓인 수십 구의 유골과 시신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 *

    짐을 챙긴 지온은 다른 이들을 따라 마차에 오르기 위해 나섰다.

    유 대부인이 그녀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이리 불러 놓고 이런 일이 생겨 정말 미안하네.”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하기 어려운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 대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섭지도 않았는가?”

    가만히 생각하던 지온이 대답했다.

    “제가 그곳에 누워 있었다면 아마 무서웠겠지요? 하지만 사람을 구한 쪽이다 보니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통쾌하기까지 했어요.”

    유 대부인이 피식 웃었다.

    “솔직하구먼.”

    지온이 미안한 듯 대답했다.

    “둘째 공자가 많이 놀랐는데,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아닐세, 우리 집안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해.”

    유 대부인의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지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지온이 답했다.

    “돌아가 수행에 매진할 생각입니다.”

    “상이 끝나 효를 다 치른 뒤에는?”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렇게 멀리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혹시 다른 집안이 혼인하고 싶다며 연락이 오면 언제든 와서 물어보게. 그래도 집안에 연이 있으니 내 도와 알아봐 줄 수 있을 것이야.”

    지온이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유 대부인.”

    유 대부인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이 부족하여 자네에게 맞지 않았네. 하지만 집안에 다른 아이들도 있으니 혹시라도 마음에 드는 이가 있으면 다시 우리 집안과 혼사를 맺어도 좋네. 난 그것을 바라마지 않네.”

    “둘째 공자께선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을 가진 분이십니다. 다른 이들을 위할 줄도 알고 정의로운 분이시니 뵙기 어려운 군자이시지요. 그저 저희 두 사람이 인연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지온은 유 대부인이 한 다른 이야기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유 대부인은 실망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웃으며 다른 주제를 꺼냈다.

    “원씨 가문의 기 부인과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이던데, 기 부인도 성격이 좋은 사람일세. 지온 소저도 이제 친구를 사귈 때가 되었지.”

    * * *

    어렵게 얻은 유씨 가문과 가까워질 기회를 놓치고만 위씨 부인은 실망이 컸다.

    주렴 밖으로 유 대부인이 지온을 끌어 마차에 오르게 하는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

    “저 아이의 어디가 유 대부인의 마음에 들어서 저렇게 친근하게 대하는지, 원!”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는 지서의 모습에 위씨 부인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둘째 공자와 가까이 지내라 하지 않았느냐? 그날 둘째 공자를 구할 때 너도 한몫하지 않았어? 그런데 유씨 가문에서 왜 말 한마디 없는 것이야? 네가 세운 공을 혹시 빼앗긴 것이냐? 너는 어찌 이리 착해 빠졌어!”

    지서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이냐?”

    결국, 위씨 부인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제 그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데도 말도 안 하고……. 내가 보니 상처 난 곳도 없던데, 대체 무엇에 이리 놀란 것이야?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게야? 저 몹쓸 것은 하하호호, 쌩쌩하기만 한데 넌 대체…….”

    비교가 되질 않았다.

    그녀도 전에는 자신의 딸인 지서가 그다지 부족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어린 소녀이니 당연히 어느 정도 응석받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온이 돌아온 후, 그녀의 눈에도 조금씩 지서의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이번 일도 그렇지 않은가? 저 몹쓸 것은 멀쩡하게 다친 곳도 없이 유씨 가문에게 감사까지 받는데, 지서는 돌아오고 정신이 어디가 어떻게 된 것인지, 바보가 된 것처럼 말도 잘하지 못했던 것이다.

    “말이라도 해보아라!”

    답답하기도 하고 짜증도 치민 위씨 부인이 지서를 툭 밀며 말했다.

    “그래 봐야 백골이 아니냐? 범인도 다 잡았는데, 뭐가 그리 무서워!”

    위씨 부인이 건드리자 결국 한계에 다다른 지서가 소리를 질러댔다.

    “어머니가 뭘 알아요, 뭘 아냐고요! 앞으로 쟤 건드리지 마세요! 쟤는 악마예요! 너무 무섭다고요!”

    놀라 멍해진 위씨 부인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가…….”

    지서가 응석을 부리고 제멋대로이긴 했어도 제 부모에겐 그래도 예의를 지키는 편이지 않았던가?

    다 소리를 질렀는지, 지서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위씨 부인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포씨 유모를 향해 물었다.

    “지서에게 귀신이라도 붙은 게 아닌가! 어서 떼어내야지! 조방궁……! 어서 조방궁으로 가세!”

    조방궁이라는 소리에 지서가 또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안돼요! 조방궁은 안돼요! 쟤가 있잖아요! 어머니, 제발 부탁이에요. 전 다신 큰언니랑 맞서지도 않을 거고 유씨 가문에 시집도 안 갈 거예요. 제발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요, 제발 집에 가요…….”

    제 딸이 눈물을 줄기줄기 흘리는 모습에 위씨 부인은 얼른 그녀부터 달랬다.

    “그래, 그래. 일단 집으로 가자, 집에 가.”

    불행히도, 위씨 부인이 탄 마차 바로 앞이 유민 모녀가 탄 마차였다.

    울며 난리를 치는 소리를 들은 유민의 모친이 제 딸에게 말했다.

    “지씨 가문의 차남가는 정말 기품이 없구나. 넌 앞으로 저들과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

    유민이 호두를 까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제가 바보도 아니고…….”

    깐 호두를 입에 넣어 아작아작 씹으며 유민은 생각했다.

    ‘둘째 오라버니가 겪은 일을 오라버니에게 들어야겠어. 이 일로 무슨 이야기를 지을 수 있으려나?’

    * * *

    지온이 조방궁으로 돌아오자 청옥과 함옥은 하고 있던 사방전의 일을 놓고 달려와 안부부터 물었다.

    두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지온은 다시 일들 보라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행장 정리를 끝낸 지온이 말했다.

    “훈둔(*馄饨: 각종 재료를 넣고 빚은 작은 만두를 넣고 끓인 탕) 먹을 거지? 새우 있어?”

    하로가 웃으며 대답했다.

    “있지요, 그럼! 아가씨가 오늘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아침 사람을 보내 사오라고 했거든요. 물고기, 새우, 고기에 신선한 버섯도 있으니까 오늘은 다섯 가지 맛으로 훈둔을 만들 수 있어요. 아가씨, 거기에 양고기탕까지 해서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어떠세요?”

    “좋아.”

    시녀들은 만들어둔 속을 가지고 당옥(堂屋)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훈둔을 빚으며 즐겁게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서책을 읽는 지온의 귀로 의운이 음산한 음성으로 영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들려왔다. 간간이 무서워하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하로가 호기심이 생기는지 물었다.

    “정말 수십 명을 살해했단 말이야?”

    의운이 대답했다.

    “그렇다니까? 관아에 유골들을 놓을 자리도 없었어. 넌 못 봤지? 여기저기 하얀 백골들이 놓여 있는 게 얼마나 무섭던지!”

    서아가 훼방을 놨다.

    “꼭 본 것처럼 말하네. 넌 관아에 가보지도 않았잖아.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유골을 파낸 것도 나중에 들은 거면서.”

    의운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

    “상상한 거지, 상상을…….”

    하로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둘째 공자님을 아가씨께서 구하셨으면, 아가씨는 보셨겠네요?”

    지온이 응, 하고 대답했다.

    “무서워요?”

    가만히 생각하던 지온이 말했다.

    “안 무서웠어. 그냥 냄새가 안 좋았지.”

    시녀들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의운이 말했다.

    “유 대부인이 우리 아가씨께 얼마나 잘 해주는지 몰라! 헤어질 때 얼마나 아쉬워하시던지, 뭐든 다 우리 마차로 밀어 넣으시더라니까?”

    하로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가씨가 둘째 공자님의 목숨을 살려준 분이시잖아! 잘됐다, 정말……. 아가씨가 은인이 되셨으니까, 우리 아가씨께 일이 생기면 이제 뒤를 받쳐줄 곳이 생긴 거야.”

    가만히 생각하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유 대부인께 잘했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네!”

    의운은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대답이 튀어나와버렸다. 그녀는 서아가 황급히 잡아당기자 그제야 놀라 굳고 말았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안에 시녀 셋이 두려운 얼굴로 지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온이 서책을 내려놓더니 허리를 펴고 앉았다.

    “영산에서 너희들이 유 대부인께 잘하려는 게 너무 눈에 보여서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딴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가씨…….”

    급히 손에서 훈둔을 내려놓은 서아가 다가와 용서를 빌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그래서는 안 됐는데…….”

    “네가 생각한 거 아니지?”

    지온의 시선이 시녀 셋을 훑어 내렸다.

    “서아는 착실하고, 의운은 고지식하지. 하로, 네 생각이야?”

    손에 가득 묻은 밀가루를 처리할 여유도 없이, 앞으로 다가온 하로가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가씨…….”

    시녀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스스로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던가!

    언제나 똑똑한 하로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가씨.”

    하로의 눈에서는 곧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

    “가문에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고, 저는 이대로는 아가씨께서 너무…….”

    “불쌍하다고?”

    하로가 감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아와 의운 역시 하로와 함께 무릎을 꿇으며 지온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의운이 입을 열었다.

    “하로는 말만 했을 뿐이지 일은 제가 다 한 것입니다.”

    서아도 옆에서 거들었다.

    “저……저는 옆에서 두 사람을 말리지 못했으니, 저도 잘못했습니다.”

    지온은 팔짱을 낀 채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은 시녀들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일어나.”

    지온이 너무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시녀 세 사람은 멍하니 지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특히 자신은 이제 끝이라 생각하고 있던 하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신은 주인을 위해 한 일이라 해도, 그녀의 행동을 주인이 멋대로 행동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시녀로서 소임을 다 하지 못한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선한 마음이라 해도 제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 시녀를 좋아하는 주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지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내 생각을 해주는 건 좋은 일이야. 인간이 짐승보다 나은 이유가 바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제 기준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건 틀렸어. 네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 상대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더욱 잘 알아보도록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한 마음을 지녔어도 일만 망치게 될 테니까.

    비단 이번 일뿐이 아니라 이건 사람을 대하는 도리라고 생각하도록 해.”

    지온이 다시 한번 말했다.

    “너희들을 탓하려는 거 아니니까, 다들 일어나.”

    그제야 시녀 세 사람이 우물쭈물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로는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가씨.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머리가 좋은 건 좋은 일이야. 사람으로 태어나 좋은 머리를 쓸 수 있다는 건 하늘이 내린 복이야. 그걸 사용하지 않는 게 오히려 복을 차버리는 거지. 하지만 그 좋은 머리도 써야 할 곳에 쓸 때 좋은 거니까, 절대 혼자서 앞서나가선 안 돼.”

    “네, 아가씨.”

    지온이 턱짓으로 조리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서 훈둔 빚어야지? 나 배고파.”

    그녀의 가벼운 말투에 시녀들 역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보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다들 지온이 했던 말을 다시 곱씹고 있었다.

    가만히 미소를 지은 지온은 다시 서책을 잡았다.

    서원에서 말 안 듣는 학생들은 지겹도록 보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시녀 세 명은 가르치기 쉬운 편이었다.

    주인과 시녀라는 위치가 있으니 몇 가지만 짚어 주면 알아서 열심히 생각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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