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78)화 (78/385)
  • 78화. 졌으면 졌다고 인정을 해야지

    몸을 일으킨 지온은 서탁 근처로 다가가 그가 직접 만든 벼루를 들었다.

    “과거 저의 스승님과 여행을 하는 중에 학식이 높은 대(大)유학자를 만난 일이 있었어요. 그도 당신처럼 외양에 매달려 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그는 냇가에서 돌 하나를 주웠는데 돌의 문양이 비할 바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것을 갈아 벼루로 만들었어요. 그 후로 이런 문양이 있는 벼루가 널리 퍼지게 되면서 그 지역 돌 가격이 폭등했고, 선비라는 선비는 모두 이런 문양이 들어간 벼루를 가진 것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게 됐죠.”

    지온이 다시 벼루를 서탁에 두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상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발견할 눈이 필요할 뿐인 거예요. 진짜 아름다운 것이 속세로 흘러들면 그것은 점차 모든 이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되었다가,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르며 평범한 것이 되는 법이죠.”

    화농을 바라보는 지온의 눈빛에 웃음이 비쳤다.

    “하지만 당신은 어땠나요? 당신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눈을 가져놓고도, 그것을 사람들 앞에 내놓을 용기는 없는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이 가진 미천한 신분 너머에 있는 순수한 내면을 봐주길 바랐지만, 그들이 당신을 부정했을 때, 그저 분노에 지배당했죠. 어떻게든 그들이 당신을 인정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아름다움을 느낄 자격이 없는 이라 생각하여 모두 죽였어요.”

    미소를 얼굴에서 거둬들인 지온이 그를 차가운 눈으로 보았다.

    “다른 이들의 인정을 그토록 바라면서 도리어 다른 모두를 자격 없는 이로 취급하다니. 이것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게 아니면 뭐죠? 안 그래요?”

    화농의 얼굴이 꿈틀거리더니 드디어 그의 눈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미망이 들어찼다.

    “살인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죠.”

    지온의 음성은 음산했다.

    “육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칼 한 번 휘두르면 그저 죽은 고깃덩이가 될 뿐인데……. 그건 거친 백정이 가장 잘해요. 당신은 고상하고 고결한 사람이라 하지 않았나요? 그런 당신의 인간 백정과 다를 바 없는 삶 어디에 아름다움이 있단 거죠?

    정신적으로 한 사람을 소멸시키는 일이야말로 진정 의미 있는 일이죠. 당신의 즐거움이 누군가의 즐거움이 되고, 슬픔이 누군가의 슬픔이 되도록…….

    당신에게 닥친 고통으로 인해 비통함을 느끼고, 당신의 재능에 탄식하게 하며, 상대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당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고, 상대가 세상에 내보이는 인격도 당신이 만들어 세운 것이 되도록…….

    당신이 상대를 좋아할 때, 상대는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느껴지겠지만, 당신에게 미움을 받으면 마치 온몸의 뼈가 모두 끊어지는 듯한 절망에 휩싸이게 되는 것……. 이게 바로 진정한 지배라는 거예요.”

    지온이 슬쩍 고개를 틀어 멍하니 앉은 지서를 향해 말했다.

    “그렇지, 지서야?”

    멍한 눈으로 지온과 눈을 마주치는 지서는 심지어 제 코를 감싸 쥐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곧 지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던 화농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꺼풀이 심하게 떨리고, 이는 연신 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냈다. 

    “우웩!”

    갑자기 입을 벌려 붉은 피를 쏟은 화농이 그대로 고꾸라지며 얼굴을 땅에 처박았다.

    ‘지, 지금…… 멀쩡하던 사람을 말로 죽인 거야?!’

    눈이 동그랗게 커진 지서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 * *

    복숭아나무 아래 묻혀있던 시신들이 한 구 한 구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은 시취(屍臭)로 가득했다.

    그토록 우아하고 고상하게 꾸며진 초옥의 작은 정원에 이렇게나 많은 시체가 숨겨져 있을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초동 조사를 마친 고찬이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대인, 과수원에서 발견한 유골들과 쌓은 방식이 같은 것으로 보아, 과수원 사건의 범인과 같은 자로 판단됩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곳에 보초를 세우고 시신들은 관아로 옮긴다.”

    “네.”

    울타리 문을 나서려던 루안이 고개를 돌렸다.

    “대공자, 자네 동생이 연루된 사건인데 함께 가서 듣겠소?”

    유신지가 악취를 참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겠소. 고맙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그가 지온을 향해 예를 갖췄다.

    “지온 소저, 돌아가는 길에 제 아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조금 전에 도착한 유민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유신지를 불렀다.

    “오라버니…….”

    ‘내가 멀쩡하게 있는데 왜 지온 소저에게 부탁하지?’

    유신지는 유민에게 한 가지만 부탁할 뿐이었다.

    “너희는 먼저 돌아가거라. 가서 어머니와 일행들을 안심시켜줘.”

    “아, 응…….”

    그렇게 협곡을 나서는 일행들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유신지는 루안과 함께 관아로 향했고 지온은 유모지와 다른 어린 일행들과 함께 장원으로 움직였다.

    * * *

    매우 초조해하던 유 대부인은 금방이라도 직접 뛰쳐나가 아들을 찾아 나설 지경이었다.

    그러다 돌아온 일행들을 보자 유 대부인은 안도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유모지를 찰싹찰싹 때렸다.

    “너 이 녀석!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리 걱정을 시켜! 갈 것이면 말이라도 하고 갔어야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을 했잖으냐!”

    억울한 유모지였다.

    “소자가 토막이 날 뻔했는데, 어머니는 왜 욕까지 하고 그러세요!”

    유 대부인이 흠칫 놀랐다. 그녀는 찾았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아직 정확한 사정까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유모지에게 상황을 전해들은 그녀는 정신이 쏙 빠졌다.

    “어찌 그런 일이 있어?! 앞으로는 함부로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고 나서지 말아야겠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좋은 일을 한 것도 잘못인 게야?”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올린 지온이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부인, 이번 일은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정신 나간 개에게 물리는 것이 사람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둘째 공자께서 놀라신 상태라 경황이 없으실 테니 차라리 먼저 돌아가 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유 대부인이 고마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지시를 내렸다.

    “어서 물을 준비하고 둘째가 목욕을 할 수 있도록 해줘.”

    “네.”

    한편에선 유민의 모친이 이미 딸 유민을 붙들고 살뜰하게 챙기고 있었고, 지서의 엉망이 된 모습을 본 위씨 부인은 금방 지서에게 달려가 울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들과 다르게 누구도 챙겨주는 이가 없는 지온은, 무척이나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표정에는 초라함이 전혀 없었다.

    유 대부인이 그녀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이런, 치마가 다 찢어지지 않았는가. 고생이 많았을 텐데, 어서 돌아가 쉬는 게 좋겠네. 저녁은 내 사람을 시켜 가져다줄 것이야.”

    “네, 유 대부인.”

    지온은 착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 나왔다.

    * * *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장원에도 고요가 찾아 왔다.

    할 일을 모두 끝낸 유 대부인은 평상에 기대어 큰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림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보고에 놀라 잠에서 깬 유 대부인이 물었다.

    “몇 시인가?”

    시녀가 대답했다.

    “곧 사경(*四更: 오전 1시~3시)입니다.”

    유 대부인이 이마를 문질렀다.

    “이리 늦게 돌아왔구나…….”

    그러고는 시녀에게 등롱(燈籠)을 준비시켜 곧 유신지를 보기 위해 나섰다.

    * * *

    막 옷을 갈아입은 유신지는 허겁지겁 식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 대부인은 순간 마음이 아팠다.

    “천천히 먹거라. 늦은 시간이라 체하면 어째.”

    웃음을 지은 유신지는, 마지막 남은 면 한 젓가락을 마저 먹고는 그릇을 한쪽으로 밀었다.

    “많이 늦었는데, 왜 아직 안 주무셨어요?”

    “둘째가 겪은 일만 생각하면 잠이 와야 말이지.”

    유 대부인이 가슴을 문질렀다.

    “무슨 아이가 그리 운이 나쁜 것인지, 너희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으면…….”

    “구하지 않았습니까. 일어나지 않은 일로 어머니를 괴롭히지 마세요.”

    유신지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곤 피곤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유 대부인이 슬쩍 눈치를 보내자 시종인 부주가 금방 다가와 유신지를 대신하여 유신지를 안마했다.

    “그놈이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이냐? 지금은 죄를 자복(自服)한 것이고?”

    “네.”

    유신지가 대답하더니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둘째는 그래도 운이 좋았습니다. 범인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살인을 시작해서 복숭아 과수원에 스물이 넘는 시신을 묻고 있었지요. 그자가 살던 곳 아래에서는 여덟 구를 추가로 파냈는데, 우물 채우듯 시신을 두껍게 겹쳐서 몇 층을 쌓았더라고요. 우리가 조금만 늦게 둘째를 발견했다면 둘째도 지금쯤…….”

    유 대부인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말하지 말아라, 하지 마. 방금 어미더러 스스로 괴롭히지 말라더니, 왜 내가 나서서 그러느냐.”

    피식 웃음을 지은 유신지가 곧바로 정색하더니 말했다.

    “어머니, 이번 일은 두 사람에게 제대로 감사를 전해야 합니다.”

    “그게 누구냐?”

    “한 사람은 루 형입니다.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수하에 있는 부하들을 전부 보내줬어요.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지온 소저입니다. 두 사람 덕분에 늦지 않고 둘째를 찾을 수 있었어요.”

    유모지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만큼 얘기가 자세하지는 못했던지라, 유 대부인은 그저 늦지 않고 찾았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런 일이 있었는지 까진 알지 못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랬구나. 그럼 제대로 감사를 해야지.”

    화농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유신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전엔 제가 정말 크게 잘못 알았습니다. 지온 소저는 자신의 진짜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혼사를 물린 것은 잘한 일입니다. 지온 소저의 성격은 둘째와 맞지 않아요.”

    “오?”

    유 대부인이 흥미를 보였다.

    유신지는 지온이 범인을 말로 정신을 잃게 만든 일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그동안 제 능력이 누구에게 뒤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그저 말만으로 상대가 피를 토하게 하라면, 저는 하지 못할 거예요.”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며 유 대부인 역시 함께 웃음을 지었다.

    “너를 탄복하게 할 사람도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아직 어머니의 낌새를 차리지 못한 유신지가 고개를 주억이며 덧붙였다.

    “하늘 밖에 하늘이 있고, 사람 밖에 사람이 있는 것이지요. 전엔 세상에 저보다 더 대단한 이도 별로 없다고 여기며 저 스스로 우쭐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루안을 만나고 그가 뇌리에 박혔었는데, 이젠 지온 소저까지 나타나고……. 생각해 보면 제 생각이 참으로 작았던 것 같습니다.

    하늘 아래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늘 다른 사람보다 대단할 거라 여기며 살았다니……. 산을 넘으면 더 높은 산이 있으니, 제 자리에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도 널 탄복하게 한 소저는 지온 소저 하나뿐인 게지?”

    “그렇죠. 지온 소저는…….”

    순간, 벼락에 맞은 듯 경계심이 일어난 유신지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유 대부인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찌나 자애로운 미소인지 부처가 따로 없어 보였다.

    “어머니!”

    그가 소리를 꽥 질렀다.

    “어머니, 이상한 일 벌이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탄복한 것뿐이지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유 대부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네가 다른 생각을 한다고도 안 했는데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야?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게 뭔지는 알고?”

    할 말을 찾지 못한 유신지는 그저 울부짖을 뿐이었다.

    “진짭니다, 어머니, 제발요……! 저희 집안과 혼사를 물린지 얼마나 됐다고, 어머니께서 가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시면……. 지온 소저가 저희 집안을 어떻게 볼 것이며, 저는 또 어찌 보겠습니까. 어렵게 만난 말이 통하는 사람입니다. 제발 훼방 놓지 마세요, 예?”

    “오호?”

    유 대부인이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워 널 좋지 않게 볼까 봐 그러는 것이로구나?”

    “……어머니!”

    어미가 다 안다는 듯, 유 대부인이 말했다.

    “그리 말하니 어미도 알겠다. 우리도 급할 것 없지. 지온 소저도 아직 스승의 상을 치러야 하지 않아? 앞으로 일 년 후에 다시 이야기…….”

    유신지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이 졌다는 걸 인정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어머니께 잔머리를 굴리지 않을 테니, 어머니 제발 절 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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