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77)화 (77/385)
  • 77화. 세상 좋은 소릴 하시네요

    “무애해각…….”

    화농이 중얼거렸다.

    “기회가 있었던 것이었군…….”

    “그렇소, 기회가 있을 것이오.”

    루안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노인장은 사형보다 낫소. 그때 내 사형은 말만 할 수 있었을 뿐 글조차 쓰지 못했지만, 노인장은 쓸 수 있지 않소? 여기 있는 글들의 문체가 이리 훌륭한 것을 보니 아마도 오랜 시간을 연습했겠지.”

    “……삼십 년입니다. 무려 삼십 년을 꼬박…….”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더 잘 쓰시오.”

    “그러나 내겐 왜 그런 운이 없었던 것입니까?”

    화농이 읊조렸다.

    “왜 내가 만난 이들은 전부 멍청이밖에 없었단 말입니까!”

    “세상엔 본래 멍청이들이 많기 때문이에요.”

    지온이 탁자로 다가가 반쯤 채운 글을 보며 감탄을 쏟았다.

    “붓끝에 힘이 가득하고 근골이 참으로 튼튼한 문체입니다. 훌륭하네요.”

    그들의 대화를 지서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이 방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낄 뿐이었다. 분명 투박하고 거친 물건들이었지만 배치가 정말 아름다웠던 것이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어떤 물건이 쑥 들어왔다.

    반짝거리면서 아주 예리한 것이…….

    “아악!”

    벌떡 일어난 지서가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도, 도끼!”

    지서의 비명에 부드럽게 풀려가던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나갔다.

    튕겨 나가듯 도끼를 주워든 화농이 짚 발을 들춰 벽 안에 숨겨놨던 유모지를 잡아끌곤 외쳤다.

    “움직이지마!”

    번쩍거리는 날카로운 도끼날이 유모지의 목에 가서 닿았다.

    천에 입이 막힌 유모지가 혼비백산하며 매우 놀랐다.

    “으으, 으으……!”

    ‘하지 마! 난 죽기 싫다고! 살려줘!’

    “꺄악!”

    지서가 더 큰 비명을 질렀다.

    지온은 이마를 붙잡았다.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더니, 결국 사고를 치네.’

    “이 자를 찾으러 온 거겠지?”

    화농이 음울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제 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화농이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출신이 좋으니 역시 좋군! 이런 폐물조차 누군가 찾으러 오다니 말이야.”

    루안이 미간을 좁혔을 때 지서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야! 둘째 공자님이 얼마나 훌륭한 기재인데, 폐물은 무슨 폐물이야! 공자님은 좋은 분이야! 네가 괴롭힘당하던 걸 공자님께서 도와주기까지 하셨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화농이 차갑게 웃었다.

    “이자가 폐물이 아니라니? 시구의 좋고 나쁨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자다. 이자도 다른 머저리들과 다를 바가 없어!”

    “아니…….”

    지서가 무언가를 더 이야기하려 했지만, 지온이 한 발 더 빨랐다.

    “맞아요, 그렇죠.”

    화농이 멈칫했다.

    지온은 무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둘째 공자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사람이에요. 어르신, 아마 모르셨겠지만 사실 그 공자는 저와 혼약이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찌나 쓸모없는 인간인지, 어쩔 수 없이 제가 혼약을 파기했죠. 다들 둘째 공자의 능력이 출중하다고들 하던데, 둘째 공자는 태사부의 공자잖아요. 전 도무지 어디가 출중한지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화농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어르신,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여기 있는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과거를 볼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아요.

    그것뿐이게요? 저는 제 능력을 어디 가서 이야기할 수조차 없어요. 그게 사내들의 체면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라네요. 하아……. 본인의 멍청함을 반성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다른 이들의 입을 막을 생각뿐이라니.”

    “그래. 그들은 다른 이들의 입을 막는 것밖에 하질 못하지…….”

    화농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겪은 수많은 시간이…….

    바로 그때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화농은 순간적으로 도끼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려 했지만, 오히려 힘이 쭉 빠지는 것이 아닌가!

    루안은 때를 놓치지 않고 탁자에 있던 종이들을 잡아 그에게 던졌다. 화농이 다시 도끼를 주워들려 했지만, 이미 루안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화농의 어깨를 잡아챈 루안이 강하게 당겼다.

    “아!”

    그리고 쏜살같이 달려간 지온이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발로 멀리 차버렸다.

    “괜찮아요?”

    “괜찮소?”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소.”

    대답 역시 동시에 흘러나왔다.

    “우웁…….”

    얼굴이 눈물로 가득 얼룩진 유모지가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안 괜찮은 사람 여기 있다고!’

    웃음을 보인 지온은 유모지에게 다가가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벗겨주자 유모지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연신 눈물을 닦았다.

    “너무 무서웠단 말입니다. 저, 저자가 내 손을 자르려고 했다고요. 손이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앞으로 글도 못 쓰고 밥도 다른 사람이 먹여줘야 하고…….”

    지온이 가만히 그를 깨우쳐주었다.

    “세상 좋은 소릴 하시네요. 저자가 공자님의 손만 잘랐을 것 같으세요? 공자님의 손도 자르고, 발도 자르고, 눈을 파내고, 혀도 잘랐을 텐데……. 그리고 마지막엔 조각내서 복숭아나무 아래 묻었을 거예요. 그럼 거름이나 되셨을 분이 무슨 다른 사람이 밥을 먹여줘야 한다는 소릴 하고 계세요. 공자님이 오히려 복숭아나무를 먹이셨겠죠.”

    유모지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아,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빨리 일어나기나 하세요! 얼른 나가서 사람을 불러오시라고요!”

    바로 조금 전에 너무 무서운 일을 겪었던지라, 유모지는 몸에 힘이 다 풀려버린 상태였다.

    그가 떨며 말했다.

    “못 움직이겠어요.”

    “하아, 정말…….”

    루안이 그들을 슬쩍 바라보더니 말했다.

    “피리를 부시오. 숲을 수색하고 있을 테니 들리겠지.”

    * * *

    피리 소리가 울리자 그에 호응하는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고찬이 사람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대인!”

    고찬이 포승에 꽁꽁 묶인 화농을 보며 말했다.

    “이자는…….”

    “범인이네.”

    루안이 정원에 있는 복숭아나무를 가리켰다.

    “나무 아래 뭔가 있을 테니 파내게.”

    “알겠습니다.”

    * * *

    유신지가 도착했을 땐 관졸들이 이미 나무 아래 묻혀있던 것을 파낸 뒤였다.

    부패에 의한 악취로 그는 구역질할 뻔했다.

    “이게 뭔가?”

    유신지를 본 고찬이 옆으로 두어 걸음 비켜섰다.

    이미 모두 썩었거나 반쯤 썩어 희멀건 뼈를 드러낸 시신들을 본 유신지가 입을 틀어쥐었다.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찌 시신들이 이렇게나 많이……! 내 동생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괜한 사람에게 불똥을 튀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유신지의 목소리를 들은 루안이 나섰다. 

    “둘째 공자는 거기가 아니오. 여기 있소.”

    집안에서 루안의 음성이 들려오자, 유신지는 튕기듯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루안이 코와 입을 가리는 가리개를 쓴 채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형! 으앙……!”

    유모지가 유신지에게로 달려오더니 그의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무서웠어, 형! 나 거름이 될 뻔했단 말이야! 다시는 형도 못 볼 뻔했다고!”

    유신지는 얼른 유모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며 살폈다. 제 동생에게 다친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졸였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이렇게 된 것이죠.”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지온이 말했다.

    “범인에게 둘째 공자님이 조각나기 전에 저희가 찾아냈습니다. 둘째 공자의 홍복이 하늘에 닿은 것이죠.”

    “…….”

    ‘하마터면 몸이 조각날 뻔했는데, 그것도 홍복이 하늘에 닿았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유신지는 시간을 들여 동생에게 사건의 경위를 물어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네가 좋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그게 도리어 살인을 당할 뻔한 이유가 됐단 말이냐?”

    유모지가 불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유신지는 사람들에게 감시당하고 있던 화농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발길질했다.

    “내 동생을 죽이려 한 게 네 놈이냐!”

    화농은 무표정했다.

    그들에게 사로잡힌 뒤로 화농은 계속 이 모습이었다.

    분노에 찬 유신지가 화농의 흉기인 도끼를 들더니 그의 목으로 가져갔다.

    “내 지금까지 많은 사건을 접했지만 너 같이 악랄한 인간은 처음이구나! 네게 막대했던 인간들은 감히 건들지 못하겠고, 도리어 너를 도와준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그건 어디서 나온 법인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이 잘못됐단 말이냐!”

    화농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유신지의 손에 들린 도끼에 의해 피가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더욱 화가 치민 유신지는 그대로 그의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입을 열어라! 뱃속 가득 먹물이 들어차 시를 줄줄 읊고 시사에 능통하다지 않았느냐?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화농은 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유신지가 분을 토했다.

    “참으로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치졸한 인간이로구나! 네게 용기란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널 모욕했던 그들을 찾아갔겠지. 네까짓 게 그런 용기가 있겠느냐?”

    화농은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 지온이 하품하며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저자가 좀 억울할 이야기네요.”

    유신지가 그녀를 바라보자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코는 여전히 손수건으로 막은 상태였다.

    “이자는 용기가 없어서 그들을 상대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둘째 공자를 잡은 것 역시 공자께서 좋은 분이었기 때문이 아니지요.”

    “…….”

    ‘아니 왜 이래? 좀 빠져줄 수 없나?’

    유신지의 손에서 도끼를 빼든 지온이 말을 이었다.

    “그는 사람은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로 구분하는 자에요. 그와 드잡이를 벌이려던 서생들이든, 둘째 공자처럼 좋은 마음으로 자신을 도왔던 사람이든 그의 눈엔 그저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똑같은 멍청이일 뿐입니다.”

    그녀가 빙긋 웃었다.

    “그렇죠, 어르신?”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린 화농의 눈에 드디어 산사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 빛 어딘가에는 일견 그녀를 대견해 하며 칭찬하는 듯도 했다.

    거칠고 투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멍청하다는 것도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다. 너만 해도 그리 똑똑하지 않지. 하지만 넌 다른 이의 말을 귀담아듣고,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알고 있다.”

    지온은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어려서부터 참 많은 이들에게 빛나는 총명함을 지녔다느니,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느니 하는 칭찬을 들었지만, 오늘 어르신이 해준 그 말 만큼 진실한 것이 없네요.”

    “…….”

    말 없는 유신지를 향해 지온이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공자님의 말이 맞았습니다.”

    지온이 유신지를 향해 다시 고개를 들더니 씩 웃었다.

    “저자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자입니다.”

    화농의 얼굴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에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그것을 제외하고, 그에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든,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모습을 보였든, 그에겐 무엇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몸을 숙인 지온이 화농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아나요?”

    화농은 당연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온이 빙글빙글 웃었다.

    “당신은 다른 많은 이들보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창조하는 것에 뛰어나죠. 그런데 진짜 아름다움이 뭔지 알고 있는 건가요?”

    화농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움은 기쁨을 누리는 것이며 풍족하고 넉넉한 감정이기도 해요. 그리고 홀로 고상한, 독선적인 고결함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특징 없이 세상에 넘치는, 무엇보다 평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당신의 얼굴을 보니 내가 한 마지막 말에는 동의가 안 되나 보네요.”

    화농의 표정이 그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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