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아름다움을 아는 자
루안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왜 그래요?”
지온이 묻자 루안이 대답했다.
“그 부패한 냄새가 바로 앞에서 나는 것 같소.”
그 소리에 순간 무서워진 지서가 지온의 팔뚝을 꾹 잡았다. 지온은 슬쩍 쳐다보았을 뿐,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숲을 벗어난 세 사람은 암석 봉우리를 돌아 그 아래에 자리한 초가집을 발견했다.
정갈한 초가집은 야생의 꽃들이 가득 타고 오른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정원에 심긴 몇 그루의 복숭아나무엔 복사꽃이 화려하게 피어 황혼의 바람결에 나부꼈다.
“찾았소, 바로 여기요.”
루안이 낮게 속삭였다.
자세하게 살펴보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쉬운 사람이 아니에요. 저 집과 울타리, 복숭아나무, 화초들까지 어느 것 하나 완벽한 제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없어요. 심지어 빗자루와 조리개가 위치한 곳까지…….
이 풍경 그대로 화폭에 옮겨도 될 정도로 미감을 깨뜨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 정도로 극한의 미(美)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머리가 아주 좋을 거예요. 그리고 그것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을 거고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원 안에 자리한 복숭아나무를 보고 있었다. 부패한 냄새가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냄새가 아까 과수원에서보다 더 심하게 나는 것을 보니 최근에 건드렸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복숭아나무는 가지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관리가 무척 잘 되어있었고, 땅 역시 말끔하게 눌러 평평했다.
사소한 모든 것들에서 그의 총명함과 냉정함, 그리고 광기가 드러나 조심스럽게 대응해야만 했다.
“일단 지나가는 사람으로 위장하고 누가 나오는지 보는 게 좋겠소.”
“네.”
대답한 지온이 자연스레 루안의 팔에 팔짱을 꼈다.
루안은 고개를 숙여 그녀가 낀 팔짱을 보았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울타리 문을 열었다.
딸랑, 딸랑…….
어디에 걸려있었던 것인지, 울타리 문을 열자 청량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더욱 경계하며 신중해진 루안이 입을 열었다.
“계십니까?”
* * *
유모지는 울음을 터트렸다.
시퍼렇게 선 도끼날과 그는 겨우 일척(*一尺: 약 30.3cm) 남짓 떨어져 있었다.
화농은 여전히 그의 손을 만지고 있었다. 마치 유모지에게 이 손은 곧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안 돼! 제발 제 손을 자르지 마십시오! 원하는 게 무엇이든 다 드리겠습니다. 돈입니까? 태사부에 많습니다! 혹시 그 재능을 발휘하고 싶으신 거면 제가 서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해드릴 테니……. 제발 제 손을 자르지 마세요…….”
딸랑, 딸랑…….
순간 방울 소리에 움직임을 멈춘 화농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계십니까?”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화색이 돈 유모지가 당장 소리를 지르려 입을 벌렸지만, 화농이 더 빨랐다. 그의 입을 틀어쥔 것이다.
“읍읍! 읍!”
도끼를 내려놓은 화농이 한쪽에 있던 천을 찢어 유모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유모지는 곧 자신이 캄캄한 공간으로 밀어 넣어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벽 안에 작은 암실을 숨겨 두었구나! 이 미친 늙은이! 역시 한두 번 살인을 한 게 아니었어!’
짚으로 두껍게 만든 발이 덮이자 들어오던 빛이 막혔다. 밖에서 들리던 소리 역시 웅웅 울리기만 할 뿐 깨끗하게 들리지 않았다.
유모지의 마음은 기대감과 절망 사이를 오갔다.
갑자기 손님이 찾아 왔으니 일단 자신의 손은 몸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쳐버린 화농의 준비성이 너무도 철저했다. 손발이 모두 묶인 것도 모자라 입 역시 막혀 목소리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저 사람들이 가고 나면, 난……!’
유모지는 찾아온 사람들이 영민하게 수상한 점을 발견해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사라져 돌아오질 않고 있으니, 큰형인 유신지가 분명 사람을 시켜 찾고 있을 터였다.
‘그래 어떻게든 단서만 발견된다면 형이 분명 날 구해줄 거야!’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 어르신! 어르신이셨군요?”
놀란 듯한 여인의 음성에 유모지의 가슴이 흥분으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지온 소저? 지온 소저가 사람을 데려온 거야?’
숨까지 참아가며 유모지는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 * *
울타리 문 안에 서 있는 화농은 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내 하나에 여인 둘. 그중 여인 두 사람은 어제 보았던, 집안에 갇힌 젊은이와 함께 있던 소저들이었다.
‘사람을 찾으러 온 건가?’
화농은 냉정하게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화농의 입에서는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부패한 냄새는 더욱 강해졌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팔짱 낀 팔을 굽힌 루안은 소매가 흘러내려 드러난 그녀의 팔목을 짚으며 지온에게 물었다.
“아는 분이시오?”
지서가 한발 빨랐다.
“둘째 공자께서 어제 구해주신 어르신이에요, 그때…….”
지서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난 루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이런 우연이 있나.”
울타리 문 안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 화농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온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실은 저희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다 제 동생이 실수로 발을 헛디뎠지 뭡니까? 다친 발도 너무 아프고 목도 말라 장소를 좀 빌려 쉬고 물이라도 얻어 마시려 실례를 하였습니다.”
지서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맞아요!”
화농은 지서를 응시했다.
지서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치마는 갈래갈래 찢어졌고 조금 전에 지온이 힘으로 땅바닥에 앉히는 바람에 옷에 진흙도 여기저기 묻어, 확실히 어디선가 구른 듯한 모습이었다.
거절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사내 하나에 여인이 둘이었는데, 그중 사내는 누가 봐도 허약한 문인으로 얼굴을 보니 심지어 병까지 든 것 같았다. 그리고 여인네들 역시 작고 마른 모습이 닭 모가지 들 힘도 없어 보였다.
드디어 그가 울타리 문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어르신!”
* * *
안으로 들어서자 꽃향기가 더욱 농밀해졌다.
정원 안에 있는 복숭아나무는 어떻게 키우는 것인지, 과수원에 심은 다른 나무보다 더욱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한 송이 한 송이 만개한 복사꽃은 마치 생명을 태워 피우는 듯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루안은 취할 것 같은 향기 속에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냄새를 맡고 있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발이 아픈 듯 절뚝거리며 걷던 지서가 정원 안에 있는 석등에 털썩 궁둥이를 붙이자 곧 화농이 물그릇을 가져왔다.
투박하지만 깨끗한 그릇의 안쪽엔 그릇을 구우면서 생긴 균열무늬가 보였다. 담긴 물에 투영된 무늬를 보고 있자니 기이한 미감이 들었다.
평소 이렇게 투박한 물건을 싫어해서 한 번을 쓰지 않던 지서였지만, 지금은 싫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사실 진짜 목도 많이 마르던 상태라 그녀는 물그릇을 한 모금 한 모금 모두 비웠다.
“어르신, 집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직접 지으신 것인지요?”
지온이 웃으며 묻자 물그릇을 건넨 화농이 한 쪽에 가만히 서서 딱딱하게 대답했다.
“안사람이 했습니다.”
“그러셨군요! 부인께서 참으로 대단한 손을 가지셨습니다.”
화농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들어가 볼 수 있습니까?”
당옥(堂屋)의 문 앞에 서 있던 루안이 화농에게 물으며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반쯤 문부터 열었다.
차라락…….
문이 열리며 바람이 일자 벽에 걸린 글이 가득한 종이들이 팔랑팔랑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그 광경은 모두의 이목을 한눈에 끌어당겼다. 루안은 저도 모르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지온과 지서 역시 몸을 일으켜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가자 화농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방안을 꾸며놓은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대체 이곳은 어떤 명사가 은거하는 초옥이란 말인가!
초라한 집일지언정 아름다운 글자와 우아한 시사들이 최고의 품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날 시에 쓰인 단어가 좋지 못하다 하신 것도 다 연유가 있으셨군요.”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산들바람에 춤추는 가는 버들, 은근한 달빛 아래 은밀한 매화. 그 시구는 얼핏 듣기엔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어르신의 수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겠습니다.”
그녀가 몸을 돌리며 물었다.
“어르신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시골의 촌부일 뿐,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덤덤한 신색의 화농이었지만 지온은 달랐다.
“겸손이 과하십니다. 설령 서원의 선생이라 할지라도 어르신께서 가진 재능에 비하면 부족할지도 모르겠는 것을요.”
화농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시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참으로 보는 눈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능력이라면 오히려 그들을 가르쳤어도 무방할 정도인데…….”
화농이 침묵했다.
지온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날 시구의 단어가 좋지 않다고 하셨지요? 그럼 어르신께선 어떤 단어가 더 좋을 것 같으십니까?”
화농의 눈빛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의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산들바람에 춤추는 가는 버들, 은근한 달빛 아래 은밀한 매화. 이 시구는, 그 전에 나왔던 시구보다 생동감은 더 있을지 모르지만, 영기(靈氣)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바꾸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산들바람에 기대는 가는 버들, 은근한 달빛 아래 묘연한 매화.”
루안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루안은 시구를 조곤조곤 읊으며 음미했다.
“산들바람에 기대는 가는 버들, 은근한 달빛 아래 놓쳐버린 매화라……. 확실히 기댄다는 말이 춤춘다는 단어보다 생명력이 넘치는군. 산들바람의 은근한 움직임을 나타내면서도 가느다란 버들의 늘씬한 자태 역시 표현되는 듯하오.
그리고 은밀한 달빛은 달이 강조된 표현이지만, 묘연하다 하니 달과 매화가 서로 어우러지는 느낌이오. 단어 하나로 두 가지의 사물을 모두 표현하다니, 정말 훌륭하군!”
화농이 루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복잡하게 얽혔다.
격정에 찬 모습과 동시에 감개가 무량한 듯한 모습이었다.
딱딱하기만 하던 표정에도 옅은 흥분이 비쳤다.
“처음입니다. 제가 쓴 것이 훌륭하다 해주신 분은…….”
“그렇소?”
루안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했다.
“좋은지 안 좋은지도 분별하지 못했다니, 과거에 만났던 이들이 다들 수준이 낮은 이들뿐이었나 보군.”
화농의 음성이 꾹 눌렸다.
“그들은…… 분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꽃나무나 만지는 화농 주제에 시사를 이해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 손엔 그저 진흙이나 어울릴 뿐, 붓이 어울리겠습니까? 고귀한 문인들만이 시(詩)를 음미하고 사(詞)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루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군.”
“무엇이 아쉽습니까?”
루안이 대답했다.
“노인장이 일찍 무애해각에 가지 않은 것이 아쉽소. 그곳은 노인장의 능력만 충분하다면 출신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노인장의 능력만을 봐주었을 텐데.
내게는 사형이 한 명 있소. 사형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대장간 옆에 나이 지긋한 선생이 하나 살고 있었소. 사형은 매일 대장간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그 선생 집 창문에 서서 선생이 책을 읽는 소릴 들었다고 했소.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사형은 거의 모든 경서를 모두 외우게 되었지.
그 후에 학문이 하고 싶어진 사형은 많은 곳을 돌아다녔소. 하지만 어디서도 사형을 받아주지 않았지. 스물이 넘도록 말로 읊을 줄만 알지 글도 쓸 줄도 모르는 대장장인 사형에게는 학문을 가르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리고 어떻게 됐습니까?”
저도 모르게 루안에게 가까이 다가간 화농이 루안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에 사형은 무애해각까지 오게 됐소. 나의 은사께선 사형의 이야기를 듣고 직접 사형을 만나보았고 그를 문하로 들이셨소. 스무 살이 넘어 새로 글을 배워야 했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컸을지는 노인장도 알 수 있을 것이오.
사형은 매일 모래 위에 글을 썼소. 그렇게 꼬박 삼 년을 하고 난 후에야 사형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다시 팔 년이 지난 후인 서른다섯이 되던 해에 장원급제자가 되었지.”
루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도성에 가면 사형을 만날 수 있소. 현재 한림원에 있는 여강(吕康)이 바로 그요.”
여강(吕康)은 한림학사로 경원년 정묘과(丁卯科)의 장원(壯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