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75)화 (75/385)
  • 75화. 귀한 줄 모르고 아끼질 않지

    유모지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몸을 뒤집으려고 움직였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써도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손목이 무언가에 묶여 있는 느낌을 받았을 때, 늙고 거친 음성이 그의 정신을 깨웠다.

    “깨어나셨습니까?”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이 떠오른 유모지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이를 앙다물었다.

    “어르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유모지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농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었는데, 둘 사이엔 작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탁자엔 차가 놓여 있었다. 비록 거친 다기로 만들어진 찻잔이었지만 꽃잎이 점점이 떠다니는 것이 또 다른 정취를 주었다.

    “지난번에 드렸던 질문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화농이 천천히 차를 굴렸다.

    “무슨 질문 말입니까?”

    유모지가 불편한지 그에게 말했다.

    “어르신, 절 좀 풀어주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일단 대화로 풀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언제나 다른 이들을 선(善)으로 대하는 사람이라 다른 이들이 악의를 품고 있을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몸이 묶여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에도 화농을 도와주었고, 이번엔 집까지 업고 돌아왔으니 다른 평범한 사람이라도 상대가 은혜를 원수로 갚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들바람에 춤추는 가는 버들, 은근한 달빛 아래 은밀한 매화.”

    화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이 시구에 더 좋은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전히 그 시구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유모지가 온 방을 도배한 시사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어르신도 참 외골수이십니다. 영산에 이런 고수가 숨어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네요. 저는 시사에 큰 재능이 없는지라, 그 정도만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찻잔을 쥔 화농의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답이 없다 그 말입니까?”

    유모지가 마른 웃음을 짓자 화농은 더는 아무런 말 없이 복사꽃으로 만든 도화차(桃花茶)만을 마실 뿐이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유모지가 결국 입을 열었다.

    “어르신, 어르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글도 훌륭하고 시사 역시 뛰어난 것을 보니 분명 커다란 재능을 타고난 분 같은데 어찌 영산에 은거하며 화농을 하고 계십니까?”

    “난 원래 화농이었습니다.”

    갈라진 음성으로 대답한 그가 고개를 들자 차가운 눈빛이 번쩍거렸다.

    “왜요, 화농은 서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 말입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유모지가 황급히 대답했다.

    “성현들께서 다들 배움엔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모두 학문을 할 수 있지요.”

    표정이 풀어진 화농이 천천히 말했다.

    “바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공자님은 그딴 폐물들보다는 명철하시군요.”

    이제 유모지 역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화농의 말투가 어쩐지 으슬으슬, 음산한 것이, 털이 다 쭈뼛 설 지경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르신, 손이 너무 아픕니다. 우선 이것부터 풀어주면 안 될까요?”

    화농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그러나 바보스러운 것은 죄입니다. 태사부의 공자이시니 어려서부터 이름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텐데 어떻게 이런 시구(詩句)의 좋고 나쁨조차 구분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유모지는 불안해졌다.

    “어르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은 모두 잘하는 것이 따로 있고 저는 어려서부터 시사에 재능이 없었던 것을 저라고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이 시구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요!”

    “문제가 없다니!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무겁게 찻잔을 내려놓은 화농이 일갈했다.

    “산들바람에 춤추는 가는 버들, 은근한 달빛 아래 은밀한 매화라니요! 억지스럽게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안 드십니까? 영기(靈氣)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유모지 앞으로 걸어온 화농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너도 다른 것들과 똑같구나. 짜증이 날 정도로 멍청해!”

    * * *

    해가 저물며 산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걸을수록 무서워진 지서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찾겠다며 협곡으로 내려온 것도, 유모지를 찾아내면 자신에게 죄를 묻지 않을 거란 생각에 저지른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지서는 이제야, 유모지가 나쁜 사람에게 잡혀있다면 자신이 가봐야 구할 수도 없으리란 사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까지 잡힐지도 몰랐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슥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서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나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이 둘째 공자님을 잡아가고, 나도 잡으러 온 건가?’

    싸워 이길 수도 없는데, 이를 어쩐단 말인가!

    발소리! 그녀의 귀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급박한 상황에 풀숲으로 뛰어든 지서는 몸을 웅크렸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그러나 그녀의 바람이 하늘에 닿지 않은 것인지, 슥슥 움직이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지서의 머릿속엔 온통 무서운 상상만이 가득했다.

    풀숲밖에 무섭게 생긴 악마가 서 있다가 자신이 머리를 내미는 순간 한입에 꿀꺽 삼킬 것만 같았다.

    ‘싫어! 싫어! 난 먹히고 싶지 않아!’

    긴장을 심하게 할수록, 몸은 더욱 오그라들기 마련이었다.

    순간, 지서의 아랫배가 당기더니 방귀가 터질 것 같았다.

    ‘참아! 무조건 참아야 해!’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힘을 주었지만, 방귀는 말을 듣지 않았고 그대로 나오고 말았다.

    뽀옹~.

    소리가 나면 안 된다며, 속으로 미친 듯이 울부짖던 지서였지만, 그럴수록 방귀는 더 길고 답답한 소리를 내며 이어졌다.

    그러자 발걸음 소리가 수풀 앞에서 멈추더니 손이 쑥 들어왔다.

    “아악!”

    지서는 비명을 질러대며 두 손으로 발광하듯 들어온 손을 때렸다.

    “잡지 마! 날 잡아가지 마!”

    지서가 난동을 부리자, 손을 내민 사람이 화가 났는지 지서의 어깨를 흔들어 그녀를 바닥에 눌러 앉히고는 소리를 질렀다.

    “나야! 무슨 소리를 이렇게 질러?”

    들려온 음성에 지서가 멈칫했다. 가득한 눈물 너머로 화가 난 듯한 지온의 얼굴이 보이자 그녀가 멍해졌다.

    “어…….”

    “정신 들어?”

    지온이 그녀를 놓아주며 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무공실력이 하찮긴 해도 지서 정도는 충분하지.’

    “그만 일어나.”

    한마디를 던진 지온은 고개를 돌리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찾았어요, 여기에요!”

    놀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지서도 고분고분 지온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가온 루안이 물었다.

    “먼저 데려다주고 오는 것이 나을 것 같군.”

    “그래요.”

    그렇게 세 사람이 함께 걷던 중이었다.

    돌연, 루안의 걸음이 멈췄다.

    “왜 그러세요?”

    지온의 물음에 루안이 나무 한 그루를 향해 걸어가더니 수풀 사이에서 손수건을 집어 들고 지서에게 물었다.

    “그쪽 것인가?”

    고개를 끄덕이던 지서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소리를 질렀다.

    “둘째 공자님! 둘째 공자님이 여길 지나간 거예요!”

    자신을 대신해 손수건을 줍기 위해 내려왔던 유모지가 아니었던가! 이곳에 손수건이 떨어져 있다는 것은 그가 이곳을 지나갔단 말이었다.

    크게 흥분한 지서가 지온을 잡아끌었다.

    “가자! 빨리 가서 찾아보자고! 분명 근처에 계실 거야!”

    “입 좀 다물어!”

    지온이 대놓고 윽박지르자 이에 지서가 벌컥 화를 냈다.

    “왜 소릴 질러! 둘째 공자님을 구하기 싫어? 너 지금 공자님이 혼사를 물린 것 때문에……!”

    “머리에 똥만 찼어?”

    지온은 조금도 봐주지 않고 지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둘째 공자에게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크지? 어쩌면 흉악한 놈의 손에 잡혀있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너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그자에게 알려주는 것밖에 더 되겠어?”

    지서는 입을 뻐금거리긴 했지만,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멍청한 건 괜찮아. 대신 입 다무는 건 배워야지, 안 그래?”

    지온이 차갑게 말했다.

    “말 안 들을 거면 혼자 돌아가.”

    옴팡지게 욕을 먹은 지서는 눈물이 차올랐지만,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하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귀에 조용한 평화가 찾아오자, 지온이 물었다.

    “어때요?”

    가만히 손수건을 들어 올린 루안이 슬쩍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 모습에 지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익었다.

    ‘내 손수건이 다른 사내의 손에 들어가다니…….’

    지서는 당장 손수건을 되돌려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막 지온에게 한바탕 욕을 들은 터라 함부로 입을 열기가 무서웠던 지서는, 어쩔 수 없이 그저 루안을 주시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흙 냄새가 나는군.”

    조금씩 루안이 냄새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상한 꽃냄새…….”

    지온을 향한 그의 눈빛에 우려하는 기색이 비쳤다.

    “누군가 둘째 공자와 함께 있는 건가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꽃냄새에 부패한 냄새가 함께 나는 것으로 보아,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썩은 것을 가까이 한 사람이오.”

    모두를 걱정에 휩싸이게 만드는 말이었다.

    지온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서를 바래다주는 건 미루는 게 좋겠어요. 사람부터 찾아야겠네요.”

    고개를 끄덕인 루안이 손수건을 지서에게 건넸고 지온이 그녀에게 말했다.

    “돌아갈 생각이면 이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돼. 숲을 벗어나면 우리 쪽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아니, 나, 나도 같이 갈 거야!”

    지서가 지온의 말을 끊었다.

    근처에 나쁜 사람이 숨어있을 수도 있는데, 자신이 어떻게 혼자 돌아간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하니 지서를 홀로 보내는 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지온이 말했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입은 계속 다물고 있겠다고 약속해. 만약 너 때문에 일을 망치면, 둘째 공자는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내가 유씨 가문에 가서 알릴 거야.”

    지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 혼자 버려두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대충 상황을 정리한 세 사람은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 * *

    날은 계속해서 어두워졌다.

    유모지의 두려움 역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드디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깨달은 그였다.

    방 안엔 자신만 홀로 남겨져 있었고, 밖에선 칼 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미친놈을 만났구나! 이 미친놈이 시구를 대지 못했다고 지금 날 죽이려고 하는구나!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유모지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칼 가는 소리가 멈추고, 다시 문이 열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심정으로, 유모지는 휘적휘적 걸어오는 화농을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도끼의 새파란 날이 얼음처럼 빛났다.

    “어르신, 진정하십시오!”

    유모지가 소리를 질렀다.

    “어르신께 함부로 한 사람은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시회에서 다른 이들이 전부 어르신을 비웃을 때 제가 나서서 어르신을 도와드렸다고요! 저는 그들과 다릅니다!”

    화농은 그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리지 않는지,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어디서 꺼냈는지 알 수 없는 접힌 대나무 침상을 꺼냈다.

    무척 깨끗하게 닦인 대나무 침상이었지만 어딘지 어두운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에게 끌려간 유모지는 대나무 침상에 몸이 묶였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그의 공포를 더했다.

    순간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듯, 유모지는 깨달았다.

    “이게 첫 살인이 아니구나!”

    화농은 그런 그를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도끼를 닦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침상에 다른 사람도 묶였다가 저 노인네의 도끼에 조각이 났다는……!’

    스스로 한 상상에 순간 정신을 놓아버릴 뻔한 유모지가 소리를 질렀다.

    “이런 법이 어딨어! 내가 그렇게 여러 번 도와줬는데 왜 날 죽이려는 거냐고!”

    드디어 행동을 멈춘 화농이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늙고 상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평온함이 유모지를 더욱 공포에 질리게 했다.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은 다른 죽은 것들과 바를 바 없는, 사람도 아닌 듯한 존재로 보였다.

    “어르신,”

    유모지가 애원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이 어르신을 비웃을 때도 제가 나서서 싸워드렸잖습니까! 다쳤다고 했을 때도 제가 여기까지 업어다 드렸는데 그러면 아무리 억하심정이 있어도 제게 푸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화농의 입이 드디어 열리며 갈라진 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무슨 억하심정?”

    그가 나무껍질처럼 거칠게 갈라진 손을 내밀어 유모지의 팔목을 잡더니 천천히 만졌다.

    “얼마나 예쁜 손인가? 생기도 넘치고, 활력도 넘치니 글을 써도 분명 아름답겠지.”

    구역질 나는 화농의 행동에 온몸에 소름이 끼친 유모지는 애써 손을 빼내려 했다.

    화농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놔두었다.

    어차피 잠시 후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테니.

    “그리 좋은 손을 가지고도 귀한 줄 모르고 아끼질 않지…….”

    조용히 중얼거린 화농이 천천히 도끼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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