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74)화 (74/385)
  • 74화. 화농과 명사

    젊고 건장한 청년이니 노인을 업고 움직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점점 거리는 멀어지고, 목적지엔 닿질 않으니…….

    유모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이미 이만큼이나 왔는데 중간에 나이 든 사람을 그냥 내려놓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이렇게나 오래 돌아가지 않자니 큰형과 다른 일행이 걱정할 터였다.

    결국, 빨리 목적지에 닿길 바라며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아직도 도착을 안 한 겁니까?”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원하던 말이 나오자 유모지는 거의 기쁨의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어딥니까!”

    화농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앞에서 옆으로 도십시오.”

    나무가 밀집한 지역 밖으로 암석으로 된 봉우리가 있었는데, 그 아래 초가집 몇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집은 비록 초라했지만, 무척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문 앞에 있는 몇 그루의 복숭아나무는 전에 보았던 어떤 것보다 모양이 더 예뻤다.

    유모지는 울타리를 열고 화농을 내려주었다.

    “어르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으니, 일행들이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공자님, 잠시 기다리십시오!”

    화농이 지팡이를 짚고 방문을 열었다.

    “먼 길을 오셨는데, 목이 마르지 않으십니까? 감사하니, 여기 오이라도 드리겠습니다.”

    목이 마르긴 했던 유모지는 어차피 늦은 거 오이 하나 먹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방안으로 들어선 유모지는 순간 매우 놀라고 말았다.

    “어르신, 이게 지금…….”

    겉은 보잘 것 하나 없는 초가집의 기둥 네 곳에, 크기도, 글자체도 다른 시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전서(篆書)ㆍ예서(隷書)ㆍ해서(楷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의 문체가 다 있었고, 시의 종류 역시 율시(律詩), 절구(絶句), 소령(小令), 장조(長調)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입이 떡 벌어진 유모지는 놀라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곳을 초라한 화농의 집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명사(名士)의 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막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유모지는 목덜미에서 통증을 느끼며 풀썩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 * *

    온종일 고생을 한 끝에 해가 질 무렵이 되자 현아의 관리들은 복숭아 과수원 아래 매장되어 있던 시신들을 대충 거둘 수가 있었다.

    시신의 숫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많았다.

    복숭아나무 한 그루마다 적게는 한 구에서 많게는 서너 구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었다. 그렇게 모두 나온 시신의 수만 무려 스물세 구나 되었다.

    영산현령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안이 없는 일을 억지로 만든다고 했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젠 묻혀있던 시신이 줄줄이 눈앞에 누워 있으니 자신은 관직에서 박탈될 것이 분명했다.

    관할 구역에서 살해당한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는데, 현령이라는 자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이 사실이 위에 올라가는 순간, 인사고과를 망치는 건 물론이요,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관직이 날아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신들의 오래된 상태로 보아, 못해도 칠, 팔 년은 되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럼 내 전임자, 그 전의 전임자까지 함께 문책당할 가능성이 크지!’

    현령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안이 중얼댔다. 

    “이상하군.”

    고찬이 되물었다.

    “어디가 말입니까?”

    “시간이 맞지 않아.”

    루안이 미간을 좁혔다.

    “이 부지의 복숭아나무는 심은 지 칠팔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 처음 사건은 아마도 십여 년 전에 일어났을 텐데…….”

    고찬이 대답했다.

    “명단에 있던 실종시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연쇄살인 초기에 있었던 실종사건은 다른 연유로 사람들이 사라졌을 가능성 또한 있습니다.” 

    루안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피해자의 숫자가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외부에서 여행을 왔다가 변을 당한 관광객들이 피해자일 가능성이 커. 그래서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겠지. 그럼 초기에 있었던 실종자 역시 명단에 있는 두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그럼 시신을 매장한 매장지가 또 있을 거란 말씀입니까?”

    루안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찾기가 힘들어집니다. 영산에 있는 복숭아 과수원만 해도 얼마나 큰데, 대인께서 일일이 나무 냄새를 맡아볼 수가 있겠습니까?”

    확실히 문제이긴 문제였다.

    루안도 고민을 하긴 했지만 우선은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용의자들부터 찾는다. 나무를 심었던 이들을 찾아라!”

    “네!”

    영산의 복숭아 과수원은 근처에 사는 농가에서 집단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이장이 황급히 명단을 추려 가져왔다. 고찬은 사건에 연루되었을 수 있는 농가의 주인들을 모두 관아로 데려가 일일이 심문하기 시작했다.

    * * *

    협곡을 오가며 찾기를 수차례나 반복했지만, 여전히 유모지의 행적은 묘연했다.

    이제 정말 걱정이 된 유신지가 시종을 불렀다.

    “관아로 가서 현위에게 가용 인원을 모두 데리고 사람 찾는 것을 도우러 오라 해라!”

    대답한 시종, 부주가 부리나케 관아로 향했다.

    마침 시신의 검시를 하고 있던 루안이 소식을 듣고 나와 물었다.

    “둘째 공자가 사라졌다고? 언제 일어난 일이냐? 어쩌다 사라졌지?”

    “오늘 점심쯤…….”

    부주가 상황을 설명하자, 루안이 시취를 막는 가리개를 벗으며 고찬을 불렀다.

    “사람을 데리고 함께 찾으러 간다.”

    루안의 심각한 표정에 고찬이 물었다.

    “대인, 대인께선 지금 그 일을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루안이 말했다.

    “청년, 문인. 둘째 공자는 특징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다.”

    오히려 고찬은 한숨을 쉬었다.

    “설마 그렇겠습니까? 유씨 가문이 보통 집안도 아닌데…….”

    루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간 범인이 그런 것에 신경이나 쓸까? 아니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그게 맞다면…….”

    관졸에게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난 부주가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얼굴로 루안의 소매를 붙들고 매달렸다.

    “루 대인, 어서, 어서 우리 둘째 공자님을 구해주세요!”

    * * *

    사람들과 함께 루안이 도착하자, 유신지는 고마우면서도 한 편으론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직접 여기까지 오다니, 겉으론 냉정해도 루 형은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구려.”

    “…….”

    유신지의 시종인 부주는 루안을 붙잡고 주름이 간 소매를 정리해 주고 있었다. 루안은 시중을 받으며 대답했다.

    “사안이 중하니 먼저 사람부터 찾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군. 아무 일 없길 바라겠소.”

    그의 표정이 무척 어두운 것을 본 유신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째 나보다 더 급한 것 같소?”

    루안이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사건 문서를 보지 않았소? 나를 이곳에 오게 한 그 사건…….”

    루안이 짚어주자, 하얗게 핏기가 사라졌던 유신지의 얼굴이 다시 새파랗게 질렸다.

    그도 문서를 보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루안의 추측일 뿐, 시신을 찾기 전까진 사건이라 불릴 만한 것이 실제 일어났었는지조차 알 수 없단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유신지는 자신도 모르게 평범한 집안이 아닌 자신의 가문을 두고 누가 감히 그런 일을 벌이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종인 부주가 울먹거렸다.

    “공자님, 저분들이 과수원에서 시신을 많이 파냈다고 합니다. 다들 살해당한 문인들이었대요.”

    유신지가 와락, 루안을 붙잡았다.

    “사실이오?!”

    루안이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소매를 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왔겠소?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영산에 나들이객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범인이 이 시간에, 그것도 둘째 공자를 잡아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크지 않소.”

    ‘이는 높지 않을진 모르나,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순식간에 고개를 돌린 유신지가 고함을 질렀다.

    “가만히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둘째를 찾거라!”

    그러고는 루안을 향해 공수했다.

    “루 형, 난 먼저 사람을 찾으러 가보겠소. 도우러 와준 것에 대한 감사는 이후에 잊지 않고 하겠소.”

    고개를 끄덕인 루안은 그가 다른 이들과 함께 협곡으로 내려가는 것을 눈으로 배웅했다.

    “그렇게 심각해요?”

    지온이 묻자 루안이 간단하게 사건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영산에 살육을 벌이고 있는 악마 같은 이가 있는 것은 확실하오. 둘째 공자가 사라졌다고 반드시 일이 생긴 것이라 볼 수는 없겠지만, 만약 진짜 일이 벌어진다면 여파는 심각하겠지.”

    “복숭아나무를 심었던 농가를 불러 모두 관아로 데려갔다 하지 않았어요? 범인이 그 안에 있다면 안 좋은 일도 벌어지지 않을 텐데요.”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 안에 있지 않을 것이 우려되는 거지. 오랫동안 살인을 지속했지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것을 보면, 범인은 아주 신중한 사람이오.”

    두 사람이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한쪽에 있던 지서는 이미 충격으로 눈물을 쏟고 있었다.

    조금 전 유신지를 따라 협곡으로 내려가 함께 유모지를 찾으러 갔던 그녀는 수풀과 돌들로 온통 뒤덮인 곳을 돌아다니느라 소매며 치맛자락 여기저기가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엉망인 꼴을 한 채 지서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 둘째 공자에게 일이라도 생기면, 유씨 가문에서 내게 죄를 묻지는 않을까?’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온몸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에 안절부절못했다.

    만약 그 화가 자신에게로 튄다면, 혼인은커녕 제 목숨마저 떨어질지도 몰랐다.

    ‘그럼 어쩌지?’

    유민은 짜증이 났다.

    “지서 소저, 이미 무척이나 정신없는데, 그만 좀 울면 안 돼요? 겁나면 차라리 먼저 돌아가요.”

    그러나 자신이 감히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지서는 유모지가 자신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손수건을 주우러 간 것이 아닌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그리 눈치를 주었기 때문에 유모지가 마지못해 주우러 간 것이 아니던가!

    “공자님을 찾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그저 유모지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유씨 가문에서 공자님을 향한 내 진심을 봐서라도 날 문제 삼지 않아야 할 텐데.’

    이리 말하는데 유민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유민은 그저 지서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유 대부인이 보낸 이가 상황을 물어오자, 유민은 그 사람을 만나 대답을 해주었다.

    대답을 다 해주고 돌아보니 정자에 있어야 할 지서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게 아닌가!

    흠칫 놀란 유민이 시녀에게 물었다.

    “지서 소저는?”

    시녀 역시 조금 전엔 그녀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었던 지라 결국 정보를 준 것은 길을 지나가던 다른 사람이었다.

    “분홍 상의를 입은 소저라면, 조금 전에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유민은 화가 났다.

    “대체 어쩌려고 자꾸 사고를 치는 거야!”

    설사 사람 찾는 것을 도우러 갔다 해도 혼자 나서면 어쩌자는 말인가! 날도 곧 어두워질 것이고, 일이라도 생기면 혼란만 더 커질 텐데 말이다!

    다가와 상황을 물은 지온이 고개를 돌려 루안에게 물었다.

    “찾는 것 좀 도와주시겠어요?”

    어찌 됐건 지서와 자신은 같은 지씨 성을 가진 가족이 아니던가. 다른 이들에게 그래도 큰언니로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유민에게 이야기하고, 지온과 루안은 협곡으로 내려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