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71)화 (71/385)
  • 71화. 양고기 전병과 떡

    “시신을 찾기 전까지는 실종입니다, 대공자.”

    “알았소, 알았소, 실종.”

    얼른 제 말을 고친 유신지가 말을 이었다.

    “어쩐지, 영산현의 사건이 태평사까지 올라왔다 했소.”

    대리시에 들어온 지 수년간 유신지가 본 사건들만 해도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손에 든 이 사건은 그중에서도 단연코 대사건이라 할만했다.

    사건은 바로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산에 복사꽃이 화려하게 피자 경치를 감상하려는 도성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 바람에 산 아랫마을에 있는 객잔들도 빈방이 없이 만실이 이어지는 통에, 적지 않은 이들이 근처 농가를 빌려 묵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농가에 머물던 관광객이 볼일을 보기 위해 일어났다.

    아무 길가나 향했던 그가 바지춤을 풀었을 때 문득 풀숲에서 무거운 신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누군가의 정사 소릴 들었다고 생각한 그는, 형언하기 힘든 욕정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몰래 그 광경을 훔쳐보려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보인 것은 얼굴이 알아볼 수조차 없이 망가진 시신을 끌고 가던 사람이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이후 그가 함께 온 일행들과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이미 그자는 시신을 버려두고 도망을 친 뒤였다.

    영산현의 관아에서는 이 사건을 조사한 끝에 근처 농가에 살던 자를 하나 잡았고 그 후 사건을 종결했다.

    그렇게 형부로 올라간 사건을, 루안이 다시 들춰낸 것이었다.

    “영산은 대대로 관광지였습니다. 영산현의 현령은 이 일이 알려지면 관광객들이 두려움을 느낄 것을 우려해 대충 사건을 마무리 지었지만, 사실 이 사건엔 믿을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하여 대인께서 제게 이 사건을 조사하라 명하셨습니다.”

    고찬이 말했다.

    “검증하다가 바로 문제를 발견했단 말이오?”

    유신지가 흥미가 동했는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고찬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현장엔 접선이 떨어져 있었는데 조사를 해보니 이 접선은 다른 실종자의 것이었습니다. 그 실종자는 작년에 실종된 사람이었는데, 가족들은 그의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었지요. 하여 대인께선 죽은 이가 분명 하나 뿐은 아닐 거라 생각하셨습니다. 그 후, 최근 몇 년간의 실종자를 조사해보니 그 숫자가…….”

    사건 문서를 모두 확인한 유신지가 물었다.

    “루 형, 다소 섣부른 판단이라 생각되지 않소? 시신조차 보지 못했는데, 그 많은 실종자가 전부 피해자라고 생각한 것이오?”

    루안이 차갑게 대답했다.

    “내가 언제 확실하다 했지?”

    “커흠…….”

    ‘그래, 사건 문서엔 의심스럽다고만 쓰긴 했지. 그러나 그 뜻은 명확하지 않은가? 실종자들이 전부 피해자라고 생각하니 이리 직접 조사를 나오지 않았겠는가 말이야!’

    유신지는 루안의 생각이 다소 과하다고 생각했다.

    “실종자들이 사라진 시간도 십수 년을 건너뛰고 연루된 이들도 대부분 청년이오. 그리고 하나 같이 문인들이지. 루 형, 왜 이들의 실종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오? 대부분 연쇄 사건의 피해자들은 여성이지 건장한 사내를 대상으로 삼는 일은 극소수인데…….”

    많은 범죄자는 약하고 어린 상대를 범행의 대상으로 삼는다. 젊은 사내는 기운이 가장 넘치는 시기이기도 하고 문인들의 지위 역시 가장 높은 축에 속했다.

    루안은 돌 위에 있는 피의 흔적들을 보며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많이 일어나는 실종사건은 여성과 유아, 아동이오. 그들은 대부분 인신매매가 목적이지.

    실종자 명단에서 그럴 가능성을 가진 인물들은 배제하고 나니 남은 이들은 전부 젊은 사내들이었소. 그들은 모두 영산에 나들이를 왔었고 척을 진 사람도 없었소. 특별히 위험한 곳에 출입하지도 않았던 이들이라 특징이 아주 명확했지.”

    유신지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특별한 연유 없이 사라졌고 명확한 특징까지 가졌으니 피해자일 가능성이 컸다.

    ‘루 낭중이 이유 없이 이리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군.’

    “그러나 그래도 시신이 발견되어야 하지 않겠소?”

    유신지가 말했다.

    “시신이 없으면 모든 것은 그저 가설이잖소?”

    루안이 고개를 들며 반문했다.

    “그럼 내가 여기 뭘 하러 왔다고 생각한 건가?”

    “…….”

    유신지는 치솟는 짜증에 루안의 뺨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무엇보다 루안의 성격을 뻔히 알면서 따라온, 멍청한 자신의 뺨은 두 번이나 때리고 싶었고 말이다. 

    대체 하는 말마다 왜 저렇게 가시가 돋쳤단 말인가? 그냥, 그래서 본인이 직접 조사하러 왔다고 하면 어디가 덧난단 말인가?

    ‘꼭 이렇게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반문하는 것이 얼마나 시비조로 들리는지 알지 못하는가 말이야. 나도 그렇지, 이자가 어떤 인간인지 뻔히 알면서 이런 식으로 빌미를 줄 건 또 무언가! 그나마 내가 성격이 좋으니까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이런 인간과 어찌 상대하겠나?’

    이렇게 위안을 하고 나자 그는 다소 우쭐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역시 난 친절하고 상냥해.’

    그 사이 루안은 고찬에게 다른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인력을 모아 이곳을 중심으로 넓게 조사하게.”

    “네.”

    앞으로 남은 일은 고찬의 몫이었기에 다른 이들은 관아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유신지는 근심이 쌓여갔다.

    오늘 밤 그는 제 집안의 장원에서 묵어야 하는데, 그럼 루 낭중을 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이리 만나기까지 했는데, 초대하지 않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하지만 초대를 어찌한단 말인가! 지온 소저도 그곳에 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차에, 옆에 있던 시종이 그에게 말했다.

    “공자님! 저기 둘째 공자님 아닙니까?”

    고개를 든 유신지는 밝게 웃었다.

    ‘됐다,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어.’

    제 형이 나타나자 유모지는 꼭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유모지는 점포에 있는 비싼 간식들을 하나씩 모두 주문하고도 부족하다는 듯 아쉬워했다.

    그러자 유신지가 동생에게 경고했다.

    “그만하지? 다 먹어야 자리를 뜰 수 있을 텐데?”

    사람이 자주 하는 착각 중 한 가지가 무엇이던가? 배고플 땐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게, 사람이 아니던가?

    형의 말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주문을 했던 유모지는, 네모난 식탁에 작은 접시들이 빈틈없이 들어찬 것을 보고서야 주문을 많이 했단 생각에 조금 놀랐다.

    유신지의 음산한 웃음이 유모지의 귓가에 들려왔다.

    “내 조금 전에 다 먹어야 자리를 뜰 수 있을 거라 말했지? 주문한 사람이 다 먹어야 할 것이다.”

    결국, 유모지는 음식을 다 먹지는 못했다. 그러나 날이 이미 어두워진 것을 본 유신지가 그를 풀어주었다.

    비록 용서는 받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유모지의 얼굴에, 걱정스러워진 유민과 지서가 유모지를 살필 때였다.

    유신지가 급히 루안에게 물었다.

    “객잔도 만실이고 현아는 너무 허름하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루 형, 차라리 우리 장원에서 유숙하는 것이 어떻소?”

    “그럼 실례하겠소.”

    루안의 자연스러운 대답에, 유신지가 내심 불평을 쏟았다.

    ‘전에는 그리 없는 사람처럼 날 무시하더니, 천연덕스러운 것 좀 보게!’

    동생이 걱정된 유신지는 유모지를 챙기며 앞으로 나섰고 지온과 루안은 뒤쪽에서 걷게 되었다.

    며칠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루안이 결국 대화할 만한 주제를 찾아냈다.

    “영산엔 어찌 온 것이오?”

    지온이 대답했다.

    “유 대부인께서 나들이에 초대하셔서요.”

    루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유씨 가문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

    “제가 먼저 혼사를 물린 것이 고마워서 그랬을 수도 있죠.”

    루안이 말이 없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 지온이 웃으며 물었다.

    “드는 생각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대인?”

    루안이 읊조리듯 대답했다.

    “대공자가 이곳에 온 것이 좀 이상했지. 내 앞에선 나들이를 왔다고 했는데, 그의 아우에게는 현아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소. 그가 하는 것을 보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단 말인데…….”

    루안이 보기에 대공자는 바람을 쐬기 위함도, 그렇다고 공무 때문에 이곳에 온 것도 아닌 듯했다. 거기에 유 대부인의 행동까지 더하니 뭔가 다른 연유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루안이 다시 물었다.

    “유 대부인이 초대한 사람들은 다 나이가 제법 있는 규수들이었소?”

    루안의 생각을 짐작한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와 제 여동생을 제외하곤 규수라고는 유씨 가문의 넷째 소저뿐이에요. 다른 이들은 나이가 아주 어린 어린아이들이고요.”

    그렇다면 루안이 생각한 연유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가 된다.

    지온은 이제 막 유씨 가문과의 혼사를 무른 상태였고, 지서는 유씨 가문의 눈에 찰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루안이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요.”

    깊은 생각에 잠겨 저도 모르게 손을 내어 주었던 루안은, 따스한 감촉에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자 보인 것은 먹을 것이 든 종이봉투였다.

    “아까 별로 드시는 것 같지도 않던데, 우선 이걸로 요기라도 하세요.”

    “…….”

    종이봉투엔 고기전병이 들어있었다.

    “이걸 언제 산 거지?”

    “조금 전에요. 계산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요.”

    지온이 방긋 웃음을 지었다.

    “양고기 전병이에요. 기억에 이 양고기 전병에 어떤 사람이 시까지 써서 줬다고 하니 맛은 꽤 괜찮을 거예요.”

    잠시 말이 없던 루안은 전병을 입에 가져갔다.

    전병을 한 입 베어 무니, 바삭바삭한 껍질과 양고기에서 흘러나온 육즙이 입안에서 조화롭게 어울렸다. 처음엔 맛이 삼삼하더니 끝에는 단맛이 올라왔다.

    루안은 문득 지금의 상황과 비슷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상해에 있을 때 학생들과 다 같이 마을로 연극을 보러 간 일이 있었다.

    그날 하필 연극 무대에 불이 나는 바람에 일행 모두 막사 밖에서 데리러 올 사람을 기다려야 했었다.

    태자와 의안왕은 연신 안부를 묻는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루안과 옥종화 두 사람은 무리 밖에 나와 있었다.

    아직 이른 봄이었던지라, 매서운 밤바람에 그녀의 코가 빨갛게 얼어 있었다.

    루안은 내내 손에 쥐고 있어 여전히 온기가 남은 떡 한 조각을 슬그머니 그녀에게 건넸었다.

    문득 지온이 그의 상념을 깨고 말을 걸었다. 

    “맛있어요?”

    “음…….”

    세가에서 예를 배운 루안은 거리에서 무언가를 먹는 일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길거리에서 먹은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전병 하나를 모두 해치우기까지 했다.

    “영산엔 일 때문에 온 건가요? 사건이 있었어요?”

    “그렇소.”

    루안이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며칠 전, 관광객이 살해당했소. 현령이 말이 나가는 것을 잘 막아, 아직 퍼지지는 않았소. 당신들도 나들이를 나가 홀로 떨어지는 일을 피하는 게 좋겠지.”

    비록 범인의 목표는 젊은 남성으로 보이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지 않던가?

    “그럴게요.”

    * * *

    사건에 관해 질문하다 보니 일행은 곧 유씨 가문의 장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목을 빼고 그들을 기다리던 유모지의 시종은 일행이 돌아오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자님, 어찌 지금 오십니까! 부인께서 사람까지 내보내 찾으셨습니다.”

    시종에게 유모지를 부축해 데려가게 한 유신지가 일행을 이끌고 어머니를 찾아갔다.

    유 대부인은 평소처럼 그들을 맞았지만 루안과 다른 일행들이 돌아가고 유신지와 둘이 남게 되자, 그제야 유신지의 이마를 쿡 쥐어박았다.

    그녀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빨라도 내일 아침에나 올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마음이 급했구나?”

    유신지가 정색하고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영산에 공무가 있어서 왔다가 우연히 둘째를 만나고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유 대부인이 그를 보며 차게 웃었다.

    “부주(浮舟)라도 불러 물어보랴?”

    “…….”

    “어디서 이 어미를 속이려고!”

    콧방귀를 뀐 유 대부인이 말을 이었다.

    “집안을 건사하는 이가 누구더냐? 네 시종이며 마부며 모두 내 사람들이 아니냐?”

    유신지가 포기했다.

    “어머니께서 어른이시니 어머니 말씀이 다 맞겠지요.”

    유 대부인이 물었다.

    “그럼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 보거라. 지온 소저와는 어찌 된 것이냐?”

    “어찌 될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유신지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둘째와 혼약이 있던 소저가 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정신이 나가도 그런 일을 하겠어요? 지금까지 겨우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누가 너더러 뭐라도 했다더냐?”

    유 대부인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유 추승, 입도 뻥긋하기 전에 술술 자백을 하는 겐가?”

    유신지가 손사래를 쳤다.

    “이미 그렇게 믿고 계시니 제가 무슨 짓을 하건 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요.”

    “알겠다.”

    유 대부인이 그의 말을 믿어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 아이와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럼 더 어려울 것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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