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바보 같으면 그냥 바보 같다고 해요
루안이 무릎을 꿇고 돌들 몇 개를 치우자 그 위로 점점이 남겨진 핏자국이 드러났다.
“여기가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군.”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변엔 누가 살고 있지?”
고찬이 문서를 뒤적이곤 대답했다.
“대인, 이 근처엔 다 복숭아 과수원을 하는 농가들뿐입니다.”
“농가라…….”
루안이 미간을 좁혔다.
뭔가 난제라도 만난 듯한 모습을 보이자 유신지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대체 무슨 사건인지 내게도 보여주시오. 머리가 많아지면 또 좋은 의견이 나올지 모르지 않소?”
고찬이 루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사건이 조사 중이었기 때문에 세부적인 사항은 아직 기밀이었다. 만약 관아에서 누군가 물었다면 고찬은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대인께서 유 추승을 따라오게 하셨던 건 이럴 요량이 아니셨겠는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루안이 말했다.
“보여 드리게.”
“네.”
대답한 고찬이 문서를 유신지에게 건넸다.
받자마자 문서를 펼친 유신지는 문서를 뒤로 넘길수록 경악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문인이 죽었는데, 십 년이 넘도록 까닭을 아는 이가 없다니!”
* * *
지온은 우유떡을 먹으며 근처 서생들의 논쟁을 듣고 있었다.
논쟁은 ‘산들바람’과 ‘가는 버들’, 그리고 ‘은근한 달빛’과 ‘매화’를 어떤 말로 이을지를 두고 일어났다.
어찌나 열띤 논쟁을 벌이는지 근처 복숭아나무를 손질하던 화농(*花農: 꽃이나 나무를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까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그 때문에 서생들은 어깨가 으쓱했다.
‘화농(花農) 같은 낮은 신분을 가진 자들의 귀마저 유혹할 정도라니, 우리들의 대화가 그만큼 훌륭했단 이야기가 아닌가!’
서생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산들바람과 가는 버들은 <흔들다>를 사용해야 맞는 것이고, 은근한 달빛과 매화는 <비추다>가 맞지 않겠는가?”
그러자 곧장 다른 서생 하나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흔들다라……. 좋구먼! 바람은 움직이고 가는 버들은 차분하니, 움직였다 멈추는 동작을 적절히 표현한 것 같소. 거기에 달빛은 비추는 게 맞지. 재미있구먼.”
그러나 다른 서생이 크게 고개를 저었다.
“최 형(崔兄)이 말한 두 단어 모두 모난 곳이 없다 뿐, 그저 평범하기만 하고 아름답지가 않소.”
최 서생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당장에 되물었다.
“그럼 성 형(盛兄)은 더 좋은 단어라도 생각한 것이 있소?”
성 서생이 말했다.
“난 차라리 흔든다는 표현보다는 춤춘다는 표현이 더 좋을 것 같소. 산들바람에 춤추는 가는 버들……. 그리고 뒤에 구절은 은밀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오. 은근한 달빛 아래 은밀한 매화…….”
속으로 몇 번씩 읊조려본 서생들은 확실히 처음 것보다 더 아름다운 시구(詩句)라고 생각했고. 모두가 칭찬하고 나섰다.
“아주 좋소! 춤을 춘다니, 시구의 정수가 되어주는구먼! 듣자마자 아름다운 여인이 낭창거리며 추는 춤사위가 떠오르는 것이 의인화가 아주 적절해!”
“은밀하다는 그보다 더 오묘하지 않소? 은근한 달빛에 은밀히 숨어있는 매화라! 신의 한 수요, 신의 한 수!”
모인 서생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최 서생 역시 몇 번을 읊조리더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자신이 이런 시구는 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격 있는 감상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모습을 보던 지온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유민이 물었다.
“왜요? 별로예요?”
지온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어디선가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들, ‘춤추다’와 ‘은밀하다’는 표현도 썩 좋은 표현은 아닌 듯싶습니다.”
시회의 재미란 바로 이렇게 벌어지는 논쟁에 있지 않던가.
‘문(文)’에는 최고가 없다. 고로 아무리 좋은 문장도 누군가에겐 인정받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잔뜩 흥이 올라 목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던 사람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말을 꺼낸 이가 바로, 옆에서 복숭아나무를 돌보던 화농이었던 것이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산들바람에 춤추는 가는 버들, 은근한 달빛 아래 은밀한 매화’를 읊었던 성 서생이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은 화농도 시를 쓰나 보오. 영산현(靈山顯)이 괜히 천자(*天子: 황제를 지칭)의 발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구먼. 문풍(*文風: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참으로 흥하고 있나보오.”
그러나 옆에 있던 다른 이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시회를 몇 번 듣고 저도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니겠소?”
화농은 거친 베옷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햇볕에 타버린 구릿빛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고 조금 전까지 일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몸에는 여기저기 진흙들이 묻어 있었다. 그런 이가 시사를 논하려 하니 서생들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학업에 매진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었으면 우리 같은 서생들이 어찌 그리 높은 자리까지 오르겠는가?’
“공자님들…….”
그가 입을 열었으나 누군가 금방 그의 말을 끊었다.
“노인장, 가서 복숭아나무 손질이나 계속하시오!”
“저는…….”
“거참! 듣기는 많이 들었을지 몰라도 그 안에 깃든 의미까지 이해한 것은 아닐 게요. 작시(作詩)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게 아니오.”
연달아 비웃음을 당하자 화농도 화가 났다.
“공자님들께서도 시를 짓는 데엔 소질이 없으신 듯합니다. 어쩐지 그런 시구로도 감상이 가능하시더라니!”
화농의 말에 그나마 냉소적으로만 대하던 서생들도 더는 봐주지 않고 나섰다.
“우리가 작시를 못 하면, 노인장은 되고?”
“땅이나 빌어먹고 사는 자가, 어디서 우릴 가르치려 들어?”
“시회나 방해하지 말고, 썩 물러가시게!”
누군가 그를 쫓으려 밀었지만, 매일 고된 일로 단련된 화농과 서생의 힘이 비교나 되겠는가? 밀긴 밀었지만, 화농은 꼼짝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민 서생만 뒤로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서생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지금 힘으로 해보자는 것이오?!”
서생들이 곧장 화농을 빙 둘러쌌다.
“간땡이가 부었구나!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 할 우리를 어찌 화농 따위가 건드리려는 것이냐!”
“말로 안 되니, 손부터 나오는구나, 이런 몹쓸 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민이 화를 냈다.
“저 서생들 왜 저러는 건가요? 아무리 말을 밉게 해도 그렇지 저렇게 버럭버럭 화를 낼 건 없잖아요?”
지온의 미간이 크게 구겨졌을 때,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것이오?”
고개를 돌려보니 유모지였다.
유모지가 다가가 서생들을 밀어내며 화를 냈다.
“이러고도 성현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성현의 말씀을 그렇게나 읽었으면서 한다는 행동이 고작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란 말이오?
성현들께선 교육에 차별을 두어선 안 된다고 하셨소. 틀렸으면 가르치면 될 일이지, 아직 말도 꺼내지 않은 이를 두고 무시부터 하다니!
이런 짓거리나 하는 당신들이 사람을 교화하고 진정 백성을 위하는 관리가 되리라고 생각하시오? 백성에게 해나 끼치는 관리가 되기 전에, 차라리 지금이라도 가서 그 허리띠에 목이라도 매어 죽으시오!”
지온은 매우 놀랐다.
취태평에서 그렇게 나서는 것을 보고 지온은 이미 유모지가 정의감이 유달리 투철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발전한 것 같지 않은가?
지난번엔 루안에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당하더니, 이번엔 홀로 여럿을 상대하면서도 독하게 정곡을 제대로 찌르고 들어갔던 것이다.
학업에 정진하는 것이 결국 관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관리가 되기 전부터 백성들을 괴롭히다니?
잠시 조용히 말이 없던 서생들은 금방 반박하며 달려들었다.
“형씨, 어찌 그리 입이 험하시오? 멀쩡하게 잘하고 있던 시회에 멋대로 훼방을 놓은 것도 문제 삼지 않았거늘, 그저 떠나라고 한 것도 문제란 말이오?”
“점잖게 차려입은 사람이 어찌 이리 막무가내로 나오시오?”
“말로 안 되는 것 같으니 손을 쓴 건 저자인데, 도리어 우릴 책망하다니 무슨 경우란 말이오!”
유모지가 차게 웃었다.
“똑같은 인간들끼리 눈도 잘 안 보이나 보군! 먼저 사람을 밀어 놓고 본인이 허약해 넘어질 뻔 해놓고는, 어르신이 먼저 손을 썼다니? 나이도 젊디젊은 자가 어르신보다 힘이 약한 것을 보니, 평소 기마와 활쏘기에 게을렀던 게 아니오?
군자육예(*君子六藝: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이며, 이는 각각 예학(예법), 악학(음악), 궁시(활쏘기), 마술(말타기 또는 마차몰기), 서예(붓글씨), 산학(수학)을 말한다)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큰소리는 떵떵 치는군!”
“자네…….”
그 광경을 보던 유민이 얼굴을 부여잡으며 지온에게 사과했다.
“둘째 오라버니께서 충동적인 부분이 있다 보니……실례를 끼쳤네요.”
지온이 대답했다.
“공자께서는 진정 백성을 위하는 분이시죠. 공자님은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을 지닌 데다, 솔직한 것은 실례가 아니에요. 도리어 탄복할 만한 것이죠.”
잠시 침묵하던 유민이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역시 잠시 말이 없던 지온이 대답했다.
“마음은 좋은 마음이었지만, 방법이 조금 투박했죠.”
유민이 까르르 웃음을 흘렸다.
“바보 같으면 그냥 바보 같다고 해요. 제 생각에도 정말 바보 같거든요.”
당당한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가 다른 이들과 대거리하려고 직접 나설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대거리만 하다가 괜히 기운만 상할 뿐이지.
두 사람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흥미롭게 상황을 관전했다.
다만 지서는 유모지가 드잡이라도 할까 싶어 안절부절못하며 당장이라도 달려가 유모지를 서생들과 떼어놓고 싶어 했다.
당연히 유모지도 그렇게까지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어서, 말싸움 몇 마디를 한 후에 화농을 정자에서 데리고 나왔다.
지온과 유민이 그 뒤를 따라갔을 때 유모지가 화농을 위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저들은 신경 쓰지 마시고 편안히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화농이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을 들며 물었다.
“공자께서도 그 시구가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화농이 아직 시구를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유모지가 당황했다.
“예?”
“산들바람에 춤추는 가는 버들, 은근한 달빛 아래 은밀한 매화……. 공자께서도 이 시구가 좋으신 것입니까?”
잠시 생각을 하던 유모지가 돌려 말했다.
“비교해보아야 좋고 나쁨을 알 수 있으니, 처음의 시구보다 더 좋은 시구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공자님. 그보다 더 좋은 시구가 있을까요?”
유모지는 시 짓는 일에는 재주가 없었기에 아무리 고심을 해봐도 도무지 더 좋은 시구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가 고개를 흔들자, 짐짓 실망한 듯한 화농이 다시 물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님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유모지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화농이 끈질기게 물어오자 결국 지서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유 태사님의 둘째 아드님이신 유모지 공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