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9)화 (69/385)
  • 69화. 호기심이 집안 전통

    부인 몇이 맞장구를 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위씨 부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자신이 이제 막 지서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여 유 대부인 역시 솜씨 좋단 말까지 한 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옆에서 뜬금없이 제 시녀가 만든 것이라니? 내 딸 지서더러 시녀나 하는 일이나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저 앙큼한 계집! 전에는 내가 저것의 수준을 몰라봤어!’

    요리 실력을 뽐내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서는 얌전히 부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나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서책을 꺼내 든 지온은 틈틈이 옆에 있는 기문혜와 몇 마디를 나누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모지가 크고 작은 아이들을 우르르 이끌고 다가오며 소리쳤다.

    “어머니! 제가 시회(詩會)에 가야 해서 우선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그의 이마에서 송골송골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운동을 해서인지 얼굴이 다소 불그스름히 달아올라, 그렇지 않아도 영준한 그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에게서는 영웅의 기상이 더욱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지서의 눈빛이 순간 반짝이며 빛을 냈다.

    유모지의 말에 다른 부인들 몇이 웃음을 지었다.

    유씨 가문의 오부인이 유모지의 속내를 쿡 찌르듯 말했다.

    “시회가 아니라,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싫어서겠지!”

    유 대부인 역시 거들었다.

    “굳이 꽃놀이에 따라와 놀고 싶다더니? 이 어미가 동생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 했을 때 어찌했느냐? 두 손 들고 그러겠다고 하지 않았어? 왜? 인제 와서 후회하는 것이야?”

    유모지가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지금 같이 데리고 놀아주지 않았습니까?”

    웃으며 다가온 오부인이 그에게 도망칠 구멍을 내주었다.

    “젊은 청년이 어찌 얌전히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보라고 하시지요, 아이들은 저희 집안 아랫것들에게 보라고 하면 됩니다.”

    유 대부인은 유모지를 더 곤란하게 하지 않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만 가거라. 우리가 꽃구경하는 걸 방해나 하지 말고.”

    그 말에 희희낙락한 유모지가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공손히 올렸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찰나, 지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듣자니 요즘 영산에 시회가 그리 많이 열린다지요? 이름난 명사들이 다들 모인다던데, 저희도 가서 들어보면 어떻겠는지요?”

    위씨 부인이 얼른 대답했다.

    “그것도 좋겠구나. 그러나 모두 사내뿐이니 괜히 다른 이들과 부딪히지 말고 너울을 쓰거라.”

    “네, 어머니.”

    위씨 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들어 유모지에게 말했다.

    “공자, 우리 지서를 챙겨주시겠는가? 두 대에 걸쳐 집안끼리 왕래가 있었으니, 지서가 동생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유모지는 내키지 않았다.

    자신은 아이들 뒤치다꺼리나 하고픈 것이 아니라 혼자 가서 놀고 싶은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데 거절을 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은지라, 그는 얼른 제 어머니께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유 대부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민(敏)이를 함께 보내지요. 그리고 지온 소저도 같이 가는 것이 어떤가? 어린 소녀들이 우리 같은 이들과 이야기를 해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둘째야. 네가 오라버니를 잘 챙겨야 한다.”

    유 대부인의 말에 유씨 가문 삼부인의 여식인 유민(兪敏)이 공손히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유모지는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서에게 짝이 생긴 셈이니 자신이 일일이 대화를 해주지 않아도 될 것으로 여겼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지온은 사실 크게 가고 싶지 않았다.

    시회라니, 너무 많이 보지 않았던가?

    정말 훌륭한 시는 몇 수 없고 대부분은 그저 이름이나 날리고 싶은 어설픈 이들뿐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늘 기존의 사상이나 생각을 비틀어 보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 시사(詩詞)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 대부인이 말을 꺼냈으니,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했다.

    * * *

    날이 점점 따뜻해져 너울을 쓰면 더울 날씨였다. 이렇게 봄나들이가 한창인 시기에 명문가의 여식들이 문밖을 나서는 것은, 본디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자태를 모두에게 뽐내는 것이기도 했다.

    지온과 유민은 모두 모자를 쓰지 않고 얼굴을 가릴 부채만 챙겼고, 본래 너울을 쓰려던 지서 역시 생각을 바꾸어 쓰지 않았다.

    울상을 한 유모지는, 소녀들을 데리고 비를 피하거나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둔 정자나, 전망대 등 시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는 지서의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유민에게 눈짓을 보내며 살려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유민은 보고도 못 본 척 뒤로 슬쩍 물러나 지온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황을 눈치챈 지서가 때는 이때다 싶어 더욱 유모지에게 달라붙었다.

    “복사꽃 시중에 소녀는 백낙천(*白樂天: 백거이의 자)의 시를 가장 좋아합니다……사람 거하는 곳 4월이면 꽃은 모두 지는데, 산사의 복사꽃은 이제 활짝 피누나(*人間四月芳菲盡인간사월방비진, 山寺桃花始盛開산사도화시성개: 백거이의 <대림사도화> 중)……. 꼭 이 영산을 두고 하는 말 같지 않으신지요? 막 4월에 복사꽃이 너무도 아름답게 피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신지요, 공자님?”

    계속되는 지서의 수다에 머리가 둘로 쪼개질 것 같았던 유모지가 웅얼웅얼 대답했다.

    “뭐, 그런 것 같소…….”

    “공자님께선 누구를 좋아하시는지요? 시선(*詩仙: 시인 이백을 말함)입니까? 아니면 시성(*詩聖: 시인 두보를 말함)……? 혹 산문을 좋아하시는지요?”

    “나는…….”

    뒤에 있던 유민이 조용히 읊조렸다.

    “뭘 보고 알랑방귀에 뺨 맞는다고 하는지 아세요?”

    지온이 그녀를 바라보자 유민이 깨소금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저희 둘째 오라버니는 시사(詩詞)를 가장 싫어하거든요. 오라버니가 쓴 시를 두고 저희 백부께서 늘 정신이 부족한 시라고 혹평하시거든요.”

    지온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나도 그런데…….’

    지온의 할아버지는 시를 짓는 데는 타고나는 재능이 가장 중요하다 하셨다. 사물에 관한 깊고 섬세한 통찰이 시를 짓는 데 필요하며, 그저 머리가 좋은 것만으론 부족한 시를 쓸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심미적 요소라고 하셨다.

    그래서 지온이 아무리 규칙에 어긋나는 것 하나 없는, 흠결 없는 시를 써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하시곤 했었다.

    그 후, 지온은 더는 시를 쓰지 않았다.

    ‘최고의 것을 낼 수 없다니. 정말 싫었어.’

    그녀는 완전하게 손에 쥘 수 없다는 느낌이 싫었다.

    마음을 추스른 지온이 유민을 향해 말했다.

    “넷째 소저. 지서는 제 사촌 동생이에요.”

    그런 자신 앞에서 지서의 뒷말이라니,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유민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가 바보도 아니고, 두 분 서로 사이 안 좋던데요, 뭘…….”

    “…….”

    유민이 이상한 눈으로 침묵하는 지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우리 둘째 오라버니에게 별생각이 없으신 것 같네요?”

    지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혼사도 다 물러갔는데, 더 무슨 생각이 있으려고요? 생각이 있었으면 그때 혼사를 무르지 않았겠죠?”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게 아니고요?”

    너무 질문이 노골적이라고 느낀 지온은 도리어 반문했다.

    “소저께서는 그 일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유민이 통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소저의 동생이 저희 가문으로 시집올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혼사를 아예 없는 것으로 물렀다잖아요. 그게 너무 호쾌해서 사람 다룰 줄 모른다던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한 행동 같지 않더라고요.

    솔직히 말해 봐요,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거죠? 처음부터 그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 소저의 숙모님이 소저를 분명 경계했을 테니까요.”

    유민의 흥미로워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온은 웃음이 나왔다.

    ‘이 소저도 이러는 걸 보니, 호기심이 많은 것이 이 집안 전통이 맞나보네.’

    유민은 계속 재잘댔다.

    “소저의 당시 상황을 제가 생각해 봤거든요? 그랬더니 정말 그 방법이 최선이겠더라고요. 혼사는 없던 게 되긴 했지만, 백모님께 좋은 인상을 남겼잖아요. 그래서 우리 가문의 손님으로 여기까지 올 수도 있었고요.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 돌아오다니, 진짜 대단해요!”

    “…….”

    침묵하던 지온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혼사를 무를 생각을 하여 혼사를 물렀던 것이지, 많은 생각을 한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유 대부인께서 절 초대하셨을 때 저도 많이 놀랐고요.”

    “그래요?”

    유민은 지온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는데? 제가 들은 이야기론…….”

    말을 잇던 유민은 금방 입을 다물었지만, 지온은 유민의 생각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집 남매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둘째인 유모지 공자의 머릿속은 온통 기이하고 환상적인 생각들로 가득했었다. 오송원에 나비왕이 나타난 거란 이야기도 하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이 소저는 지씨 가문의 안채에서 일어났던 일을 상상하고 있었다. 자매가 혼사를 두고 결투를 벌이는 상상 같은 것을 말이다.

    ‘두 남매가 서로 잘만 하면 서책방 하나 건사하는 건 일도 아니겠어.’

    지온은 두 사람과 서책방을 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 혼사를 무르고 싶었던 거예요? 왜요? 우리 둘째 오라버니가 별로였어요?”

    유민은 지온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온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기, 소저는 방금까지 소저의 둘째 오라버니 흉을 봤잖아요.’

    “상을 치르면서 효를 다 해야 하니까요.”

    지온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리고 수행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시집가는 것보다 더 즐거워요.”

    “……그, 그래요?”

    “그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많은 공주께서 출가하셨겠어요?”

    “아…….”

    유민은 깊은 침묵과 함께 생각에 빠졌다.

    호기심 넘치는 소녀를 해치운 지온은 정자에 앉아 다른 이가 읊는 시에 귀를 기울였다.

    * * *

    “루 형, 도착한 거요?”

    언덕을 오르던 유신지가 지쳐 고함을 질렀다.

    경사진 언덕에 어지러이 놓인 돌들 사이를 오가던 루안과 고찬 무리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했다.

    “대공자, 피곤하시면 먼저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유신지의 고집이 발동했다.

    “안 피곤해! 그냥 묻기만 한 거요, 묻기만……!”

    유신지는 이를 악물고 아등바등, 그들의 뒤를 따라 다녔다.

    그 모습을 보는 시종은 속이 상했다.

    “대공자님, 아니면 저희는 그만 돌아가지요. 저들은 옷도 간편하게 입었지만, 저희는 지금…….”

    루안 일행은 출장 준비를 하고 나온 터라 가볍고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지는 넓은 도포에 소매까지 풍성한 차림이었던지라 여기저기 솟은 바위와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움직일 때마다 옷깃이 쓸리고 있었다.

    “안 된다! 저자가 돌아가잔 말도 안 했는데 내가 어찌 먼저 두 손을 들어!”

    시종은 기력이 다 빨리는 기분이었다.

    “대공자님과 싸우는 사람도 없는데, 진다니 웬 말입니까?”

    “아무튼, 무조건 안 돼!”

    시종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옷을 찍 하고 찢었다.

    “공자님, 이거로 소매를 묶으세요. 그럼 좀 덜 걸리적거릴 겁니다.”

    감동한 유신지가 그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그래도 내가 유용할 때가 있구나. 그동안 널 아낀 게 아깝지 않다.”

    그러자 시종이 곧장 기대 가득한 얼굴로 눈을 반짝거렸다.

    “그럼 품삯이라도 올려주시는 것입니까?”

    유신지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그의 단꿈을 깨뜨렸다.

    “대낮에 꿈이라도 꾸는 게냐?”

    “…….”

    침묵하던 시종이 구시렁거렸다.

    “말로만 칭찬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느냐?”

    “하긴, 그렇지요.”

    그때, 고찬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인, 여길 좀 보십시오!”

    정신이 번쩍 든 유신지가 발버둥 치듯 달려갔다.

    “어디, 어디……?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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