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8)화 (68/385)
  • 68화. 인연이 깊은 모양이오

    “잠깐…….”

    마차가 장원 쪽으로 방향을 틀려던 찰나, 유신지가 마부를 불러 세웠다.

    “먼저 현아(縣衙)로 가세.”

    시종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대공자님, 현아는 왜 가십니까?”

    “순찰할 것이다!”

    유신지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내가 여길 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시종은 그저 입만 쩍 벌리고 더듬더듬 말했다.

    “그야 지씨 가문 큰아가씨 때문에…….”

    시종의 뒷말이 제 주인의 희번덕이는 눈빛 아래 목 아래로 사라지자, 그제야 만족하는 얼굴이 된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이 사건에 의문점이 많아 내 직접 실사하려고 온 것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 없습죠.”

    ‘네네, 공자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건이 너무 많다더니, 지금은 또 한가하게 실사를 나와야 한다니 거참.’

    시종은 속으로 중얼대며 제 주인을 흉봤다.

    제 시종의 속도 모르고 유신지는 생각에 잠겼다.

    ‘현의 관리들과 사건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날이 저물겠군.’

    마침 영산에 가문의 장원이 있으니, 온 김에 들리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 핑계를 찾느라 어찌나 고심했는지…….’

    유신지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난 절대 어머니의 위협에 굴복하여 온 게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자신은 그저 현아에 공무로 볼 일이 있어 들렸다가 날이 저무는 바람에 장원에 하룻밤 머물고 갈 뿐인 것이다.

    ‘이 정도면 제 살 깎아먹기는 아니겠지.’ 

    현아에 들어가 안에 말을 전하던 그는, 먼저 와있는 이를 보고 매우 놀라고 말았다.

    “루 형! 왜 여기 있소!”

    그러며 유신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나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단 말인가! 태평사가 가진 인맥이 이리 대단했단 말인가! 설마하니 우리 가문에도 태평사의 끄나풀이 있었을 줄이야! 안되지, 안 돼! 내 돌아가면 싹 다 조사를 한 번 해야…….’

    루안이 손에 든 문서를 흔들며 말했다.

    “사건 조사를 하러 왔지.”

    그러고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자네는 여기 왜 왔지?”

    형부는 사건의 조사를 맡고, 대리시는 조사한 사건을 검사하는 부서였다. 형부 소속인 자신이 현아에 내려오는 것은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여드레나 늦어도 열흘에 한 번은 오는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평소 도성을 벗어나는 일이 없는 유신지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다니 이상했다.

    “난…….”

    문서를 안고 선 유신지의 말문이 막혔다.

    다른 이들이야 자신이 내민 핑계로 속여넘길 수 있었다. 이런저런 말을 엮으면 상사인 그를 현아 사람들은 순순히 보내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루 낭중, 이 자는…….’

    “저희 대공자께서는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오신 것입니다.”

    그때, 시종이 기지를 발휘하며 끼어들었다.

    “마침 손에 들고 계셨던 문서에 나온 사건이 이곳에서 벌어진 것이라 겸사겸사 들리신 것이지요.”

    유신지가 듣고 보니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시종 녀석이 제법 쓸 만하구나!’

    유신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영산에 복사꽃이 흐드러져 요즘 연일 시회(詩會)가 열린다더군. 영산에 오는 길에 사건 문서나 볼까 싶어 들고 왔는데, 알고 보니 사건이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더군. 내 잠깐 물어나 볼까 싶어 방문한 것이오.”

    “오…….”

    입을 연 루안이 누군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현위(*顯尉: 관직명)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그러고는 문서를 챙겨 한쪽으로 자리를 옮긴 루안은 집중해서 사건을 읽기 시작했다.

    영산의 현위는 공손하게 유신지를 향해 예를 갖췄다.

    “유 추승께서는 어떤 사건으로 오셨는지요?”

    유신지가 그에게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지난달에 이곳에서 올린 사건일세. 소를 훔치다 걸린 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던 사건 말이네.”

    “아, 그 사건이라면…….”

    현위가 사건에 대해 줄줄이 읊자, 유신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루안에 대해 생각하였다.

    ‘진짜 우연인가? 설마 그럴 리가……? 둘이 그 정도로 깊은 인연이란 말인가!’

    루안은 무척이나 집중한 듯 유신지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윽고 고 대인이 들어왔다.

    “대인, 사건이 발생한 지점을 찾아냈습니다.”

    루안이 문서를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자.”

    “아니, 어딜 가시오!”

    현위의 말을 자른 유신지가 득달같이 물었다.

    “사건 조사를 하러 가오.”

    루안이 흘긋 그를 보았다.

    “유 추승도 함께 가시려고?”

    유신지가 생각해 보니 루안이 자신을 대공자가 아니라 유 추승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자신을 비웃으려는 의도 같았다.

    형부와 대리시가 서로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루안이 사건을 조사하는 곳에 유신지가 따라가는 것은 다소 선을 넘는 행동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두꺼운 얼굴을 가진 유신지가 그런 것을 신경이나 쓰겠는가?

    유신지는 방긋 웃음을 지었다.

    “어렵게 나온 길에 이리 루 형을 만난 것도 인연이지 않겠소? 내 이미 전부터 루 형의 뛰어난 능력에 크게 감동하여 동경하였으나 그동안 함께 일할 기회가 없어 아쉬웠던 참이었소. 그런데 이리 기회가 생겼으니……. 루 형, 한 수 배워가게 해주시겠소?”

    루안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대리시가 요즘 한가한가 보군!”

    그게 아니라면 어딜 가든 자신과 유신지가 계속 마주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한가하다니!”

    유신지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내 바쁜 와중에 잠깐 틈을 내어 영산에 들른 것인데 여기서 또 루 형을 만나다니, 아무래도 우리의 인연이 깊은 모양이오.”

    “…….”

    “대인?”

    흔히 고 대인이라 불리는 고찬이 루안을 재촉하자, 루안이 대답했다.

    “대공자께서 이리 말씀하시는데, 내 어찌 거절하겠소? 그러나 이 사건은 일단 기밀이니 말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주시오.”

    유신지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소.”

    현아를 나온 일행은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이동했다.

    뒤에서 따라가던 시종이 유신지에게 몰래 물었다.

    “대공자님, 저희 원래 장원으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갑자기 사건 조사라뇨?”

    유신지가 입꼬리를 비틀며 대답했다.

    “내가 어찌 알겠느냐!”

    자신은 그저 어머니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으려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사건 문서까지 챙겨 와 공무를 수행하는 척을 할 생각이었는데, 뜬금없이 루안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러나 기왕지사 루안까지 만난 마당에, 따라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나는 저 음흉한 놈과 지온 소저의 관계를 확실하게 하지 않고서는 도무지……잠깐!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왜 내가 루안을 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 * *

    영산의 산자락부터 계곡까지 복숭아나무들이 굽이쳤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타오르는 붉은 노을처럼 흐드러져 눈이 부셨다.

    일찍 산에 오를 수만 있다면 운무(雲霧)에 산 전체가 휩싸인, 선경(仙境)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었을 터였다.

    언제나 놀기 좋아하는 도성 사람들이 마침 봄나들이하기 딱 좋은 시기의 이런 절경을 놓칠 리가 없었다.

    쉬는 날도 아니었건만, 계곡 주변엔 휘장들이 빼곡하게 휘날리며 인파가 물결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진 의운이 감탄을 쏟았다.

    “영산이 이렇게나 붐비는 곳이었어요? 전엔 와본 적도 없거든요!”

    지씨 가문은 차남가가 관리해 왔었고, 의운은 과부가 된 대부인 정씨를 모셔왔었으니 영산에 올 기회가 있었을 리가 없었다.

    의운에 말에 지서 옆에 있던 시녀들이 의운을 무시하듯 바라보았다. 울컥 화가 치민 의운이었지만, 눈치 빠른 서아가 재빨리 그녀를 붙들었다.

    “며칠 활쏘기 연습을 하더니, 차분함도 같이 날려 버렸어?”

    서아가 조용히 그녀에게 충고했다.

    “아가씨께 흠이 될 행동은 하지 마.”

    의운이 화를 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전이라면 지금보다 더 화가 났어도 그걸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차남가의 세력이 크다 보니 혹시라도 제 주인이 힘들어질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온을 따르는 동안 당하기는커녕, 번번이 상대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일들이 벌어지자, 의운도 전처럼 무조건 고개를 조아리고 싶지만은 않았다.

    지온 역시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이 확실하다면, 화를 좀 낸 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능력이 없기에 무슨 일이든 참고 사는 것이 아니던가.

    “아가씨, 여기 앉으세요.”

    한차례 도발을 끝낸 지서의 시녀들이 지서를 유 대부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로 안내했다.

    의운은 내심 구시렁거렸다.

    ‘둘째 아가씨는 아직도 포기를 안 한 거야? 지금 유 대부인께 잘 보여서 다시 혼사를 이을 기회가 없을까 확인해보려고 저러는 거지?’

    의운은 저도 모르게 떠나기 직전 하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로는 이렇게 말했었다.

    “가면 최대한 유씨 가문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 유 대부인께 우리 아가씨가 전과 다르다는 걸 알리란 말이야.”

    당시만 해도 의운은 그저 웃어넘기며 말했었다.

    “유씨 가문 사람들이랑 당연히 친하게 지내야지, 그래야 우리 아가씨께 좋을 거 아냐. 근데 너 뒷말이 조금 이상한데, 무슨 생각이야?”

    잠시 침묵하던 하로가 의운의 귀에 대고 작게 제 생각을 전하자 의운은 매우 놀랐다.

    “미쳤어? 아가씨가 그 집 둘째 공자님과의 혼사를 물렸는데, 대공자랑 어떻게 그래!”

    하로가 말했다.

    “뭘 어떻게 한다고 그래, 난 그냥 잘 보이기만 하란 뜻이야. 혹시 기회가 오면 무조건 잡고……. 유씨 가문에 뜻이 없으면 우리가 뭘 할 수나 있겠어?”

    가만히 생각하니, 또 그 말이 맞는 듯했다.

    하로는 자신보다 꼼꼼하고 성격도 침착해 실수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로가 이리 말한다는 건 분명 뭔가가 있단 소리였다.

    “어떻게 봐도 그 루 대인보다 낫잖아…….”

    사실 의운은 루 대인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루 대인은 젊은 나이에 벌써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의 관직 역시 지씨 가문의 노야들보다 높고, 듣자하니, 황제 폐하 역시 그를 무척 중시하고 있다지 않은가? 비록 지금은 루 대인의 상황이 좀 그렇다지만, 아가씨가 좋아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루 대인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고, 유씨 가문의 기반이 더 탄탄했다.

    마음을 정한 의운은 상대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서의 시녀들이 준비한 간식들을 꺼내더니 제 집안의 아가씨와 부인에게 먼저 건넨 후, 다시 유 대부인에게도 가져갔다.

    “부인, 복사꽃으로 만든 도화소(桃花酥)입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새벽같이 일어나 만드신 것이니, 맛을 한 번 보시지요.”

    복사꽃 모양의 작은 도화소였다.

    다섯 장의 꽃잎 한쪽으로 자홍색(紫紅色) 소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도화소는 검은깨를 뿌려 꽃술을 표현해 작고 귀여웠다.

    겉은 바삭했고, 향은 달콤했으며, 빛깔 역시 무척 아름다웠다.

    시녀에게 가져오라 명한 유 대부인이 웃으며 칭찬했다.

    “지서 소저의 손재주가 참으로 뛰어납니다.”

    이에 위씨 부인이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 아이가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집안에 주방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뛰어난 주방장도 정성을 쏟는 것만 못하다고 하여 저와 저희 노야를 자꾸 먹이는 통에, 살이 다 찔 지경입니다.”

    유 대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위씨는 유 대부인이 지서의 효심이 깊다고 칭찬하면 그 후에 할 말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 밖에도 유 대부인이 생각대로 따라와 주질 않았다.

    하려던 이야기가 목구멍에 걸려버린 위씨 부인은,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지온도 가져온 간식을 꺼냈다.

    의운은 먼저 가까운 곳에 있는 기문혜와 다른 아이들에게 간식을 건넨 후에 유 대부인이 있는 쪽으로 가지고 갔다.

    “부인, 저희 아가씨께서 만든 것입니다.”

    지온이 가져온 것은 다양한 모양을 한 유백색의 떡이었다.

    고양이나 강아지 모양을 한 것도 있었고 물고기나 새 모양을 한 것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척 앙증맞고 귀여워 아이들은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 아이들의 반응에 호기심이 든 유 대부인이 간식 쪽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인가? 내 이런 것은 본 일이 없는데.”

    “우유떡으로 모양을 낸 것뿐입니다.”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제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옆에서 말이나 했을 뿐, 제 시녀들이 만든 것이지요.”

    우유떡 한 조각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 유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향이 진하면서 크게 달지도 않은 것이 아이들에게 주기 딱 좋겠네.”

    그녀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지. 집안에 아랫것들이 있는데 굳이 직접 손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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