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7)화 (67/385)
  • 67화. 자매 사이

    각자의 거처에서 정리를 끝낸 사람들은 모두 나와 점심 식사를 함께 들었다.

    지서는 이상한 약이라도 먹은 것인지, 지온에게 살갑게 다가와 지온의 옆에 앉았다.

    “큰언니,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어.”

    “오랫동안 집에 오지 않아, 저희 모두 걱정했어요. 그동안 얼굴 상한 것 좀 봐요. 고생이 많았나 봐요. 휴, 꼭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효를 다하고 싶으셨으면 집에서 해도 되잖아요. 조방궁이 집보다 편하지도 않을 테고…….”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지온의 대답은 듣는지 마는지, 지서가 득달같이 말을 이었다.

    “요즘 제가 외출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언니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굳이 대답을…….”

    “가서 수행만 하는 것도 아니고 화신점이라는 걸 한다면서요? 화신첨을 뽑으면 소원을 들어준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거 사람을 속이는 거잖아요?”

    지서의 음성이 작지 않아 순간, 모두의 시선이 달려들었다.

    은근히 의기양양해진 지서는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목소리를 전혀 줄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큰언니, 언니가 지금은 조방궁에 있어도 언니는 지씨 가문의 딸이잖아요. 저희 집안은 대대로 문인 가문이었어요. 언니를 능운진인에게 보내 수행을 하게 한 것도 언니가 화를 피하게 하려고 보낸 것이지, 어떻게 강호의 사기꾼이나 할 법한 수법을 배워오셨어요?”

    지온이 웃었다.

    “둘째가 소식에 참 밝구나?”

    지서가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제가 소식이 밝은 것이 아니고, 언니가 일을 너무 벌인 거죠. 달에 한 명만 뽑다니, 사람들의 흥미에 의지해 인기나 끌어보자는 게 아니고 뭐에요? 듣자니, 이번 달에 뽑은 사람이 아들을 바라는 부인이라던데, 그 소원을 어떻게 이뤄주려고요?”

    지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쪽에서 놀란 음성이 넘어왔다.

    “언니, 지금 저 소저가 말하는 사람이 설마 언니는 아니지?”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원씨 집안의 어린 며느리인 기문혜의 동생 기문영이었다.

    유씨 본가 부인들이야 체면을 위해 이런 말을 할 자리를 가렸지만, 유씨 가문의 방계 혈족 중 다른 마음을 품던 이가 부채질하듯이 끼어들었다.

    “드디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하러 가셨군요! 사실 이미 옛날부터 치성을 드려야 했어요. 게다가 원 오라버니는 독자시잖아요. 혼인한 지 삼 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으니 백모님께서도 조급해하시는 게 당연하죠.”

    기문혜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신혼 초에 수태를 비는 것은 누구나 흔히 하는 기복 행위이지만, 자신처럼 아이를 갖지 못하여 집안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상황은 조금 달랐다. 어딘가에 찾아가 수태하는 것을 기원하는 자신의 행동은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저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문영이 나서서 해명했다.

    “저희 언니는 그저 평소처럼 조방궁에 향을 올리러 갔다가 화신점을 봤을 뿐이에요. 근데 화신첨이 튀어나올 줄 알았나요? 그래도 좋은 운이 들었다는 거니까, 앞으로의 일도 잘 해결이 될 거라고요. 그렇지, 언니?”

    기문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은근슬쩍 기문혜의 화를 돋우던 이가 먼저 말을 받았다.

    “잘된 일이지요! 기 언니가 작년, 재작년에 만난 의원들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데도 회임이 안 되었으니…… 또 아나요? 신이나 부처께 마음을 다해 정성으로 빌면 회임이 될지.

    우리 같은 여인네들은 그래도 자녀를 봐야죠. 못 낳으면 첩이라도 들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기분 나쁜 것은 차지하고라도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니 거리가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말을 마친 부인이 기문혜에게 물었다.

    “그런데 백모님께서 첩 이야기는 안 하시던가요? 기 언니, 시간이 없어요. 첩이 들어오기라도 하는 날엔 지금처럼 지내기도 어려울 거라고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이 하나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끼어들었다.

    “반씨 집안 며느님. 기 언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원씨 가문이 반씨 가문과 같은 줄 아세요? 물론 원 재상 어른께서는 아이가 없으면 첩실을 들여도 된다고 하시지만, 원씨 가문의 큰오라버니께서 아직 스물둘, 셋밖에 안 됐는데, 아직 한참 이른 소리죠.”

    면전에서 반박당한 반씨 부인의 표정이 나빠졌다.

    “다 언니를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잖아요! 아직 젊다고는 해도 한 해 한 해가 얼마나 빨리 가는 데요! 두 사람이 잘 맞았으면 이미 생기고도 남았지, 신혼에도 안 되는 회임이 늙어 빠져서 되겠어요?”

    이야기가 조금 선을 넘는 듯하지 듣고 있던 유 대부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식 역시 연이 닿아야 하네. 겸이네 부부에게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이겠지. 남은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우선 식사부터 하세. 지금 이야기를 다 해버리면 꽃놀이 때 할 이야기가 있겠는가?”

    웃음을 터트린 부인들이 식사를 시작했다.

    지서는 식사에 집중하는 지온을 향해 슬쩍 눈을 흘기며 내심 불평을 쏟았다.

    그녀가 이 주제를 고른 이유가 무엇이던가? 멀쩡한 관가의 소저인 지온이 가문 밖으로 뛰쳐나가 점쟁이 흉내를 내는 것을 흠잡으려 했던 게 아니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관심이 다른 부인에게 꽂혀서는……! 설마 지온, 저게 거짓말로 사기를 친 건 중요한 게 아니란 거야?’

    * * *

    식사 후, 기문혜가 다른 이들을 피해 지온을 불렀다.

    “저도 소문이 어떻게 퍼지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 때문에 괜히 같이 힘드시지요?”

    기문혜가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반씨 집안의 며느리는 원래도 저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소문에 더 부채질할 것이 걱정이에요.”

    기문혜는 몰랐어도 지온은 이렇게 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공자님의 덕이지. 내가 딱 원했던 결과이기도 하고…….’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부인. 거짓을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제가 한 말이 맞는걸요.”

    “하지만…….”

    기문혜가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제가 회임이 되지 않으면…….”

    “그럴 리가요? 화신첨까지 뽑으셨으니 분명 그렇게 될 거예요.”

    기문혜는 깜짝 놀랐다.

    사실 그녀는 자신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준 지온이 고마웠을 뿐, 지온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 소저는 여전히 가짜 점쟁이처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지온의 그런 모습에 기문혜의 마음이 식어갔다. 자신의 좋은 마음을 상대가 전혀 몰라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리 허언을 하다 다른 이가 꼬투리라도 잡으면 그야말로 꼬챙이에 꽂혀 달달 구워질 일이 아니던가? 자신이 어디 가서 아이를 만들어 온다는 말인가!

    ‘어쩜 내 곤란한 상황을 이렇게 몰라주실까?’

    그러나 지온은 기문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지온이 기문혜에게 물었다.

    “부인, 부인의 여동생과는 관계가 어떠신가요?”

    기문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문영이는 항상 친했습니다. 시집을 간 후에도 자주 만났지요.”

    “동생분께선 어느 댁으로 시집을 가셨는지……?”

    “광록시(*光祿寺: 관서명)에 전부(*典簿: 관직명)로 계신 조씨 집안입니다. 제부는 아직 과거를 준비하고 있고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문영이 시집간 곳은 원씨 집안과는 거리가 먼 작은 관리 집안이었다. 원씨 가문의 며느리인 기문혜와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기문영이 유씨 가문과 왕래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지온의 질문에 이상함을 느낀 기문혜가 물었다.

    “지 소저, 무슨 여유로 물으시는지요?”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동생분께서 회임에 좋지 않은 물건을 몸에 지니고 계신 듯합니다.”

    순간 멈칫했던 기문혜가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시집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부인, 기왕 집까지 나오셨으니 한 가지 더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앞으로 동생분이 무언가를 보내오시면, 그것이 먹는 것이든 입는 것이든 모두 받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생분과 친밀하시니,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으시겠지만, 부인께서도 제 동생이 절 어찌 대하는지 보셨겠지요? 자매란 말은 금처럼 귀한 말이기도 하지만, 때론 무엇보다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예를 갖춘 지온이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남은 기문혜는 멀어지는 지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혼사가 진행될 때나, 혼인하던 날도…….

    ‘그럴 리가……?’

    “언니!”

    기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린 기문혜의 눈에 웃으며 다가오는 기문영이 보였다.

    “언니, 지 소저가 언니 마음을 몰라주지? 내가 전부터 그랬잖아.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겠어? 언니를 속이는 거라니까? 다른 생각 할 것 없어. 얼른 형부랑 같이 시어머니에게 가서 빌어. 괜히 시어머니에게 밉보였다가 앞으로 어떻게 지내려고 그래?”

    * * *

    마차 한 대가 흔들흔들, 영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걷어 올려진 차창의 주렴 너머로 햇빛에 의지해 문서를 보는 이가 보였다.

    유신지를 모시는 시종이 마부 옆에 앉아 우적우적 건과일을 씹으며 마차 안에 앉은 이에게 말을 걸었다.

    “대공자님, 부인께서 눈 나빠진다고 이동할 땐 문서를 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건성으로 대답한 한 유신지가 다시 한 장을 넘겼다.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를 보며, 시종이 몰래 인상을 구겼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신지가 미간을 구기며 목을 문질렀다.

    도성에서 영산까지는 넓게 길이 닦여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마차는 흔들림이 있기 마련이었다.

    “대공자님, 잠시 쉴까요?”

    시종이 수낭(*水囊: 휴대용 물주머니)을 건네며 묻자 유신지는 결국 문서를 내려놓았다.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인 그가 눈을 감고 쉬기를 잠시, 조금 편해졌는지 다시 문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종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대공자님, 멀미할 걸 아시면서 왜 계속 보시는 겁니까? 그러다 토하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요?”

    “확인해야 할 사건들이 몇 건이나 쌓여있다. 문제가 있으면 빨리빨리 내려보내야 해서……. 지금이 아니면 늦는단 말이다.”

    “그런데도 거길 꼭 가셔야겠습니까?”

    시종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안 가신다면서요! 절대 안 가실 것처럼 극구 다짐하시던 걸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참!”

    말이 끝나자마자 시종의 머리로 수낭이 날아왔다. 시종이 돌아보니 모시는 대공자가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집에 시중들 아이는 많으니, 싫으면 말만 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되니…….”

    시종이 금세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대공자님은 농담도 잘하십니다! 집안에 시종이 아무리 많아도 저처럼 살뜰한 사람은 없습죠!”

    “허?”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린 유신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살뜰? 살뜰한 게 아니라 날 향해 살심을 품은 게 아니고? 보고도 못 본 척할 줄도 알아야지, 하여간 눈치가 저리 없어서야!’

    당장 마차 안으로 들어간 시종은 얼른 제 잘못을 상쇄할 예쁜 짓을 하기로 했다.

    “대공자님, 아니면 제가 문서를 읽어 드리면 어떨까요? 눈만 감고 생각만 하시면 되니 힘도 덜 들지 않으실까요?”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군.’

    유신지가 문서를 그에게 넘기더니 말했다.

    “천천히 읽어라.”

    “알겠습니다!”

    시종이 더듬거리며 문서를 읽는 사이 마차는 영산 산자락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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