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6)화 (66/385)
  • 66화. 올까, 안 올까

    “별일 아니라 지금은 괜찮소.”

    유모지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오느라 고생을 하여, 난 먼저 가보겠소. 그럼 소저도 가보시오.”

    그러고는 유모지는 꼭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을세라 재빨리 뒤로 돌아 달리듯이 멀어졌다.

    그 자리엔 지서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지서야!”

    제 어미의 음성을 들은 지서는 마음이 상한 듯이 울먹거렸다.

    “오늘 옷은 얼굴이 까맣게 보인다고 제가 싫다고 했잖아요, 어머니! 그게 아니면 공자님이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이러실 리가 없잖아요!”

    그러자 위씨 부인이 딸을 달랬다.

    “그런 소리 말거라. 얼마나 맵시있고 고상해 보이는데……. 공자가 예의를 차리느라 그런 것이야. 둘 다 아이가 아니잖느냐? 이리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데 문 앞에서 어찌 계속 이야기를 하겠느냐? 사람들이 다 오고 나면 또 말을 나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유씨 가문의 다른 부인들이 웃으며 다가오는 것을 본 위씨는 지서를 잡아끌고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이들이 보기 전에 얼른 표정을 풀어!”

    얼른 표정을 고친 지서가 다시 얼굴에 미소를 깔았다.

    “그래, 그래야지. 유씨 가문의 소저들과 같이 재미있게 놀아라. 대범해야 해!”

    “알겠어요, 어머니.”

    * * *

    장원에 도착한 아랫사람들은 물건들을 정리하러 흩어졌고, 지온은 그제야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먼저 장원에 온 이들은 유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유씨 가문의 차남가 부인은 집안일을 살피느라 도성에 남아있었고, 사남가 부인은 사노야의 관직 발령을 따라서 간 터라 이번에 온 사람들은 삼남가의 부인과 오남가의 부인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유씨 가문 친척 집안의 여가솔들이었는데,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온 참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지온도 아는 얼굴이었다.

    “선고께서 바로 지씨 가문의 큰 소저이셨군요?”

    원씨 집안의 어린 며느리인 기씨 부인이 웃으며 지온에게 인사를 해왔다.

    “전에는 알아보지 못하고 제가 결례를 하였습니다.”

    지온은 마주 인사를 했다.

    “저 역시 부인께서 원씨 가문의 며느님이신지도 모르고 점쟁이 노릇을 하였습니다. 부디 노여워하지 마세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기씨 부인의 따뜻하고 친근한 음성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때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셔서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지온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이가 말을 걸었다.

    “이분께서 조방궁의 그 선고님이세요? 전혀 그렇게 안 보여요. 관가의 소저도 궁관에서 수행을 할 수 있다니요!”

    그냥 듣기에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말이었다.

    신분이 좀 되는 여인들이 궁관에서 수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과부살이, 아니면 죄를 저질렀단 소리였다.

    여하튼 일반적으로 멀쩡한 관가의 소저가 궁관에서 오래 머물 일은 없었다.

    물론, 황가의 공주는 사정이 좀 달랐다. 혈통으로만 보아도 제국의 주인인 황실의 혈통이니 평생 혼인하지 않아도 뒷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진 사람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이, 그저 궁금한 듯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문영아!”

    기씨 부인이 그녀를 나무라며 슬쩍 눈을 흘기곤 지온에게 소개했다.

    “제 동생, 기문영(紀文英)입니다. 제 친정은 기씨(紀氏) 가문이지요. 저도 부인이라 하지 마시고, 문혜(文蕙)라 불러주세요.”

    그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동생은 기문혜와 생긴 것이 비슷했다. 시집을 간 여인의 머리 모양으로 보아 이미 시집을 간 부인인 듯했다.

    기문영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지온 소저.”

    지온 역시 담담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닙니다.”

    “지온 소저는 조방궁의 능운진인의 대제자셨어. 스승님의 상을 치르고 효를 다하려고 궁관에 계신 거야.”

    기문혜가 지온을 대신하여 해명했다.

    “아, 그래서 그러셨군요! 소저께서 참으로 효심이 깊으십니다.”

    그렇게 주제가 넘어갔다.

    한 시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마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했던 사람들은, 각자 얼굴만 보고 먼저 쉬러 들어갔다.

    그 사이 지온도 숙모인 위씨 부인과 지서를 만났는데, 양쪽 모두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지라 서로 한껏 예의를 갖춰 말을 나누곤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지온의 거처는 태사 부인의 거처와 무척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창밖으로 지온의 거처를 바라보던 태사 부인이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 늙은 유모에게 물었다.

    “자네 눈엔 지온 소저가 어때 보이던가?”

    늙은 유모가 웃음을 지었다.

    “얼굴도 좋고, 기개도 훌륭한 것이, 규수(閨秀)란 말에 걸맞은 아가씨입니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태사 부인이었지만, 그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내 이제 알겠어. 전에 지온 소저를 두고 예의도 모르는 무도한 사람이라 했던 말은 아마 열에 여덟은 위씨 부인이 만들어낸 말이었을 것이네.”

    태사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지온 소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 직접 보고 싶어 몰래 조방궁에 다녀온 적이 있었네. 그때는 확실히 조금 문제가 있어 보였지.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가문 밖에서 자라 예를 배우지 못했을 테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 겨우 몇 달 만에 이리 훌륭하게 교육이 되기도 했고.”

    맞장구를 치는 늙은 유모가 웃음을 지었다.

    “혼약을 물린 것은 내 후회하지 않아. 둘째는 덜렁이라,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집안 좋은 배필을 찾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네. 하지만, 큰아들이라면…….”

    태사 부인은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것인지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게 지금 뭐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싫어서 밀어낼 땐 언제고, 다시 좋다며 불러내고 말일세.”

    “그것이 어미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늙은 유모가 말했다.

    “자식을 위해선 제 체면이 깎여도 그리 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닐 말인가.”

    자신의 심복인 늙은 유모에게 태사 부인은 숨김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마음이 좋은 것만은 아니네. 사람은 흠잡을 것이 없다지만, 지씨 집안은 참으로…….”

    제 아들에게 명문가 규수를 맞이하게 해 주고픈 것이 어미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태사 부인이 보기에 지씨 집안은 유씨 가문보다 격이 낮은 가문이었다.

    “지씨 가문의 어르신께서 너무 빨리 가셨지요.”

    늙은 유모가 한탄했다.

    “그래도 어르신께서 버티고 계실 적엔 지씨 가문도 가풍이 맑고 바른, 좋은 집안이지 않았는지요. 능력도 출중하셨던 분께서 너무 이르게 가버리셨습니다. 두 집안이 움직이는 것이 혼사가 아니겠습니까? 부인께서 생각이 많아지실 수밖에 없지요.”

    “내 말이 그 말일세. 마음이 움직인 것이 둘째였으면 내,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네. 하필 그것이 큰아이가 아닌가. 물러설 생각이 없는 아이에게 내가 어찌 다른 이를 붙여줘.”

    큰아들을 생각하자 태사 부인은 잔소리가 절로 나왔다.

    “자네도 그 아이가 얼마나 내게 귀한 아들인지 알지 않은가! 능력이라도 없으면 모를까, 어려서부터 못 하는 것이 없어 내 다른 일로 마음을 한 번 졸여 본 일이 없던 아이였네.

    내 슬하에 아들이라고는 둘 뿐인데, 늘 둘째를 두고 마음을 끓였네만, 결국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큰 녀석일 줄을 알았겠는가? 나이나 적은가! 다른 집은 벌써 손주를 몇이나 봤는데, 난 내 며느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 줄도 모르고 있다니!”

    그때 발을 들추며 들어오던 시중시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인, 지금 그 이야기를 다른 이들이 들었으면 열에 여덟은 부인께서 자랑한다 생각할 것입니다. 똑똑하고 능력도 출중하신 대공자님이 아니신지요? 혼인이 조금 늦어지고 있을 뿐이지, 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눈이 높으신 것이지요.”

    태사 부인이 비아냥거렸다.

    “눈이 그리 높아서 제 아우와 틀어진 여인을 눈에 담아?”

    시중시녀는 그래도 한마디를 보탰다.

    “그리 말씀하시기에는 아직 이르지요. 대공자님께서 그분을 마음에 두셨는지 아직 모르지 않으십니까?”

    “그 아이가 언제 다른 여인과 함께 나간 일이 있었느냐? 거기다 듣자니 지난번 조방궁에선 함께 차도 마셨다더구나. 큰 아이가 지온 소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고 둘째가 그러지 않았어? 내 지금까지 그 아이가 칭찬했던 여인을 본 적이 없음이야!”

    태사 부인과 시녀의 입씨름을 듣던 늙은 유모가 웃음을 지었다.

    “부인, 아까까지만 해도 지온 소저가 탐탁지 않은 듯하시더니, 어찌 말씀하시는 것이 또 두 분을 이루어주고 싶으신 듯 보입니다.”

    “…….”

    침묵하던 태사 부인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큰 아이가 조바심 나게 하지 않는가!”

    한바탕 답답함을 쏟고 난 그녀는 머리칼을 정리하며, 태사 부인의 위용을 되찾았다.

    그녀가 물었다.

    “지씨 가문의 차남가 사람들도 잘 들어갔겠지? 둘째에게 들러붙지 못하게 잘 살피거라.”

    대답한 시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부인. 제가 잘 처리 해두었습니다.”

    “큰아이 쪽은? 말을 전해두었느냐?”

    “남겨 두었으니 퇴근하시면 금방 소식을 받으실 것입니다.”

    늙은 유모가 웃으며 말했다.

    “대공자께서 이곳에 오신다면, 부인께서도 대공자님의 속내를 짐작하실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태사 부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큰아들이 별생각이 없다면 소식을 들어도 이곳으로 찾아오지 않을 테니, 그녀 역시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런데 워낙 속내가 복잡한 아이라 일부러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 * *

    태사 부인이 생각한 것보다 유신지는 소식을 더 빨리 받았다.

    마침 그가 사건 문서 하나를 집에 두고 온 바람에 시종을 시켜 가져오라 했는데, 그편에 시종이 태사 부인이 남긴 전갈도 함께 가지고 왔던 것이다.

    돌아와 소식을 전한 시종은 곧 제가 모시는 대공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큰일이로구나!”

    어리둥절한 시종이 물었다.

    “대공자님, 뭐가 큰일입니까?”

    유신지가 방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내가 조방궁에 다녀온 것을 아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일부러 확인해보려 지온 소저를 데리고 영산으로 꽃놀이를 가신 게야!”

    시종은 멍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대공자님, 너무 가신 것 아닙니까?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와 둘째 공자님과의 혼사가 어그러진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대공자님이 아가씨를 마음에 두었는지 확인하신다고요? 그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넌 오매불망 며느리를 보고파 하는 어미의 마음을 몰라서 그런 소릴 하는 것이다!”

    유신지가 착잡한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는 내게 정혼 이야기를 꺼낼 수만 있다면, 뻔뻔해지는 것도 개의치 않으실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비웃건, 내 앞에선 득의양양하실 것이야.”

    “…….”

    침묵하던 시종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모자지간에 힘겨루기할 만한 일인가? 이해할 수가 없네.’

    “이를 어쩐다! 지금 빨리 출발하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아니지, 아니지, 내가 찾아갔다간 어머니가 내 마음을 꿰뚫었다고 이실직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아니, 아니지! 내가 무슨 마음이 있다고! 그래, 내가 올바르면 남들의 중상모략 따윈 두려울 게 없지!”

    시종은 제가 모시는 대공자가 방을 이리저리 빙빙 돌며 혼잣말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가지 않았다가 어머니께서 진짜 내 속내를 알아버리기라도 하면? 지온 소저가 워낙…….”

    그러다 입을 다문 유신지는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유신지가 결론을 내놓지 못하자, 시종이 물었다.

    “대공자님, 그래서 저희 가는 겁니까?”

    “안 간다.”

    유신지가 사건 문서를 펴며 열심히 일하려는 자세를 취하고는 중얼거렸다.

    “제가 우스워지는 모습이 보고 싶으신 모양인데, 꿈 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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