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어째서 또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이오!?
봄벌레가 우는 깊은 밤이었다.
무척 피곤한 의운이었지만, 다른 침상에 누운 이가 워낙 뒤척이는 통에 의운도 잠에서 깨고 말았다.
“늦은 밤에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의운의 짜증에 갑갑함을 참지 못한 하로가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아가씨랑 루 대인이랑…… 넌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뭐가?”
한참을 고심하며 단어를 고르던 하로가 결국 상황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뱉었다.
“통정(*通情: 남녀가 정을 통함)하시는 것 같아…….”
침묵이 흐르길 잠시, 의운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외쳤다.
“엄마야!”
잠은 확실하게 달아났다.
“하로, 너 그런 소린 하지도 마! 아가씨가 혼약을 물리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거기다 지금 조방궁에서 스승님의 상을 치르며 효를 다하고 계시는데, 괜히 이상한 말이라도 퍼졌다간 진짜 끝이야!”
하로가 대꾸했다.
“내가 밖에다 이런 소문을 낼 사람이야?”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하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통정이 딱 맞는 말은 아닌데, 정확한 단어를 못 찾겠어.”
한참을 끙끙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아가씨가 루 대인이랑 어떻게 알게 되신 건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우리더러 일이 생기면 가서 그분을 찾으라고 할 만큼 믿고 계신 것도 그렇고…….”
시녀 셋 중, 지온의 시중 시녀였던 서아만 지온을 따라다니며 루안을 여러 번 만났었다.
하로와 의운은 며칠 전 사방전에서 루안을 보게 되었을 때, 지온이 유독 그를 가깝게 대한다고 느꼈었다.
“전에 아가씨가 취태평에서 루 대인이 심문하는 것을 보았다고 서아가 그랬잖아. 그리고 청명절 때 화옥이 못된 수작질을 할 때 다행히 루 대인이 도와주셨고…….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믿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던 의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나였어도 대인을 아주 신뢰할 것 같은데?”
“그게 그렇긴 한데, 그게…….”
잠시 망설이던 하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아가씨가 루 대인을 단순히 신뢰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아서 그래.”
“그것도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목숨을 구해줬잖아!”
의문의 말에 하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휴, 근데 루 대인이 좋은 상대가 아니잖아! 루 대인에 대한 소문 좀 생각해봐.”
그러자 의운이 하품을 하며 돌려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해. 아가씨가 생각이 없으실까 봐? 그리고 아가씨가 진짜 마음이 있으신 거면, 우리가 말릴 수나 있어?”
“…….”
잠시 침묵하던 하로가 대답했다.
“하긴 그렇지.”
“잠이나 자자.”
의운이 다시 몸을 침상에 눕히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이번에 영산에 가니까 내가 아가씨를 잘 살펴볼게. 유 대부인께 좋은 혼처 좀 알아봐달라며 아양 좀 떨라고, 아가씨 옆구리도 찔러보지 뭐…….”
말을 잇던 의운이 다시 잠이 들자, 가만히 앉아있던 하로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사실 오늘 아가씨와 유씨 가문의 대공자가 참 잘 어울렸었다. 그러나 유씨 가문이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니……. 둘째 공자도 안 되는 마당에, 대공자가 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전엔 유 대부인이 우리 아가씨의 성품을 오해해서 그랬던 거잖아. 이번에 우리 아가씨가 아주 좋은 소저라는 걸 알게 된다면…….’
하로는 의운에게, 아가씨가 유 대부인의 마음에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두기로 마음먹었다.
* * *
이른 아침, 유씨 가문의 마차가 조방궁 앞에 서 있었다.
유 대부인이 어찌나 자주 창밖을 살피던지, 그녀의 시중시녀마저 흘끔거릴 정도였다.
‘입궁하여 태후를 뵐 때도 늘 침착하던 부인께서, 지씨 가문의 아가씨를 기다리며 왜 이렇게 긴장하시지?’
지온은 유 대부인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마차가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금방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지온은 여전히 소박하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조방궁의 도복과 비슷한 색의 맑은 담청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소녀의 낭창한 몸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분위기와 수행하는 이다운 탈속한 분위기가 동시에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지온의 칠흑처럼 검게 빛나는 머리카락, 설원의 눈처럼 하얀 피부는, 한 번만 봐도 보는 이의 가슴에 선명하게 박힐 만큼 강렬한 대비를 이뤘다.
지온을 보며 유 대부인은 큰아들의 말을 떠올렸다.
‘소자는 선녀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그래, 저 정도면 정말 선녀라 할 만하지 않은가?’
얼른 감정을 추스른 유 대부인이 주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미소를 지었다.
“지온 소저, 이쪽일세.”
예를 갖춘 지온이 유씨 가문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유 대부인을 뵙습니다.”
유 대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재미없겠지만, 소저는 나와 함께 앉으면 어떻겠나?”
지온 역시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바라마지 않습니다.”
유씨 가문의 마차가 워낙 넓고 커, 두 사람뿐 아니라 시중을 들 시녀 한 명까지 함께 탔다. 나머지 사람들은 서아, 의운과 함께 뒤에 있는 마차로 향했다.
지온은 유 대부인이 뭘 하려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마, 진짜 내가 먼저 혼인을 물린 것 때문에 고마워서 날 도와주려는 건가?’
그러나 자신은 아직 상을 치르며 효를 다하고 있지 않던가?
‘내년에 도와줘도 늦지 않을 텐데?’
유 대부인은 일상 이야기들을 하는 틈틈이 지온에게 조방궁 생활은 어떠하냐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도성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지온은 유 대부인이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거기다 어찌나 붙임성도 좋은지 몰랐다.
‘유씨 가문엔 사교성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에게 왜 이리 마음을 써준단 말인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 * *
도성 밖 역사에 도착하자 유 대부인의 마차가 멈췄다.
길가에는 이미 커다란 마차 여러 대가 서 있었다. 사람이 타는 마차도 있었고 물건을 옮기는 용도의 마차도 있었다.
서 있는 마차들 중 절반에 유씨 가문의 표식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다른 마차들은 유씨 가문에 속한 다른 부인들의 마차인 듯했다.
‘다른 마차 두 대도 눈에 익은데…….’
한 마차에서 밖을 살피는 지서를 발견한 지온이 다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유 대부인이 지온을 의식한 듯 입을 열었다.
“자네가 아직 어리니, 다른 곳에 데리고 가려면 그래도 자네 가문에 말은 해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씨 가문과 연을 맺을 수 없다 해도 좋은 구실이 생겼는데, 그걸 가만두고 볼 지온의 큰 숙모 위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 대부인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지온과 차남가의 관계를 모를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걸 지금에서야 이야기하다니, 별생각이 없었던 건가? 아니면 고의?’
지온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숙모님과 지서가 있으면 저도 더 편할 것입니다.”
유 대부인이 웃으며 지온의 손을 토닥거렸다.
그때 총관이 찾아왔다.
“부인, 출발할까요?”
유 대부인이 대답했다.
“가세나. 일찍 출발하는 게 좀 더 시원할 게야.”
“네, 부인.”
도성의 왼쪽에 자리한 영산은, 도성의 외곽을 벗어나 반 시진을 더 달리면 도착할 수 있었다.
* * *
사시(巳時) 정각.
마차는 영산에 도착해 움직이고 있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풀과 나무향이 기분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시녀에게 마차 창을 가린 주렴을 걷어 올리라고 시킨 유 대부인이 지온에게 말을 걸었다.
“올해 영산의 복사꽃이 유달리 흐드러져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네. 시회(詩會)가 연이어 열리는 통에 필묵(筆墨) 값이 다 뛰었다는구먼.”
지온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지었다.
“일찍 말씀을 해주시지요. 미리 알았으면 연지 값이라도 벌 겸, 필묵이라도 챙겨 와 팔 것을 그랬습니다.”
웃음을 터트린 유 대부인이 지온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내 이곳에 개인 점포가 있네. 며칠 전, 총관에게 필묵과 먹을 것을 많이 가져다 놓으라 했으니 연지값은 이미 벌었을 것이네.”
이야기하는 사이 마차는 산 아래 시장을 지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시장은 역시나 무척 활기차 보였다.
왁자지껄한 소리는 곧 멀어졌다. 이윽고 유 대부인의 마차가 한 장원 앞에서 멈추었다.
곧 뒤쪽에서 준수한 청년이 말을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이 마차의 문을 열며 말했다.
“어머니, 오시는 길이 많이 울퉁불퉁했을 텐데, 멀미는 안 하셨습니……?”
마지막 말을 꿀떡, 목으로 넘긴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청년은 꼭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또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이오?”
그가 뻗은 손을 흘낏 바라본 지온이 다른 쪽 문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몸을 낮추며 인사했다.
“둘째 공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모지의 손을 단박에 치운 유 대부인이 지온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곤, 작은아들을 향해 가볍게 한소리 했다.
“예의를 지켜야지! 손님을 대하는 법을 잊은 것이냐?”
풀 죽은 유모지가 중얼거렸다.
“어머니, 설마 어머니께서 저 사람을 초대하신 건 아니시지요?”
“저 사람이라니! 뭘 하고 섰어! 인사를 받아 놓고 어찌 멀뚱멀뚱하게만 있고 답례를 안 해!”
“…….”
기가 팍 죽은 유모지가 돌아서 지온에게 예를 갖췄다.
“지온 소저를 뵙습니다.”
유모지는 계속 캐물을 생각이었으나, 그에게서 신경을 꺼버린 유 대부인은 총관에게 이런저런 보고를 받으며 장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온은 그를 스쳐 지나가며 유모지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앞으로 뵐 기회는 많을 거예요.”
그러고는 유 대부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간 정신을 놓고 멍하게 있던 유모지는. 등을 돌려 장원으로 들어가는 지온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제대로 이야길 하고 가시오!”
앞으로 볼 기회가 많다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미 두 집안의 혼약을 물렀는데 기회는 무슨 기회? 설마 어머니께서 혼약이 없어진 것을 후회하시는 건 아니겠지?’
설마하는 생각이 든 유모지는 오소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집안에서 자신을 정혼시킬 때도 어른들은 자신에게 의사를 묻지 않았고, 혼약을 물릴 때 역시 유모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바로 혼인하고 싶진 않았으니, 물리려면 마음대로 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얼마 전 조방궁에서 지온 소저를 본 후, 그제야 깨닫지 않았던가!
‘여인이 어찌나 입심이 좋은지,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자신의 형님은 그녀보다 더 좋은 여인을 다시 맞이하긴 어려울 것이라 했었다.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저런 여자는 내가 무서워서 싫다고!’
여인이란 자고로 사근사근 말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지, 저 여자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잖아!’
지 소저의 연기는 뛰어나도 너무 뛰어났다.
‘아니면, 부끄러움이라도 타던가!’
“둘째 공자님…….”
그때, 곧바로 수줍어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막 안정을 찾았던 유모지는 소름이 다시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마마저 시큰거리는 느낌이었다.
유모지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분홍색 상의에 파란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한껏 부끄러운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침묵하던 유모지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지서 소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전엔 지서 소저도 싫지 않았는데…….’
도성의 소저들 대부분이 다들 이렇지 않던가?
‘그런데 왜 보기만 해도 좀…….’
그가 대답하자 지서가 신이 나 물었다.
“공자님, 잘 지내셨는지요? 지난번에 아버님께 심하게 혼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소녀 한참이나 걱정했습니다. 남녀가 유별하여 가서 뵙지도 못하고…….”
유모지의 얼굴이 당장에 굳었다.
‘꼭 이야길 해도 그 이야기를……!’
얼마 전 그는 학업도 소홀하고 그저 밖으로 나가 놀 궁리만 한다며 아버지께 된통 혼났었다.
그 일로 이미 매우 부끄러워했었는데, 대체 왜,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낸단 말인가?
‘일부러 날 곤란하게 하려고 이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