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4)화 (64/385)
  • 64화. 다른 생각

    ‘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유신지는 정색하며 그녀를 놀려볼까 했지만 차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오늘 대공자님이 오신 이유가 그것을 물어보러 오신 것이었나요?”

    지온의 물음에 유신지가 드디어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 빠르게 대꾸했다.

    “그 일은 그저 생각이 나서 이야기한 것뿐이고 중요한 건 역시 소저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난번에 그리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으니 이 정도면 우리는 친우라 해도 되지 않을까요?”

    지온이 그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그리고 곧장 말을 이었다.

    “친우가 된 김에 그럼 공자님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유신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요?”

    “구자부 일을 소문 내주실 수 있을까요?”

    지온이 말했다.

    “후사를 본 후에 일이 알려져도 명성이야 높아지겠지만, 반전의 기쁨까진 누릴 수 없을 테니까요.”

    아, 하는 감탄사를 뱉은 유신지는 그제야 깨달았다.

    “소저는 이름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까?”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께서 어떻게 소문을 내시든지 상관없습니다. 웃음거리 삼아 이야기를 하셔도 상관없고요. 다만 한 달 안에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만 해주세요.”

    “그러겠소.”

    “아, 원 공자께서 거처는 옮기기로 하셨나요?”

    “옮겼습니다. 집안에 난리가 한 번 나긴 했지만, 내년에 회시가 있어 외외종조부께서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집안의 독자가 나가서 사는 일이 흔하겠는가? 다만 이유가 워낙 타당하다 보니 일 년의 시간을 벌 수 있었을 뿐이었다.

    ‘운이 좋으면 1년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

    지온은 자신이 운이 좋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죽었던 사람이 이렇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늘은 분명 내 편이야.’

    “지금 사는 곳은 어디인가요? 괜찮으시면 제게 주소를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유신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구자부 하나만은 아니로군요?”

    웃음을 지었을 뿐, 지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하늘이 흐린 것이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비림에서 나온 유신지는 그대로 돌아갔다.

    그가 오늘 조방궁을 찾은 이유는 그녀도 보고, 궁금증도 풀기 위해서였다.

    호기심이 유독 강했던 유씨 가문의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 답을 찾지 못하면 가슴이 근질거려 참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궁금증도 풀렸겠다, 그가 만족스럽게 돌아가던 중 역시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태사부로 돌아간 유신지가 막 옷을 갈아입고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유 대부인이 그를 찾아왔다.

    “귀한 휴무일에 새벽같이 나가더니 이제 온 것이야? 설마 이 어미를 피하는 것이냐?”

    유 대부인이 웃으며 물었다.

    유씨 집안, 장남가의 두 아들은 모두 제 어미를 닮았다. 유신지는 특히 말없이 미소를 짓는 얼굴이 유 대부인과 찍어 놓은 듯 닮아 있었다.

    “그럴 리가요, 어머니.”

    유신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인 듯 일어나, 어머니께 자리를 내어드리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모셨다.

    다른 집안에선 둘째가 부모님께 아양을 떤다지만, 유씨 가문의 장남가는 둘째가 다소 맹한 구석이 있어 오히려 첫째가 사탕발림이나 아양을 잘 떨었다.

    “어머니,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집안일은 이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셋째, 다섯째 숙모께서 다들 한가하시니 숙모님들께 하라고 하시고 어머니께서는 가운데 앉으셔서 명령만 내리세요.”

    슬쩍 그를 꼬집은 유 대부인이 피식 웃었다.

    “말 돌릴 생각 하지 말아라! 어미가 나가 선이라도 보라고 할까 싶어 그리 새벽부터 나간 것이 아니냐?”

    그 말에 유신지가 의자를 끌어 그녀 옆에 앉더니 울상을 지었다.

    “어머니, 제발 절 놔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놔주다니? 네가 지금 몇 살인지는 아는 게야?”

    그의 이마를 콩, 쥐어박은 유 대부인이 어림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사만 물리지 않았다면, 둘째가 내년에 혼인했을 것이다. 넌 둘째보다 네 살이나 많지 않으냐!”

    유모지가 물린 혼사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동생의 전 약혼녀를 떠올린 유신지는 어쩐지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어미가 이야기를 하는데,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이야!”

    유 대부인이 그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고 왔다.

    “둘째의 혼처도 다시 찾아야 하니, 장유유서(長幼有序)라고 네가 먼저 가야 하지 않겠느냐. 전에는 학업에 전념해야 하니 과거에 합격하고 이야기하자더니, 벌써 네가 관직에 들어선 지 몇 년이나 지나지 않았어? 나이가 벌써 몇인데 아직 장가도 안 가고, 남들이 보면 네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줄 알지!”

    유신지는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제게 문제가 있을 게 뭐란 말입니까? 루 낭중은 저보다 한 살 더 먹었어도 아무도 그런 이야길 안 하지 않습니까, 어머니?”

    “루 낭중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아라!”

    유 대부인이 엄하게 말했다.

    “네가 그 사람 주변을 기웃거린다며, 그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네?! 대체 누가 그딴 소리를 한 것입니까! 완전히 헛소문입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유신지가 제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남색을 할 사람으로 보인단 말입니까?!”

    “아닌 것이야?”

    유 대부인이 슬쩍 시종에게 눈짓해 차를 내오라며 시종을 내보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 둘 다 나이로만 보자면 자식들도 몇이나 보았을 나이다. 그런데 혼인에 대해선 조금도 생각이 없지 않으냐? 주변에 여인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 않아?

    어여쁜 친우는 고사하고 시녀조차 마다하니, 유 추승(*推丞: 대리시 관직명) 대인, 사건을 살피듯이 보세요. 아주 의심스럽지 않으십니까?”

    유신지가 코를 긁적였다.

    “조금 그런 것도 같고…….”

    “루 낭중이야 이해할 만한 하지. 집안과 연이 끊어졌으니, 그를 위해 혼처를 알아봐 줄 어른이 없지 않으냐. 더구나 출신이 있으니 눈도 낮지 않을 텐데, 하필 본인이 워낙 곤란한 상황이니 적당한 혼처를 찾기가 얼마나 어렵겠느냐?

    그러니 이렇게 미뤄지는 것도 이해할 만하지. 넌 어떠하냐? 집안도 좋고 어린 나이에 급제하여 관직도 얻었는데 풍류조차 즐기지 않으니, 평범한 사내가 어디 그러더냐? 다른 사람들만 널 의심하는 줄 아느냐? 이 어미도 의심스럽다!”

    “어머니!”

    유신지가 말했다.

    “풍류를 즐기지 않는 것은 저희 집안 전통이 아닙니까. 아버지 역시 몸도 마음도 오직 어머니 한 분뿐이시라 다른 여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으시는 것을요!”

    유신지에 말에 한 방 맞았지만, 유 대부인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무라듯 그를 뚝 하고 때린 유 대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 돌리지 말고. 여하튼 이상한 말로 화제 돌릴 생각하지 말아라. 계속 그러면 네게 묻지 않고 정혼 시켜 버릴게야!”

    유신지는 읍소하듯 매달렸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으니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혼인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눈에 드는 이가 없는 것을 어찌합니까? 어머니께서도 제가 좋아하지도 않는 여인과 혼인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으십니까?”

    유 대부인이 대꾸했다.

    “어찌 마음에 드는 이가 하나도 없어? 어미가 찾은 소저들은 이 도성에서 가장 좋은 규수들이다. 외모며 학식, 성품까지 뭐 하나 부족한 이가 없는데 눈에 드는 이가 없다니, 선녀라도 맞이하고 싶은 것이야?”

    “맞습니다, 어머니!”

    유신지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대답했다.

    “소자는 선녀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외모와 학식은 무조건이지만,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성격은 저는 재미없어 싫습니다.”

    유 대부인이 참지 못하고 그의 이마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헛소리!”

    * * *

    유 대부인이 이사청(理事廳)에 돌아오자 유신지를 따라나섰던 마부가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의자에 앉으며 덤덤하게 물었다.

    “대공자가 어디를 갔었느냐?”

    마부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고했다.

    “네, 부인. 공자께선 조방궁에 향을 올리러 다녀오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유 대부인은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유신지는 주기적으로 조방궁이나 광명사로 향을 올리러 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부의 이어지는 말에 그녀는 순간 찻잔을 놓칠 뻔했다.

    “대공자께서는 지씨 가문의 소저와 함께 비림에 가셨습니다. 두 분께서는 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는 듯했고, 한 시진 정도 계시다 나오셨습니다.”

    유 대부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씨 가문의 소저라니? 어디의 지씨 가문을 말하는 것이냐? 소저 누구?”

    마부의 머리가 더욱 아래로 조아려졌다.

    “그것이…… 둘째 공자님과 정혼을 하셨던 그분이십니다.”

    만사불여(萬事不如)튼튼이라 했으니, 지온은 시간을 내어 원씨 가문의 어린 며느리를 한 번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이기 전에 누군가 지온에게 연락을 해왔다.

    “내게 전갈이 왔다고?”

    “네!” 

    서아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유씨 가문에서 아가씨를 손님으로 초대하고 싶대요!”

    “그런데 내가 아직 돌아가신 스승님의 죽음을 기리는 중이라 가기 어렵지 않을까?”

    “연회가 아니라고 유씨 가문에서 특별히 말했어요. 유씨 집안 영산에 장원이 한 채 있는데, 지금이 마침 꽃이 피는 시기라 아이들과 부인 몇 분만 며칠 꽃 나들이를 가신데요. 그 자리에 가까운 지인 몇 분을 초대하신 거고요. 봄나들이긴 한데, 아가씨는 집안끼리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지온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럼 거절하기도 힘드네.”

    서아가 답답한 듯 말했다.

    “왜 거절하려고 그러세요? 지금 아가씨 상황이 거절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이부인은 아가씨 혼사를 위해 절대 나설 분이 아니시고, 삼부인은 본인 일 보시는 것도 힘에 부치시잖아요.

    대부인께서는 아가씨께 잘 해주시지만 뒷배가 없으시고요. 이런 상황에 유씨 집안에서 잘 이끌어 주면 아가씨껜 정말 좋은 일이죠!”

    “맞아요!”

    하로가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다.

    “아가씨는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출중하셔서 뭐든 잘하시지만, 그래도 그걸 다른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소리 듣기 좋네!”

    의운도 끼어들었다.

    “그것뿐이게? 우리 아가씨, 문무(文武)도 일절이시잖아요! 활도 빠르고, 정확하게 잘 쏘시지, 기예도 얼마나 뛰어나세요? 금기서화(琴棋書畵)에 정통한 건 기본이요, 조향에 의술에 약도 만드시고 관상도 보시잖아요! 우리 아가씨보다 더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지온은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역시 의운이 아첨을 가장 잘 떨었다.

    “알겠어, 가면 되잖아.”

    지온이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한 사람은 집을 지키고, 두 사람은 나와 함께 가자.”

    세 사람 모두 적극적으로 가고픈 마음을 드러냈지만, 결국 하로가 한발 양보하여 소원에 남기로 했다.

    소식을 들은 청옥과 함옥은 다소 불안해하며 당황했다.

    “사저, 얼마나 있다 오세요? 사방전은 어쩌고요?”

    “아녀자들이 집을 오래 떠나있을 수 없을 테니까, 길어봐야 3일에서 5일 정도일 거예요.”

    지온이 두 사람을 흘긋 쳐다보았다.

    “사방전은 이미 두 사람이 충분히 잘 관리하고 있으니까, 내가 없는 게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지온은 웃으며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전에 괴롭힘당하던 것에 익숙해져서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뿐이에요.”

    청옥이 우물쭈물 말했다.

    “사저…… 사저가 없을 때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무서워하지 마요.”

    지온이 표정을 굳혔다.

    “두 사람은 진인의 문하(門下)로, 전(殿)의 장(掌)을 맡고 있어요. 그러니 기억하세요. 사매들의 사저는 나뿐이고, 그러니까 사매들을 통솔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에요.”

    지온의 말을 몇 번 읊조린 청옥이 그제야 용기가 생기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사저!”

    지온은 하로에게 지시한 뒤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혹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향환을 챙겨서 형부 관아에 가져가. 그리고 태평사 사람에게 가져다 줘.”

    하로가 복잡한 눈빛으로 지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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