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3)화 (63/385)

63화. 훨씬 유용한 얼굴

루안의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안 그래도 그녀의 자주 오란 말이 꼭 기방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방탕한 공자에게 하는 말로 들려, 대체 자신을 뭐로 보는 것인지 고민을 하던 차였다.

그런데 인제 보니 평가가 너무 후했던 것이다.

‘방탕한 공자? 내가 몸 파는 이로구먼! 아니지, 몸을 파는 게 아니라 얼굴을 파는 것이겠지. 내 다시는 그 여자의 돈을 받으면 안 되겠어.’

그러나 이상했다.

돈을 주는 것은 분명 본인에게 손해인 것이 분명한데, 왜 그리 자신이 이득을 본 듯 행동한단 말인가?

“아니, 이런 우연이 있나! 루 형 아니시오!”

그때, 들려오는 은근한 목소리에 루안은 안 그래도 답답했던 가슴이 더욱 빡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성큼성큼 루안에게 다가온 유신지가 웃으며 물었다.

“향을 올리러 온 거요? 루 형도 참 세월 좋소!”

루안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긴 왜 왔지?”

그러자 놀란 토끼 눈이 된 유신지가 대답했다.

“당연히 향을 올리러 온 것이네만! 난 매월 조방궁에 왔었소. 우리 쪽 일을 하는 이들이야 늘 불운을 달고 살지 않소? 그래서 심신의 평안을 위해 참배하러 오는 것이지.”

미소를 지은 유신지가 말을 이었다.

“전엔 루 형이 이런 것들은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아 난 이런 것들은 무시한다 생각했는데, 요즘 생각이 좀 바뀌었나 보군?”

그의 대답에 루안이 긴장을 풀었다.

하긴, 이곳을 찾지 않던 이는 자신이 아니던가? 늘 오던 이가 유신지였으니, 오히려 그가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해야 맞았다.

“참배 끝내고 돌아가는 중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잘 가시오! 다음에 또 봅시다.”

예상 밖에도 바로 루안에게 작별을 고한 유신지는 뜰을 지나 사방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한등은 기다리는 데도 여전히 루안이 움직일 생각을 않자 물었다.

“공자님, 저희 안 돌아갑니까?”

루안은 사방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다시 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고, 다시 갈 핑계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야지.”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한 루안은 천천히 조방궁을 나섰다.

* * *

마침 돌아가려던 지온의 귀로 웃음기 가득한 음성이 들려왔다.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뒤를 돌아보니 유신지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씨 가문의 대공자님이시로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향을 올리러 오셨는지요?”

“향도 올릴 겸, 지 소저도 뵙고 싶어 왔지요.”

어찌나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는지, 꼭 평범한 일상이야기를 하는 듯한 말투였다.

지온 역시 평소처럼 함옥에게 말했다.

“향촉을 가져다주세요.”

향을 올린 유신지가 향탁 위에 있는 첨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서 화신점을 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화신첨은 달에 한 명만 뽑을 수가 있습니다. 이달은 이미 다른 분께서 뽑으셨으니, 원하는 것이 있으시거든 다음 달에 다시 오시지요.”

그 말에 함옥이 속으로 생각했다.

‘방금까지 무조건 화신첨을 뽑게 하려던 분이 누구시더라?’

다행히 그 사실을 모르는 유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규율은 저도 이미 듣긴 했습니다. 그래도 뒤로 어찌해볼 수 있을까 했는데, 역시 지 소저께선 원칙을 준수하시는 분이시군요.”

지온은 그저 웃음을 지었지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함옥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까뒤집을 뻔했다.

‘원칙이라니, 설마요……. 그냥 공자가 원칙을 깰 정도로 중한 분이 아니라 그래요.’

유신지가 다시 물었다.

“화신점도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지 소저, 혹시 제 다른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말씀해 보세요.”

“제가 비림(碑林)을 보고 싶은데, 오늘은 비림(碑林)이 개방하는 날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지온이 말했다.

“그건 비림의 장사께서 제 체면을 봐주실지에 달린 것 같네요.”

유신지가 웃음을 지었다.

“그럼 지 소저, 저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지온은 통쾌하게 응했다.

떠나기 전에 지온을 붙든 서아가 작게 말렸다.

“…아가씨. 저분은 유씨 가문의 대공자님이신데 같이 계시면 다른 이들이 안 좋게 보지 않을까요?”

“공자도 직접 찾아왔잖아. 나도 다른 사람 눈 생각할 필요 없지.”

그대로 지온은 햇빛을 가리는 너울을 쓰고 사방전을 나섰다.

* * *

가는 길에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비림에 도착하자 입구를 지키던 선고가 다가왔다. 유신지는 시종과 함께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비림의 장사는 능양진인의 사람으로, 지온이 사방전을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비림까지 밀려난 사람이었다. 제자의 보고를 받은 그녀는 적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지온을 훑어 내리긴 했지만, 뒤에 선 유신지를 보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고가 다가와 문을 열자, 유신지가 감사를 표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를 따르던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대공자님의 얼굴이 제 이름보다 훨씬 유용하네요?”

유신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은 비림에 오고 싶다는 것은 모두 핑계고 사실은 지 소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보았다고 해야 맞았다.

유신지가 눈짓을 보내자 시종의 발걸음이 느려지더니 서아를 붙잡았다.

그들과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유신지는, 마치 비석의 필체를 감상하려는 듯이 한 비석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게 먼 친척 형님이 한 분 계십니다. 원씨(袁氏) 가문의 겸(謙)이란 분이십니다. 형님의 부친께선 참지정사(*參知政事: 관직명)를 지내신 분으로 주변 사람들은 상야(相爺)라 부르는 분이시지요.”

그의 옆에 선 지온은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삼 년 전, 형님께선 동창의 여동생과 혼인을 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오래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지만 집안의 문벌 차이가 나다 보니 형님의 모친께선 불만이 크셨지요.

결국, 형님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긴 했지만, 심한 고부갈등과 더불어 삼 년 내내 후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유신지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형수께서 갑자기 형님에게 내년에 있을 회시(會試)를 생각해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자 하셨다 합니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원씨 가문의 며느님이셨군요. 역시 지예(知禮)가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신지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지 소저, 정말 그분이 누군지 모르셨습니까?”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저희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는 대공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조부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로는 저희 집안과 왕래를 하던 가문 중에서 가장 높은 가문이 바로 공자님의 가문이었습니다.

제 둘째 숙모님의 성격상, 다른 가문과의 왕래에 저를 데리고 가실 리가 없으니, 오늘까지 제가 아는 다른 가문의 부인이라고는 공자님 가문의 부인들뿐이지요.”

“정말 의도한 것이 아니었단 것입니까?”

유신지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는 심지어 그녀를 압박하는 듯 엄한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저은 그녀는 정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원씨 가문의 어린 부인께서 화신첨을 뽑으신 것은 오로지 그분의 운으로 생긴 일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신지의 표정이 점점 풀리더니, 끝내는 미소가 피어났다.

“소저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그대로 믿겠습니다.”

분위기가 풀리자 유신지는 뒷짐을 지고 비석들 사이를 거닐며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제 형님은 고집이 센 분이십니다. 형님의 부친이시죠, 그러니까 저의 외외종조부께서는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계모의 손에 적잖은 고생을 하시다가, 과거에 합격하고 집안을 나오셨지요.

그때 외외종조부께서는 자신은 절대 서자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혼인을 일찍 하셨는데, 외외종조모님은 집안도 그리 좋지가 않고 식견 역시…….”

잠시 말을 줄였던 그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외외종조부께서 첩실을 들이지 않으셨기 때문에 집안에 아들은 형님 하나뿐입니다. 그렇다 보니 외외종조모께 형님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이라, 지금도 금이야 옥이야 하시지요.

그러나 형님이 어리다면 모를까, 이제 다 큰 성인이 되어 혼인까지 했는데 이러시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며느리의 가문이 미천하고 삼 년이나 후사를 보지 못했다는 건 다 핑계일 뿐이지요. 그저 아들을 빼앗긴 것 같아 기분이 나쁘신 것입니다.”

지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일을 공자님께서 퍽 잘 아시네요.”

유신지가 웃음을 지었다.

“매일 대리시에서 사건을 보니, 이런 일을 하도 많이 봐서 아는 것이지요.”

지온이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인께서 떠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지요. 원씨 가문의 공자께서 다른 이와 혼인을 하시면 또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유신지는 그럴 것이라 대답했다. 그가 눈에 웃음을 가득 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규방을 나서지도 않은 소저께서 이런 일이 퍽 익숙하신 듯합니다. 어디서 배우신 것입니까?”

지온이 눈썹을 으쓱 들었다.

“사람이 똑똑하면 뭐든 다 쉬운 법이지요.”

하하, 웃음을 터트린 유신지가 다시 물었다.

“그럼 해결책도 달리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것입니까? 그 구자부(*求子符: 아들을 얻기 위해 쓰는 부적)가 정말 효험이 있는 건가요?”

지온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아시나요?”

유신지가 미소를 지었다.

“형님께서 마음이 괴롭던 차에 우연히 만나게 되어 술 한 잔 걸쳤습니다.”

이에 지온은 생각했다.

‘대공자의 훌륭한 얼굴에 화려한 언변이면, 입고 있던 속옷 색깔까지 고해 바쳤겠지.’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아이가 생기면 상황은 분명 나아질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저희 외외종조부께서 외외종조모가 그리 하시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으실 거예요.”

지온이 웃으며 물었다.

“공자께선 형님 내외분이 왜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유신지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의원이 아니니 알 리가 없지요.”

“저는 부인의 맥을 짚어보았습니다. 많은 명의를 만나 보양도 잘하셔서, 부인의 몸에는 문제가 없었지요. 아마 원 공자께서도 함께 의원을 만나셨을 테니 원 공자님 역시 몸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실 겁니다.”

“그럼…….”

“후사를 보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두 사람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리고 또 하나, 마음이 무겁고 우울한 것도 회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유신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럼 그 구자부는……?”

“그 구자부엔 두 가지 효능이 있습니다.”

지온이 말했다.

“첫째로는 부인의 마음에 위안이 되어 줄 것이고, 둘째로는 향낭 안에 든 향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향은 제가 회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든 것이니 도움이 되겠지요.”

그제야 이해한 유신지가 말했다.

“그럼 두 사람에게 이사하라고 권한 것도 같은 의미겠군요. 이런저런 복잡하고 머리 아픈 환경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을 가지면 혹시 후사를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이 일을 생각하던 유신지는 순간 흥미가 돋았다.

“어떻게 그렇게 효험이 있을 거라 확신을 하십니까? 그러다 효험이 없으면 화신첨의 명성도 끝나는 것일 텐데?”

지온이 빙긋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이렇게 전심으로 공양을 하고 있으니, 화신마마께서 저를 살펴 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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