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2)화 (62/385)

62화. 어찌 다른 사람과 같겠어요!

부인을 배웅하고 돌아온 청옥이 물었다.

“사저, 진짜 부인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는 건가요?”

청옥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지온은 빙긋 웃었다.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운이 좋다면, 두 달이면 고민을 털 수 있을 테니까.”

* * *

첫 번째 화신첨이 그렇게 평온하게 지나가고, 사방전은 늘 그렇듯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누군가 화신점에 관해서 물으면 새로운 장사인 청옥은 웃으며 이번 달은 이미 화신첨이 뽑혀 더는 화신점을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달은 끝났으니 다음 달에 다시 점을 보러 오라 했다 합니다.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스승님? 그저 여흥 거리 같은 그딴 점을 누가 보고 싶어 한다고…….”

낙영각의 제자가 능양진인에게 올린 보고에, 능양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다른 움직임은 없는 것이냐?”

“없었습니다. 다들 저희와 똑같은 일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재당(*齋堂: 절 안에 있는 식당)에 들렸다, 오전 수업을 하고 권법을 수련한 뒤 다시 사방전으로 가고 있어, 특별할 게 없습니다, 스승님.”

그러다 가만히 생각하던 제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 사저 역시 전과 비슷합니다. 다른 잡무들은 모두 청옥과 함옥에게 맡겨두고, 본인은 매일 아침 수련을 끝내고 나면 사방전에 잠깐 들렸다가 다시 거처로 돌아가는 것이 다입니다.”

이야기를 하던 제자가 비웃음을 지었다.

“전주라는 사람이 참 한가하지요.”

“난택산방은? 그곳에 들리지는 않고?”

제자가 고개를 저었다.

“가끔 인사차 시녀에게 이런저런 물건을 보내기는 하지만, 본인이 직접 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제야 다소 안심이 된 능양진인이 말했다.

“그래, 그만 가보거라.”

“네, 스승님.”

‘그 계집이 이대로 조용히만 있어 준다면, 사방전을 넘긴 것도 아깝지 않아.’

이제 난택산방 쪽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문제였다.

‘기존의 향환을 이제 보낼 수가 없게 되었으니,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 할 터인데…….’

* * *

날은 점점 더워졌다.

궁 수련을 마친 지온은 땀이 나 조금 축축해진 상태로 사방전을 향해 나섰다.

진시(*辰時: 오전 7시~9시)가 다 지난 시각, 사방전에는 향객 두 사람밖에 보이질 않았다. 공자 하나와 그가 데려온 시종으로 보이는 향객은 사방전 안에 그려진 벽화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슬쩍 보고 지나치려던 지온이 걸음을 떼려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향객 역시 몸을 돌렸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이는 루안이었다.

지온의 얼굴에 아낌없는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의 미소에 눈앞이 다 어지러워진 시종이 루안의 소매를 붙들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고, 공자님…….”

미간을 좁힌 루안이 시종의 손에서 제 소매를 빼냈다.

“누구는 눈이 없는 줄 아느냐?”

루안의 날카로운 반응에 한등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대체 내가 무슨 소릴 했다고? 공자님은 왜 화를 내시는 거야?’

“오랜만에 뵙네요, 대인! 향을 올리러 오신 건가요? 아니면 점을 보시러?”

루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향은 이미 올렸고, 점은 이미 이달 치가 끝나지 않았소?”

“대인이 어찌 다른 사람과 같겠어요!”

지온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매, 가서 첨통을 가져와요.”

“네!”

대답하고는 금방 첨통을 가지고 뛰어온 함옥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루안과 한등을 살폈다.

지온이 첨통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자요. 얼른 운을 시험해 보세요.”

루안은 되든 안 되든 상관이 없었기에, 기왕 첨통을 받아 든 김에 점괘를 뽑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튀어나온 첨자는 역시 백첨자였다.

하지만 루안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지온이 얼른 첨자를 다시 첨통에 넣으며 말했다.

“다시 해보세요.”

“…….”

함옥과 한등 모두 그녀의 행동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안 나왔는데 다시 흔들어 보라니? 점을 그렇게도 볼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전주인 지온이 그리 하길 원하면, 그리 해도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루안은 첨통을 세 번, 네 번 다시 흔들었지만 나오는 것은 계속 백첨자였다.

루안이 물었다.

“또 흔들라고 하겠지?”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소리 없는 한숨을 쉬고, 첨통 안에 든 첨자를 모두 꺼내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첨통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번에 흔드는 시간이 길어졌다. 흔들다가 모두 쏟고, 다시 또 흔들다 모두 쏟기를 반복하던 그의 앞에 드디어 첨자 하나가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진 첨자를 주워든 지온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대인! 화신첨을 뽑으셨네요!”

“…….”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함옥과 한등은 할 말이 없었다.

한쪽이 속임수를 쓰는 경우는 보았어도, 둘이 쌍으로 이러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 아닌가?

‘이렇게 흔들어서 안 나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

“대인, 안으로 오시지요. 제가 점괘를 봐 드리겠습니다.”

루안이 그녀를 따라 전의 뒤편으로 향하자 한등이 우물쭈물 작게 물었다.

“공자님, 저는 어떻게 할까요?”

“마음대로 하거라.”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한등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전 선고님을 도와 향촉이나 정리할게요.”

청옥도 차를 올리고 물러났다.

* * *

손가락으로 상을 톡톡 때리던 루안이 물었다.

“…이야기해도 괜찮은 것이오?”

지온에게 이곳이 안전한지 묻는 것이었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사매가 있어서 괜찮아요.”

“화옥선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들었소.”

“네.”

루안이 그녀를 응시했다.

“내게 진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 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런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요? 아무튼, 능양사숙께서 사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니 그냥 그런 줄 아는 거죠.”

루안은 답답함에 지온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상 위에 놓인 손가락이 목을 조르고 싶은 욕망으로 파들거렸지만, 루안은 끝내 입술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조방궁의 상황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한 것 같소. 대장공주님과 같은 존신(尊神)께서 중심을 잡고 계시니 몹쓸 짓을 하는 이들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화옥선고의 죽음을 보니 아무래도 이곳 역시 더러운 물이 든 것 같군.”

지온이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조방궁엔 신경을 안 쓰셨던 거예요?”

루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조방궁은, 이곳에서 지내는 이들이 모두 여관인 단순한 공관이었다. 평소 별일이라고 해봐야 입궁하여 황후와 비(妃)들에게 경을 읽고 설명하는 것이 전부인 곳에서 살인이나 암살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이나 했겠는가.

“화옥이란 선고는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당신을 해하려고 했소. 그것만 봐도 그녀가 배포도 작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지. 그런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도가 있는데 사죄하기 위해 제 목숨을 끊었다……? 그럴 리가 없지.”

지온이 빙글빙글 웃기 시작했다.

“화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거군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걱정돼서 이렇게 찾아오셨단 거네요?”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지온의 모습에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든 루안은 당황한 듯 눈을 돌렸다.

“간이 대체 얼마나 큰 거요?”

그가 짐짓 훈계하듯 입을 열었다.

“화옥을 죽일 수 있을 정도라면 분명 조방궁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일 텐데, 사방전은 어떻게 손에 넣었소? 겁박을 했나?”

지온이 하하, 웃었다.

“확실히 대인이 절 잘 아시네요.”

“웃지 마시오!”

루안이 낮게 호통을 쳤다.

“이게 장난 같소? 어린애 같은 공력밖에 없으면서, 저들이 진짜 움직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자 지온이 목에 걸고 있던 대나무 피리를 꺼냈다.

“이게 있잖아요?”

‘그걸 거기에 걸고 있었을 줄은……!’

루안은 얼굴에서 더욱 열이 나는 듯했다.

아무렇지 않게 피리를 도로 옷 속으로 집어넣은 지온이 그제야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저들이 저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예요. 대장공주께서 아직 계시니 흉계를 꾸미는 음흉한 것들도 지금은 몸을 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을 테고요. 제가 너무 갑자기 나타나서 그들도 당장 대응을 하긴 어려워요.

지금과 같은 상황에 조심스레 움직이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차라리 저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커버리는 게 나아요.”

지온의 말을 곱씹던 루안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과거에 그녀는 이처럼 머리를 굴리며 다른 이들과 각을 세우는 일들을 가장 싫어했다. 그러나 당분간은 그런 생활을 하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몇 년…… 내가 원하는 판만 짜진다면, 그땐…….’

“전 대인처럼 당당하게 과거를 보고 관직에 오를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다른 길을 찾는 수밖에요.”

잠시 말을 멈추었던 지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해야 할 일을 하세요. 지금 전 그저 제 명성을 올릴 생각뿐이라, 다른 일들은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저들도 한동안은 저를 건드리려 하지 않을 거예요.”

침묵하던 루안이 물었다.

“당신이 생각한 방법이란 것이 화신점이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뤄줄 수 없는 소원을 빌지도 모르는데, 그런 걱정은 안 되오?”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에게 왜 소원이 생기는 것 같으세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에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건, 마음에 저가 원하는 것을 그려두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소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과장이 되고, 형태가 변해 비현실적인 소원으로 바뀌게 되기도 하지만, 인내를 가지고 조금씩 풀어가다 보면 그 소원의 원래 형태, 본질을 찾아낼 수 있거든요.”

루안은 지온을 응시했다.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하는 지온의 모습은, 그의 기억 속에 남은 그녀의 모습과 같았다.

그녀는 늘 이렇게 논리정연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상대의 말문을 막았던 것이다.

“능운진인께서는 깊은 도를 깨달은 분이셨지만,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먹고, 입을 것이 부족해지면 강호의 사기꾼처럼 행동하기도 하셨죠. 촌에 사는 이들이나 고관대작에 지체 높은 어르신이나 바라는 것은 다를 것이 없어요.”

루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가 제 사매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공양물이 어떻고, 향객이 어떻고…….

과거의 그녀는 전혀 하지 않던 이야기들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지금의 몸 주인과 온전히 융화된 듯했다.

‘매우 닮았지만, 또 달라.’

그는 문득 그녀에게, 굳이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 역시 그래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군.’

세상에는 이미 두 명의 옥종화가 있었다.

하나는 무애해각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다른 하나는 궁에 있으니, 여기에 또다시 하나를 더 추가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 이제 그녀는 지온이다.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 지온이야.’

“대인 자주 오시지요!”

방긋 미소를 지은 지온이 당연한 듯 그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그리고 가셔서 차라도 드세요.”

“…….”

지난 삼 년간 이런 일에 익숙해진 루안이었지만, 처음으로 다수전을 받는 제 손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는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돈을 탐하게 되었지?’

그야 물론 돈 쓸 곳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호시탐탐 돌아가 왕의 작위를 빼앗아야 하는 몰락한 공자가, 돈까지 없으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더구나 털어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완벽한 성품을 고수했다면, 황제가 자신을 어찌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는 조용히 사방전을 나섰다.

턱이 빠질 듯한 한등이 헤벌쭉 입을 벌리고 루안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저희 아직 시주를 안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루안의 얼굴이 다소 어두워 보였다.

“아까 그 소저께서 다수전을 주신 겁니까?”

루안이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한등이 감탄했다.

“눈치도 빠르네요.”

‘눈치? 아주 못 줘서 안달이었지.’

루안은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이 떠나기 전 지온의 말을 떠올렸다.

‘대인, 자주 오시지요!’

그 말에 뭔가 기분이 좀 이상해 루안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한등이 말했다.

“저희는 향을 올리러 와서 아가씨가 내준 차도 마시고, 점괘도 들었는데 시주는 고사하고 도리어 다수전을 받았네요. 어쩐지 저희가 집마다 찾아가 노래 팔고 웃음 파는 기생이 된 것 같…….”

순간 생각을 멈춘 루안이 한등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음장 같은 그의 눈빛에 한등은 금방 머리를 감싸 쥐더니 제 입을 때려댔다.

“제가 잘못했어요! 어휴,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