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1)화 (61/385)
  • 61화. 구자부(求子符)

    멍하니 첨자를 보는 어린 부인의 귓가에 기뻐하는 선고의 흥분한 음성이 맴돌았다.

    “그동안 화신마마 앞에서 화신점을 보신 분만, 못해도 천명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중에 단 한 분도 화신첨을 뽑은 분이 없으셨는데, 부인께서 이리 뽑으셨으니 분명 대운이 들었다는 것이겠지요! 이제 운이 트이시겠습니다!”

    천명에 가까운 사람도 못 뽑은 것을 자신이 뽑았다니…….

    ‘내게 진짜 그런 운이 따랐으면 이런 지경까지 몰리게 되었을까?’

    말이 없던 어린 부인의 얼굴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선인?”

    아픈 곳이라도 건드린 것인지, 어린 부인이 왈칵 눈물을 쏟으며 울음을 터트리자 당황한 청옥은 어쩔 줄을 몰랐다.

    다른 향객이 보면 자신이 어찌한 줄 알 게 아닌가!

    “선인, 울지 마시지요. 무슨 일이 있든, 천천히 말씀을 해보시지요.”

    청옥의 손에 이끌린 어린 부인은 울며 후전(殿)으로 향했다.

    * * *

    앞에 있는 전각은 밝았지만, 뒤에 있는 전각에는 천장에 작은 창만 하나 있었다. 작은 창에서는 약한 빛만이 들어올 뿐인지라 분위기는 조용하면서도 어두웠다.

    신상의 뒤쪽으로 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 놓인 촛대에는 이리저리 춤추듯 흔들리는 촛불이 초를 태우고 있었다.

    상 옆쪽으로는 서책을 말아 쥔 묘령의 소녀가 독서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낀 소녀가 고개를 들자, 어린 부인의 울음이 순간 뚝 하고 끊겼다.

    수수한 옷차림을 한 소녀는 곱디고운 백자 같았다.

    소박한 치장에도 불구하고 마치 망울을 터트린 꽃처럼 절정의 미색을 드리운 소녀는, 타인으로 하여금 화신마마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화신께서 강림이라도 하신 건가?’

    “부인, 앉으시지요.”

    소녀가 일어나며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자 어린 부인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귀로 장사 선고의 소개말이 이어졌다.

    “이분은 저희 사방전의 전주이자, 능운진인의 대제자이십니다. 선인, 저희 전주께서 보기에 너무 어려 보인다 생각지 마십시오. 이미 도가에 입문하신 지 십 년이 되어 가는 분이십니다. 어려서부터 능운진인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시며 진전을 이어받으셨고…….”

    지온은 웃음을 지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나이가 어려 다른 사람이 쉽게 볼까 싶었던 청옥이 얼굴에 금칠을 해주고 있던 것이었다.

    “화신첨을 뽑으신 건가요?”

    청옥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앞에 앉았다.

    “부인, 지금 소원을 비시겠는지요? 아니면 남겨두었다 나중을 기약하시겠습니까?”

    여전히 얼떨떨한 어린 부인이 대답했다.

    “지, 지금이요? 나중에요?”

    지온이 상 위에 있던 평안부를 들었다.

    “부인께서 지금 소원을 비신다면 저희가 바로 부인의 소원을 들어드릴 것이고, 나중을 기약하고자 하신다면 평안부를 내어드릴 것입니다. 가지고 가셨다가 필요하실 때 다시 가지고 오셔서 소원과 바꾸시면 될 것입니다.”

    어린 부인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제가 소원을 빌기만 하면 무조건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화신첨을 뽑으셨으니 이제 화신마마의 보살핌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 마마께서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

    어린 부인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작은 미소만을 지었다.

    그녀는 당연히 이런 것들을 믿지 않았다.

    만약 눈앞에 소녀가 늙고 기름 낀 도사였다면 당장에 화를 내고 나가버렸을 터였다.

    출가한 사람이면 공양이나 잘하고 향이나 올릴 일이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것이 수행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눈앞에 소녀는 정말이지…….

    ‘너무 예뻐…….’

    그녀의 선녀 같은 외모에 도저히 악감정이 생겨나질 않을 정도였다.

    어린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러실 필요까지 없습니다. 제가 향을 올리러 온 것은, 그저 마음의 평안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온 것이지 신선에게 기대를 걸거나 그분들에게 의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부인이 지나가듯 말했다.

    “천하 수많은 명의를 보고도 찾지 못한 답이 참배한다고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지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부인께서 그리 마음을 정하셨다면, 속이라도 시원하게 저희에게 이야기라도 해보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털어놓고 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구나.’

    몇 년이나 속을 끓였지만 털어놓을 곳 하나 없던 날들을 생각하니 금방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차피 곧 다 끝날 것을…….’

    청옥이 때마침 차를 내왔다.

    두 사람의 온화한 미소에 마음이 편안해진 어린 부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향을 올리고 돌아가면 저는 제 남편과 헤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도, 그렇다고 궁금증을 드러내지도 않는 얼굴로, 그저 담담하게 경청하는 지온의 모습에, 속내를 털어 놓고픈 어린 부인의 욕구가 더욱 크게 치솟았다. 그녀는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저와 남편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습니다. 나이가 차서는 그가 저를 부인으로 삼고 싶어 했지요.

    집안을 보면 저는 그에게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깊어 헤어질 수가 없었던 지라 결국 그의 집안에서 허락을 하기는 했지만, 시어머니께서 이 혼사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혼인한 후에는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며 정성을 다해서 모셨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갔지요.

    저희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저희 집안의 가세는 더욱 기울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시어머니는 저를 더 좋아하지 않게 되셨고……그리고…….”

    어린 부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후두둑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혼인한 지 꼬박 삼 년이 지났지만 회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어머니의 불만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고 제게는 늘 냉랭하셨지요. 남편이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다 보니,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이 저의 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녀는 울며 말을 이었다.

    “지난 두 해 동안 명의란 명의는 수도 없이 만났지만, 아무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제 명에 아이가 없다며 소박을 놔야 한다고 매일 난리를 치셨고, 이로 인해 집안에 단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내년이면 남편께서 과거를 보셔야 하는데, 저는 도저히 남편의 앞길을 막을 수가 없으니, 그만 남편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상에 엎드려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상심하는 부인의 모습에 동정심이 든 청옥은 위로의 말을 건네려다, 지온이 찻잔을 든 채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을 보고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어린 부인의 울음소리가 잦아들며 그녀가 눈물을 닦았다.

    “어려운 이야기 들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두 분께서만 알고 다른 곳엔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물었다.

    “부인, 제가 진맥을 해봐도 되겠는지요?”

    멈칫한 어린 부인이 되물었다.

    “의술을…… 아시는지요?”

    지온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문제 될 것 없다고 생각한 부인이 지온에게 손을 내주자 지온은 그녀의 맥을 짚은 채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지온의 모습에 어린 부인은 저도 모르게 작은 기대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물론 명의라 불리는 수많은 의원조차 찾지 못한 원인을 눈앞의 소녀가 찾아낼 리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잠시 후 지온이 손을 회수하자 부인이 지온을 불렀다.

    “선고님…….”

    지온이 입을 열었다.

    “부인, 지금은 헤어지기 좋은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

    어린 부인이 멈칫했다.

    “부인 말씀을 들어보니 부인을 향한 부군의 마음이 깊으신 듯한데, 지금 떠나시면 부군께서 얼마나 충격을 받으시겠습니까?”

    지온의 말에 어린 부인이 울먹였다.

    “그래도 지금보다 지내기 좋을 것입니다. 집안이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시끄러우니…….”

    지온은 고개를 저었다.

    “부군께서 스스로 부담을 견디지 못해 헤어짐은 선택했다면 모를까, 부군께선 아직 버티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인께서 여기서 포기하신다면 부군은 가슴에 미움을 가득 쌓아, 절대 부인을 용서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부군께서는 그저 어머니의 압박만 견디면 되지요. 하지만 이대로 부인께서 떠나시면 결국 부군은 미워할 사람이 더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내년에 과거를 치르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시겠지요.”

    어린 부인은 흠칫 놀랐다.

    ‘일리가 있어.’

    “하지만…….”

    “더구나 사람의 운이라는 것은 기복이 있습니다. 낮을 때가 있으면, 다시 높아질 때가 있는 법이지요. 부인께서 화신첨을 뽑으신 것을 보아 앞으로 운이 상승하실 때가 온 것 같으니, 조금 더 버티셔서 운 때가 달라지는 것을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린 부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3년을 기다렸는데…….”

    지온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청옥 사매, 구자부(*求子符: 아들을 얻기 위해 쓰는 부적)를 가져다 줘요.”

    “네.”

    일어나 서랍장을 열어 무언가를 뒤적이던 청옥이 향낭 하나를 꺼내 가져왔다.

    “부인,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까?”

    구자부(求子符)를 건네받은 지온이 향낭 안으로 그것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이미 마음을 정하셨다면, 그 시간만 조금 더 뒤로 미루면 어떻겠습니까? 길지도 않고, 딱 일 년이면 되니 회시(*會試: 복시라고도 함)를 치르고 결과가 나온 후에 다시 이야기를 꺼내도 될 것이 아닌지요.”

    “그것이…….”

    “어차피 이런 상황을 벌써 삼 년이나 버텨오지 않으셨는지요? 거기서 일 년만 더 참는 것입니다. 어려울 것도 없을 것입니다. 부군을 위해 헤어지는 것조차 불사하셨는데, 일 년 더 참는 것 정도는 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시선을 내린 어린 부인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맞는 말이 아닌가?’

    돌아가 이별을 말하는 것 역시 남편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기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내가 이리 어려운데, 그이야 오죽하겠는가?’

    생각하던 어린 부인의 눈에 다시 눈물이 방울졌지만, 이번엔 슬픔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감동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집안이 시끄러운 것 또한 좋은 방도가 있습니다.”

    지온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내년에 곧 과거를 봐야 하는 부군께 가장 중요한 것은 학업에 전념하시는 것이겠지요. 도성에서 가장 학업에 전념하기 좋은 곳이라면 역시 광명사(光明寺)일 것입니다. 맑고 조용하면서도 정심 서원과 거리도 가까워 매년 과거가 있을 때면 많은 문인 기재들이 그곳으로 모이지요. 때때로 불경을 듣고, 동도(同道)들과 학문에 대해 논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하면 서원의 유학자께 가르침을 청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집안과 상의를 해보시고, 광명사 주변에 거처를 마련하여 두 분이 시험을 치를 때까지만 이라도 함께 머무시면 좋지 않을는지요?”

    그 말에 어린 부인의 마음이 흔들렸다. 밖에서 살 수 있다면 시어머니와의 충돌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시면 부인과 부군 두 분은 유유자적한 일 년을 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설사 후에 헤어지게 될지라도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실 수 있으시겠지요.”

    지온이 천천히 찻잔을 채웠다.

    “당연히 광명사가 아닌 다른 적당한 곳이라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어린 부인은 고민했다.

    시어머니는 당연히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지만, 제 남편은 이미 예전부터 하고 있던 생각이었던 것이다.

    전에는 그저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고 싶단 생각에 시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떠나기로 한 마당에 시어머니의 기분이 상하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난 일 년 후에 떠날 사람이잖아.’

    선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헤어지더라도 서로 추억할 기억이 생길 것이었다.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고님!”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저 의견을 낸 것뿐이니 그리 감사하실 것 없어요.”

    지온이 향낭을 건넸다.

    “구자부(求子符)니 몸에 지니고 계시지요. 화신첨을 뽑으셨으니 화신마마께서 분명 부인을 돌보실 것입니다.”

    여러 번 감사를 표하는 어린 부인에게 이런저런 당부가 이어졌다.

    향낭은 목에 걸어두는 것이 가장 좋다거나, 최소 한 달은 걸고 있어야 한다는 등의 당부들이었다.

    지온에게 감사했던 부인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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