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0)화 (60/385)
  • 60화. 선인께 길운이 닿았습니다!

    놀란 얼굴이 된 귀부인이 사방전의 새로운 장사인 청옥에게 물었다.

    “그리 안 보이는데 선고가 능력이 좋군.”

    보기엔 그저 젊고 충직해만 보이는 선고가 십수 년간 사방전을 관리해 온 유 장사를 좌천시켜 보내다니.

    짐짓, 못 알아들었다는 얼굴을 한 청옥이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빈도가 모시겠습니다.”

    부들방석을 깐 청옥은 여종이 주는 향촉을 받아 불을 붙여 귀부인들에게 건넸다.

    말없이 받아 순순히 향을 모두 올린 귀부인이 꽤 만족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유 장사만큼 나이가 있는 것은 아니어도, 선고가 아주 세심하구먼. 위세도 부리지 않고 말이네.”

    조방궁은 황가를 뒷배로 두고 있기에 장사 직을 오래 수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콧대가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유 장사도 향객들을 직접 맞으러 나가기는 했지만, 말이나 몇 마디 나눌 뿐, 언제 향촉까지 건네준 적이 있던가?

    겸양의 말을 덧붙인 청옥이 물었다.

    “부인, 혹시 화신점을 보시겠는지요? 사방전에 원래 있던 첨통에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귀부인이 흥미를 보였다.

    “정리한다고 문을 닫아 두더니 크게 변한 것도 없어 보이네만, 설마하니 정리한다는 게 겨우 첨통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인가?”

    청옥이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귀부인은 아연실색했다.

    “참 솔직한 선고로세! 조방궁 앞에 있는 전(殿)에 이미 점괘를 보는 곳이 있는데, 굳이 여기에 하나를 더 놓을 이유가 있는가?”

    청옥이 말했다.

    “부인, 이곳에 있는 것과 앞 전(殿)에 있는 것은 다릅니다.”

    “오? 어디가 다른 것인가?”

    첨통을 가져오라 이른 청옥은 받아 든 첨통 안에 첨자를 모두 쏟았다.

    “보시지요, 화신점을 보는 첨통에 든 첨자입니다. 여기 첨자는 모두 백 자루가 들었습니다. 아흔아홉 자루는 모두 백색의 백첨자(白籤子)이지만, 단 한 자루만이 다르지요”

    유일하게 다른 첨자를 주워든 귀부인은 첨자 꼬리에 여러 송이의 각기 다른 꽃이 그려진 것을 발견했다. 몇 줄의 선으로 간단히 그린 듯한 꽃송이가 하늘하늘 생동감이 넘쳤다.

    “훌륭하구먼!”

    감탄한 귀부인이 물었다.

    “이 첨자에 무슨 특별한 것이라도 있는 건가?”

    “이 첨자는 화신의 첨자인, 화신첨(花神籤)입니다.”

    몸을 돌려 사방전에서 모시는 화신을 향해 배례(*拜禮: 절을 올려 예를 표함)한 청옥이 말을 이었다.

    “혹 부인께서 이 화신첨을 뽑으신다면, 화신마마께서 부인의 소원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멈칫한 귀부인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 화신첨을 뽑으면 내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청옥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화신첨은 달에 딱 한 번만 뽑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달에 당첨이 된 분이 나오시면 그달엔 더는 화신점을 보지 않습니다.”

    청옥이 미소를 지었다.

    “부인, 부인의 운을 한 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운을 시험해 보라니, 꼭 도박이라도 하는 것 같구나.’

    그저 얌전해 보이기만 하는 새로운 장사가 꽤 재밌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며 귀부인은 내심 웃음을 흘렸다.

    어쩌다 유 장사가 그리 밀려나게 되었는지 자세한 정황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사방전의 장사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뒷배의 권력 다툼과 관련이 있겠지.’

    조방궁은 내연(*內延: 황실의 기관 중 하나)에 속한 곳이 아니던가. 그런 곳의 권력 다툼에서 이겼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던 귀부인은 순순히 청옥의 말에 응했다.

    “그러지!”

    그렇게 백 자루의 첨자가 다시 첨통으로 들어갔다.

    흔들리던 첨통에서 튀어나온 첨자는 역시나 백색의 첨자였다.

    청옥이 무척 아쉬운 어투로 말했다.

    “화신첨이 아니로군요. 참으로 아쉽지만, 다음 달에 다시금 해보시지요.”

    귀부인은 내심 아쉬울 것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쉽게 연이 없었던 것 같구먼.”

    다시 첨통을 가져다 둔 청옥은 제자에서 평안부를 가져오라 시켰다.

    “부인께서 처음으로 화신점을 뽑으셨으니, 다른 분에 비해 연이 얕다 할 수는 없겠지요.”

    청옥이 말을 이었다.

    “사방전의 전주께서 처음으로 화신점을 보신 분께는 당첨 여부와 상관없이 평안부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부인, 이 평안부를 댁으로 가져가셨다가 다음번에 빌고 싶은 소원이 생기시거든 평안부와 함께 다시 오시지요. 화신마마께서 부인을 도와 소원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평안부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함께 달린 작은 향낭이 무척이나 정교해 보였다. 더군다나 향낭에서 가슴까지 시원해질 것 같은 향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귀부인은 고맙다며 시녀에게 평안부를 받아두라 일렀다.

    도심계(挑心髻) 머리를 한 귀부인과 청옥의 대화를 들으며 흥미가 동했던 다른 귀부인들 역시 화신점을 보고자 했다.

    백 중 하나를 뽑는 것이 확률상 높은 것은 아닌지라, 함께 온 귀부인 중에 당첨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가볍게 즐기고자 했던 것뿐이었기에 그것에 마음을 쓰는 이 없이 모두 웃으며 떠났다.

    * * *

    사방전을 내준 능양진인은 서북쪽에 자리한 낙영각(落英閣)으로 거처를 옮겼다.

    낙영각은 외진 곳에 있는 데다 주위로 초목이 무성해 전에 있던 곳 보다 더욱 고인(高人)의 거처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멀쩡히 제 손에 있던 사방전 전주 자리를 순식간에 빼앗긴 꼴이니 능양진인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찾아온 귀인들을 배웅하고 낙영각으로 돌아온 능양진인은 제자가 올린 화차(花茶)를 받아 들었다.

    화차 몇 모금을 마시자 경을 강의하느라 말라 갈라지던 목이 꽤 편안해졌다. 능양진인이 제자에게 물었다.

    “사방전은 여전한 것이냐?”

    “네, 스승님.”

    대답한 제자는 사방전을 떠올리니 웃음을 참기 어렵다는 듯 피식거렸다.

    “청옥 사저가 지객(知客)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아직 장사직에 적응을 못 하는 듯합니다. 무슨 일이든 전부 나서서 직접 한다지 뭡니까? 들리는 이야기에, 누가 와서 향을 올리든 그 화신첨을 뽑아보라 권하고 있다 합니다.”

    능양진인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과거였다면 화신첨인지 뭔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사방전의 전주 자리를 꿰찬 아이를 떠올리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막 조방궁에 왔을 때, 화옥 역시 별 것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비 사건으로 거하게 뒤통수 맞더니, 끝내는 목숨까지 잃게 되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이랴! 화옥을 죽게 한 것도 모자라, 그 밤중에 자신을 찾아와 자신을 겁박하더니, 결국 제 사숙의 손에서 사방전까지 빼내 간 계집이었다.

    거기에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향환을 대장공주께 올리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며 궁에서 나온 이에게 호된 질책까지 들어야 했다.

    ‘그 몹쓸 것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야? 화신점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스승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자가 말했다.

    “화신점인지 뭔지로 사람들에게 관심이나 받아보려는 것이겠지요. 첨통만 흔들고 해석은 해주지 않는다니, 어디 사람들이 진짜 첨자를 보러 오는 것이겠습니까? 점괘 해석이야말로 진짜 중요한 것이지요!

    평안부나 피사전(*避邪錢: 화를 막아준다는 동전)도 그저 곁가지일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앞 전(殿)을 방문하는 향객을 빼 갈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가당찮습니다.”

    능양진인이 흘긋, 제자를 쳐다보았다.

    “넌 그 아이가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이 앞 전(殿)의 향객을 빼내기 위해서라 생각하느냐?”

    “그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제자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얼굴이었다.

    “사방전이 비록 주전(主殿)이긴 하지만, 겨우 향촉을 올리는 것만으론 들어오는 시줏돈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능양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아이가 고작 돈 때문에 그런 일을 할 리가 있겠는가?’

    진짜 돈을 위해서였다면 처음부터 조방궁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더 나았을 터였다.

    “돈 때문이 아니라면 혹시 명성 때문일까요?”

    제자의 추측이 이어졌다.

    “지체 높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이름을 알려서 미신에 빠진 노파 하나 구워삶으려는 요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파가 화신의 제자라고 집안에 들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자는 제 생각이 재미가 있었던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나 능양진인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계속 살펴보거라.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내게 전해.”

    “네, 스승님.”

    * * *

    이런저런 잡무까지 모두 끝내 마침 할 일이 없던 차에, 청옥의 귀로 함옥의 반가워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대사저!”

    돌아보니 사방전을 찾은 지온이 보였다.

    “사저!”

    청옥이 얼른 지온을 맞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냥 있으려니 심심해서요.”

    사방전에 향객이 두세 사람뿐인 것을 본 지온이 물었다.

    “아직 화신첨을 뽑은 사람이 없나요?”

    “네.”

    청옥이 답답한 듯 대답했다.

    “며칠 사이에 화신점을 본 사람만 천명은 안 되더라도 기백은 되거든요. 아무리 백 분의 하나라지만 어떻게 한 명이 안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화신첨을 뽑지 못했다는 건, 화신첨과는 연이 없단 것이겠죠. 화신마마께서 얼마나 바쁘신 분이신데, 쉽게 소원을 들어주실 리가 있겠어요?”

    그리 생각하니 또 그 말이 맞았다.

    또 다른 향객이 찾아오자 청옥은 그녀를 신상의 뒤편에 있는 후전(后殿)으로 안내하고, 향객을 맞으러 나갔다.

    들어온 향객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앳된 부인이었다.

    맵시가 있는 것이 수려한 외모를 가졌지만, 심적으로 많이 지치고 낙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선인(*善人: 덕 있는 이를 지칭하는 말로 도관이나 사찰에 찾아온 이를 부르는 호칭).”

    예를 올린 청옥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지객 일을 해보았기에, 청옥은 어린 부인을 보자마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린 부인은 좋은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있었는데, 의복의 재질만 봐도 부귀한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시녀 하나 없이 홀로 나타났던 것이다.

    어린 부인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선고님, 향을 올리러 왔습니다.”

    청옥은 제자에게 향촉을 가져오라 일렀다.

    신상(神像) 앞에 무릎을 꿇고 정성 어린 참배를 올리는 어린 부인은 경건함이 넘쳤다.

    참배를 마치고 일어서는 어린 부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것을 본 청옥은 순간 짠한 마음에 그녀를 향해 물었다.

    “선인, 선인께 힘든 일이 있는 듯 보입니다. 화신점을 보시겠는지요? 저희 화신마마께서 혹, 선인의 소원을 들어주실지 모릅니다.”

    어린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마음의 평안을 빌기 위해 온 것일 뿐입니다. 괴롭고 어려운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습니까? 마마께서 제 일까지 돌보실 여력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공덕함에 시주를 넣고 떠나려는 부인을 청옥이 불러 세웠다.

    “선인.”

    청옥은 그녀에게 첨통을 내밀었다.

    “선인께선 저희 사방전에 새로 생긴 규율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이 첨통에는 아흔아홉의 백첨자와 단 하나의 화신첨이 들어있습니다.

    만약 선인께서 하나뿐인 화신첨을 뽑으신다면, 앞으로 선인께 좋은 운이 따를 것이란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화신첨이 나오지 않더라도, 어차피 큰 희망을 품고 계신 것은 아니라 하셨으니 실망하실 일도 없겠지요.”

    길게 말은 했지만 결국 안 돼도 손해 볼 것 없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한숨을 내쉰 어린 부인은 내심 선고가 이리 열정을 보이니 뽑아나 보자고 생각했다. 선고의 말대로 안 돼 봐야 손해 볼 것도 없지 않던가?

    어렵게 첨통을 받아 든 어린 부인은 다시 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찰랑찰랑 첨통을 흔들었다.

    그러자 첨자 한 자루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린 부인이 첨자를 주워들고 보니, 앞뒤 모두 아무 숫자도 적혀 있지 않고 그저 꽃만 몇 송이 그러진 첨자였다.

    ‘역시 백첨자를 뽑았구나.’

    부인은 첨자를 청옥에게 건네며 몸을 돌렸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녀를 붙드는 청옥의 기쁜 음성이 들려왔다.

    “선인, 화신첨입니다!”

    어린 부인이 흠칫 놀랐다.

    다른 백첨자들을 꺼내 보인 청옥이 말했다.

    “이것을 보세요, 다른 첨자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고 그저 전부 백색이지만 이 첨자에만 꽃이 그려져 있지요? 이 첨자가 바로 화신첨입니다! 선인, 선인께 길운이 닿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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