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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59)화 (59/385)
  • 59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는가!

    고요한 깊은 밤.

    여양대장공주는 등불 아래 앉아 조용히 경을 읽고 있었다.

    찬합을 든 매고고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남해에서 새로 조공한 제비집이라고 오늘 폐하께서 보내오셨습니다. 맛을 보시겠는지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으니 자네가 먹게.”

    “폐하의 성심이시온데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대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져와.”

    그녀는 매고고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비집탕을 먹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참으로 신경을 많이 쓰시지요. 좋은 것이 있으면 언제나 잊지 않고 조방궁에 보내주시는 것도 모두 공주마마 때문 아니겠습니까?”

    대장공주가 숟가락을 놓았다.

    “매(梅), 더 이야기하지 말게. 오라버니와 부마(駙馬) 모두 계시지 않은데 내가 더 바랄 게 뭐가 있어? 조방궁으로 온 것은 이미 내 마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니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강왕부(康王府)가…….”

    대장공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강왕이 강왕이지, 어디 태상황이라도 된다던가?”

    “공주마마…….”

    대장공주가 손을 내저었다.

    “폐하께선 명철하신 분이시네. 제위를 이어받으셨으니 난 폐하의 친고모이고 그쪽은 당백부일 뿐이야. 어디를 가까이하고 어디를 멀리해야 하는지 폐하께서도 분명하게 알고 계실 것이야.”

    매고고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주님이 너무 상황을 단순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전엔 의안왕이었으니 당연히 공손했겠지만, 이제 그는 황제가 아닙니까!’

    * * *

    같은 시간, 영수궁(靈秀宮).

    옥비가 상탑(床榻)에 누운 황제를 가볍게 흔들며 조용히 그를 불렀다.

    “폐하, 폐하. 옷이라도 갈아입으시고 침상에서 주무시지요.”

    그에 잠에서 깬 황제가 잠시 멍한 얼굴로 있다 일어나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이리 늦었군. 잠시 쉴 생각이었는데 이리 깊게 잠이 들 줄은 몰랐네.”

    “피곤하셨던 것이지요.”

    입을 가리며 슬쩍 미소를 지은 옥비의 표정에 장난기가 어렸다.

    “저녁 식사도 하지 않으시고 주무셨습니다. 신첩이 깨우지 않았으면 아마 배가 고파 깨셨을 것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난 옥비가 궁인을 향해 말했다.

    “가서 저녁을 가져오게.”

    “네.”

    그리고 다시 황제를 향해 몸을 돌리며 그녀가 작게 불평했다.

    “어찌 신첩을 그리 보시옵니까?”

    황제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자네가 예쁘니 그렇지.”

    타박하듯 눈을 흘기면서도 옥비는 황제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는 모습이 황제를 무척이나 신뢰하는 듯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황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물어보았는가?”

    흠칫, 몸이 굳은 옥비가 천천히 자세를 바르게 하여 앉았다.

    “물어보았습니다.”

    그녀의 음성이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게 변했다.

    “뭐라던가?”

    “능양진인의 말로는 향수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대장공주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방궁의 제자가 연구해 만들어 낸 것이라 합니다.”

    가볍게 대답을 한 황제가 다시 물었다.

    “만드는 법이 똑같던가?”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던 옥비가 말했다.

    “제조법에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신첩이 물어보니, 역시 그 여행 서적에서 찾은 제조법이라 하였습니다. 조방궁은 예로부터 꽃과 나무들을 키워왔으니 향을 내는 재료들을 가지고 향을 조합하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도 그렇군.”

    황제가 잠시 머뭇거렸다.

    “고모님은 어떠시던가? 생활은 어떤지 여쭤보았는가?”

    “여쭈었습니다. 요즘은 잠도 잘 주무신다고 합니다. 능양진인의 향환 덕이 컸다 합니다.”

    황제가 웃음을 지었다.

    “그 제조법은 자네가 알려준 것이 아닌가? 어찌 그것이 능양진인의 것이 되었어?”

    옥비 역시 웃음을 지었다.

    “신첩은 그저 언질만 주었을 뿐인 것을요. 어찌 배합해야 하는지는 능양진인이 직접 알아낸 것인데, 제가 공을 가로챌 수는 없지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화가 이리 능력이 출중한 것은 그저 짐만 알면 되었어. 다른 이들은 굳이 알 필요 없지.”

    옥비가 웃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네, 신첩에겐 폐하만 계시면 되옵니다.”

    그때, 저녁 식사가 들어왔다.

    커다란 생선이나 두툼한 고기 요리 하나 없이 들어온 것은, 그저 한 그릇의 고기죽과 몇 가지의 제철 채소로 만든 음식이 올려진 상이였다. 가볍고 싱그러워 보이는 상차림이었다.

    황제가 요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종화가 짐을 잘 아는구먼. 며칠 너무 기름지게 먹었더니 짐도 식욕이 크게 없던 참이었어.”

    옥비가 가죽나물전을 들어 그의 그릇 위에 올렸다.

    “폐하, 이것 좀 드셔보시지요. 상해에 있을 때 폐하께서 맛있게 드시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매년 봄이 되면 폐하께서는 서원에 있던 가죽나무에서 잎을 따시었었지요.”

    황제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는가!”

    * * *

    지온은 소원(小院)으로 돌아왔다.

    저녁 소세를 끝내고 머리를 길게 늘인 지온은 등불 아래 향환 두 알을 올려놓았다.

    꽃내음이 나는 향환은 대장공주가 그녀에게 하사한 것이었고, 좀 더 풀향기와 나무향이 나는 것이 지온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과거 그녀는 이 향환의 제조법을 수정하며 적지 않은 꽃이슬로 시험을 했었다.

    능양진인이 만든 향환의 제조법은 그녀가 초기에 시험했던 제조법이었다.

    그 후로 여러 번의 시험을 거치며 그 꽃이슬이 다른 재료와 함께 섞이면 독성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른 초목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제조법들을 아는 이는, 금벽이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제조법은 지금의 금벽, 옥비가 진인에게 알려주었다는 의미였다.

    ‘분명 독이 없는 향환의 제조법을 알고 있었을 텐데, 굳이 독이 있는 것을 알려주다니…….’

    이는 대장공주를 죽이겠단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온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렀다.

    ‘옥비가 대장공주를 죽여 봐야 뭐하겠어. 당연히 뒤에 있는 황제 때문이겠지.’

    의안왕이 황제가 되다니, 역시 뭔가 내막이 있을 것 같았다.

    선제가 아직 건재할 때 대장공주는 황족 중 가장 큰 권세를 누리고 있던 사람이라 봐도 되었다.

    ‘이미 공주는 출가했지만, 여전히 위협적이겠지. 그런 대장공주가 두려운 거야. 그러니 죽이고 싶은 것이겠지.’

    지온은 창을 열었다.

    창 아래 흐르는 개울로 향환 두 알을 모두 던진 지온은 미소를 지었다.

    ‘너희가 죽이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면, 난 지켜야지!’

    * * *

    불과 며칠 만에 사방전의 전주(*殿主: 전의 주인)가 임명되었다.

    매우 놀란 청옥과 함옥은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사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며칠 전에 제가 큰일을 겪어 능양사숙께서 미안한 마음에 해주셨나 보네요.”

    “…….”

    두 사람은 침묵했다.

    ‘그걸 누가 믿어!’

    수년을 괴롭힘 속에 살아온 자신들이 아닌가! 그동안 주지가 그에 대한 한마디라도 한 적이 있었던가? 위해주기는커녕 좋은 소리 한 번을 듣지 못했다.

    함옥은 차오르는 존경심에 넙죽, 오체투지라도 할 듯한 얼굴이었다.

    “진짜, 진짜 대단해요, 사저! 사방전의 전주라니! 주지를 제외하면 사방전의 전주가 가장 높잖아요! 이제 누가 감히 우릴 무시하겠어요!”

    지온이 그녀의 이마를 콩, 때리며 말했다.

    “아첨을 귀엽게도 하는구나.”

    그리고 잠시 수다를 떨던 지온이 두 사람에게 정식으로 일을 주었다.

    “청옥 사매, 함옥 사매. 난 조방궁에서 자라지 않아 이곳에서 하는 일들이 익숙하지 않아요. 그러니 앞으로 사방전은 두 사람에게 맡길게요.”

    청옥은 격한 감동이 차올랐다.

    “사저, 지금 저희에게 일을 맡기시겠단 말씀이신가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전주 직은 본래 스승님의 것이어야 했어요. 사매들과 난 같은 나무에서 난 자매들인데 내가 사매들이 아니면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포권을 한 청옥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저! 최선을 다할게요! 누구도 이 자릴 건드릴 수 없게 하겠어요!”

    순간 놀란 지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전주 직을 달라고 한 것은 그저 전주 신분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래야 일하기가 편하지 않겠는가?

    ‘뭐, 그래도 이런 투지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조방궁에 눈들을 심어두는 것도 소홀할 수 없었다. 대장공주를 해코지하려던 향환 건이 걸렸으니, 어쩌면 저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대장공주를 해치려 할 수도 있었다.

    원래 신분으론 갑자기 대장공주를 찾아 가까운 모습을 보이면 다른 이들의 의심을 사게 될 터였다.

    ‘그러다 황제가 숨겨둔 눈에 걸리면 큰일이지.’

    “아, 앞으로 사방전에 규율 한 가지를 추가할게요. 매월 한 번 첨을 뽑아 당첨된 사람은 전에 모신 화신(花神: 꽃의 신)께 소원을 빌 수 있게 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던 함옥이 물었다.

    “사저, 사방전에 향을 올리러 오는 이들 대부분이 원하는 것이 있어서 향을 올리러 오는 거잖아요. 그거랑 뭐가 다른 거예요?”

    그래도 지온의 뜻을 짐작한 청옥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저는 당첨된 사람이 비는 소원은 특별하게 취급하실 생각이신 거예요?”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우리가 당첨자의 소원을 들어줄 거예요.”

    사매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함옥이 말했다.

    “사저, 그런 말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도성에 관직이나 부귀영화를 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다 당첨자가 영전을 원하기라도 하면 저희가 그걸 어떻게 들어 주겠어요?”

    “어떻게 소원을 이뤄 줄지는 화신의 뜻에 달렸죠.”

    지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온 마음을 다해서 빌고 최선을 다하면 기적이 일어난다죠. 그러니 당첨된 사람이 화신께서 이뤄주실 것을 믿고 전심(全心)으로 빌면 기적이 일어날 거예요.”

    * * *

    청명절이 지난 후, 사방전은 줄곧 문을 닫고 있었다.

    향객(*香客: 향을 올리러 오는 객)이 찾아와 연유를 물으면 조방궁의 여관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사방전을 정돈하고 있습니다. 며칠 후에 새로이 문을 열 것입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여관들의 말대로 사방전은 다시 문을 열었다.

    자주 찾아왔던 향객은 사방전의 장사(*掌事: 총관직)가 바뀌었단 사실을 눈치챘다.

    이번 장사는 스물 한둘이나 먹었을까 싶은 젊은 선고였다.

    오관이 단정한 선고는 옅은 쪽빛 도포를 입고 친절하면서도 공손한 모습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한 무리 귀부인들이 향을 올리기 위해 찾아오자 그녀는 제자들과 함께 직접 나와 귀부인들을 맞았다.

    그중 머리를 한쪽으로 동그랗게 올려 보석 장신구를 단, 도심계(挑心髻) 머리의 부인이 그녀를 몇 번 훑어 내리다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유(刘) 장사(掌事)는 어디 가고, 어찌 사람이 바뀌었는가?”

    새로운 장사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부인, 유 장사께선 비림(碑林)으로 가셨습니다. 빈도(貧道)는 이번에 새로 장사직을 이어받은 청옥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방궁 뒤엔 비림이 한 채 있었다.

    비림은 비석들을 시대별로 모아 놓은 곳으로, 명가(名家)들의 묵적(*墨跡: 먹으로 쓴 흔적으로, 훌륭한 필체를 말함)을 볼 수 있는 도성의 이름난 명소 중 한 곳이었다. 그래서 서생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오송원보다 유명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림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워졌기에 특정한 날에만 개방했다. 그래서 향을 올리러 오는 이들의 시주가 거의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귀인들과 안면을 틀 기회도 없어, 사실상 그곳으로 갔다는 것은 쫓겨나 좌천된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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