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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58)화 (58/385)
  • 58화. 서로 도와야 함이 옳은 것이겠지요

    모든 약에는 독이 존재했다. 아무리 좋은 약도 용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독으로 변하는 일은 너무도 흔한 일이 아니던가.

    그 흔한 일을 두고 대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해봐야 능양진인인 자신이 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만 증명이 될 뿐이지 않겠는가? 그 후에 다시 정성을 다해 대장공주에게 죄를 빌면 대장공주 역시 중한 벌은 내리기 어려울 터였다.

    능양진인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 부분을 간과한 것이 맞다. 그러나 사숙을 이리 겁박해서야 되겠느냐? 내가 향환 제조에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너무 과한 것 같구나.”

    무기력하게 고개를 떨군 능양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나에게 이리 큰 선입견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그리 상처가 컸느냐? 낮에 일은 네 사저가 잘못한 것이 맞다. 그래서 이 사숙이 네 사저를 벌하지 않았느냐? 화옥은 제 목숨까지 내놓으며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도 네가 이리 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과한 것 같구나.”

    그러나 그녀의 예상이 빗나갔다.

    능양진인보다 더욱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놀란 토끼 눈을 한 지온이 말했다.

    “사숙,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언제 사숙을 겁박하였는지요?”

    감정을 잡고 표정 연기를 하던 능양진인은, 지온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 연기하는 것도 잊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지온의 말은 능양진인의 태도와 상관없이 이어졌다.

    “사조(師祖)께선 문하에 제 스승님과 사숙, 단 두 분의 적전제자만을 두셨습니다. 비록 사조 아래에서 나온 뒤엔 각자 제자를 들이시며 맥이 나누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은 한 가족이 아닌지요? 가족끼리 어찌 뒷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

    손수건을 꺼내 든 지온이 없는 눈물을 찍어 닦았다.

    “사실 저와 사숙은 동병상련이지요. 저는 스승님을 잃었고 사숙께선 사저를 잃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픔을 함께한 사람끼리는 서로 도와야 함이 옳은 것이겠지요.

    오늘 이리 늦은 시간에 사숙을 찾아뵌 것 역시 혹시나 사숙께서 이 일에 연루가 되어 돌이킬 수 없을까 저어되어 찾아온 것입니다.”

    능양진인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독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안 것도 아니고, 다른 날은 잠이 솔솔 왔나 보구먼.’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당연히 사숙을 도와드려야지요.”

    지온이 진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사숙께서 이런 위험에 처하게 되셨는데, 제가 가만히 있으면 어디 그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스승님께서 아직 조방궁에 계실 때, 도법은 자신이 더 깊었으나 향환의 조향과 제조에 관한 것은 사숙께서 더 잘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다 보니 스승님께선 그저 약경(藥經)을 달달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지요.

    그러다 보니 약재가 가진 성질의 상생과 상극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지식 중, 일이할 정도는 배웠습니다. 사숙처럼 스스로 제조법까지 만들 정도는 되지 않으나, 약재를 한두 가지만 빼거나 더 넣으면 성질이 바뀌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정도를 아는 것이지요.”

    고개를 든 지온이 능양진인을 향해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숙, 절 믿으신다면 제가 향환 제조법을 보충해 보면 어떠시겠습니까? 혹시 아나요, 대장공주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그리된다면 공주님께선 사숙을 더욱 믿고 중용하실 테고요.”

    지온의 미소를 마주한 능양진인은 그제야 이해했다.

    ‘이 계집은 역시 날 겁박하러 온 것이야!’

    사실을 알게 된 후 바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굳이 오늘, 이리 늦은 밤에 찾아온 것은 아마 오늘 낮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배짱은 참으로 두둑한 아이로군.’

    화옥을 처리하여 자신이 아무나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그저 꽃 같은 계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더니, 이젠 주지인 자신에게 제안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떤 후환이 있을지 미리 생각해야 했다.

    사실 후환이라고 해봐야 조금 전에 생각한 것에서 크게 다르진 않을 터였다. 사질이 대장공주를 찾아가 독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해도 자신이 진심으로 사죄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하더라도 잘못은 잘못이 아니던가? 대장공주의 신뢰에 금이 갈 것은 분명하기에 대장공주의 반응을 쉽게 예측하긴 어려웠다.

    ‘만약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가서 이야기를 전하는 일 따윈 없겠지.’

    더구나 스스로 향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대장공주께 더욱 신뢰를 받게 해준다니…….

    능양진인의 눈이 번들번들 빛났다.

    지온은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선택권을 능양진인의 손에 넘겨준 참이었다.

    끝까지 대립 구도로 버티는 것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까지 활활 태울 위험이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이야기한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오송원의 향수 사건과 화옥의 일까지 겪은 지온이 다른 수를 쓰지 않을 것이라 능양진인이 어찌 확신하겠는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것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지.’

    빠르게 결정을 한 능양진인이 자비로운 웃음을 보였다.

    “네가 조방궁에 온 지도 이제 여러 날이 지났으니 적응은 다 하였을 것 같구나. 네 사저가 이리되어버린 상황이라 이 사숙을 도울 손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는데, 네가 도와줄 수 있겠느냐?”

    지온이 온순한 미소를 보였다.

    “사숙의 말씀인데 사질이 어찌 거절하겠는지요? 사숙께서 하라 하시는 대로 이 사질이 하겠습니다.”

    능양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저가 원래 장사(掌事)를 맡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내가 맡아보는 것이 어떠하냐?”

    장사(掌事)는 조방궁 안에 여러 일을 총관하는 자리였다. 한마디로 실권이 있는 직무인 것이다.

    ‘이 정도면 꽤 챙겨준 게지?’

    그러나 지온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사숙, 사질은 외부에서 수년을 떠돌아다니느라 일을 보는 것은 사저만 못하여 그리 맡기시는 것은 제게 무리가 있을 듯합니다.”

    ‘장사로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게야? 조금 전까진 시키는 대로 하겠다더니!’

    오르는 혈압을 누르며 능양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떤 일이 잘 맞을 것 같은지 네가 말해 보아라.”

    지온이 방긋 웃었다.

    “사숙과 제 스승님께선 같은 문하의 적전제자이셨습니다. 사숙께서 조방궁의 주지가 되셨으니 조방궁의 법도에 따르면 저의 스승님께선 사방전의 전주(*殿主: 전의 주인)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 않은지요?”

    ‘감히 사방전에 눈독을 들이다니! 절대 안 돼!’

    능양진인은 얼굴을 차게 굳혔다.

    “전주의 직(職)은 내연(*內延: 황실의 기관 중 하나)에서 임명하는 것이지 내가 혼자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온은 여전히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사숙께선 여기저기 연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지요? 그리 맺은 연을 이용하시면 되게 해주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런지요?”

    “안 된다!”

    능양진인이 한마디로 거절하자 지온이 아쉽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사숙 쪽 연이 통하질 않는다니 그럼 대장공주님께서 가지신 연에 기대를 해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지난번 태자 전하께서 제 꿈에 나오신 일이, 대장공주님께 추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 같았는데, 대장공주님께서 태자 전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 능양진인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어찌 그 일을 잊고 있었던 게야!’

    눈앞의 아이는 귀(鬼)나 신(神)을 논하는, 상당히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는데 하필 또 대장공주가 그것을 믿어버린 것이다.

    ‘또 태자 전하를 들먹이며 헛소리를 하게 두었다가는…….’

    “급할 게 무엇인가?”

    능양진인의 말투가 부드러웠다.

    “연을 통할 때 통하더라도 천천히 해야지, 아니 그런가?”

    누그러진 능양진인의 말에 지온이 빙긋 웃었다.

    “사숙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사숙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너무 성급하게 굴었지요? 그럼 우선 향환 제조법 이야기부터 해보시겠는지요?”

    촛불 빛 아래, 지온이 든 붓이 향환 제조법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숙께서는 조향에 정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신 듯합니다. 배합이 정말 좋네요.”

    지온이 감탄했다.

    그녀의 말투가 진실되어 보이자 능양진인이 겸양을 보였다.

    “별 것 아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지온이 그녀의 말꼬리를 주워 물었다.

    “제가 오래된 고서적에서 이와 비슷한 제조법을 본 일이 있거든요. 본래 무척 평범한 배합이었는데 사숙께서 살짝 건드린 것만으로 사람에게 이로운 향을 발산하는 것뿐 아니라 숙면에 도움을 주는 비방(祕方)이 되었습니다.

    이런 배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절정의 총명함과 화려한 기술, 그리고 고금을 아우르는 지식을 가진 박학다식한 기재라는 것이 분명하지요.”

    ‘무슨 칭찬을 이리 진지하게 한단 말인가?’

    능양진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붓이 멈추더니 지온이 단어 하나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제 생각에는 이 꽃이슬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본 능양진인이 멈칫하며 물었다.

    “이 꽃이슬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이냐?”

    “본래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몇 종류의 다른 재료와 함께 섞이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지온이 또다시 몇 가지 다른 원료들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믿기 어려우시면 사숙께서 따로 여기 이 원료들만 가지고 용량을 늘려 토끼나 오리, 닭 같은 것들에게 실험을 해보셔도 됩니다. 길어야 한 달이면 다 죽을 겁니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눈빛에 결국 능양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웃음을 보인 지온이 제조법 아래 몇 글자를 써넣었다.

    “물론 사람이 닭이나 오리보다 강하니 죽지는 않을 테지요. 그러나 독성이 쌓였을 때 다시 몇 가지 약재료가 추가되면 체내에 있는 독성이 전부 밖으로 끌려 나오거든요. 그때가 바로 이 향환이 독환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죽음을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낮은 음성으로 죽음을 말하는 지온 때문에 능양진인은 그야말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향환은 오래 사용해야만 그 독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설사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곧장 원인으로 향환을 찾아낼 수는 없을 테고요. 살인멸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다시없을 좋은 선택이 되겠지요!”

    능양진인이 기겁하며 곧장 그녀를 나무랐다.

    “대체 그런 생각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네 스승이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야? 어린 소저가 살인이니, 멸구니 그런 말을 입에 올리다니! 옳지 못한 것이다!”

    지온이 고개를 숙였다.

    “네, 사숙. 앞으론 사숙을 본받아 조향에만 전념하도록 하겠습니다.”

    “…….”

    능양진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대답이 꼭 앞으론 ‘살인’은 입에 올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향환’ 제조에만 몰두하겠단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날 비꼬는 것인가?’

    지온의 붓이 다시 꽃이슬 위로 옮겨가더니 글을 써 내렸다.

    “이 제조법은 무척 고치기도 쉽습니다. 이슬을 채취하는 꽃의 종류만 바꾸면 되거든요. 숙면효과를 고려하여 목초(木草)로 바꾸면 향이 더욱 청아해져 이로우니 대장공주께서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지온이 종이를 건넸다.

    “여기 있는 몇 가지 목초 중 한 가지를 골라 보시지요.”

    그것을 받아 든 능양진인은 조용히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있을 때 또다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시간이 많이 늦어 저는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새로운 향환은 최대한 빨리 대장공주께 전해드리는 것이 좋겠지요? 공주마마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말입니다.”

    그리곤 지온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하늘하늘 사방전의 문을 나서는 지온을 보며 한참을 말이 없던 능양진인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렀다.

    “여봐라!”

    그러며 능양진인은 생각에 잠겼다.

    ‘음흉한 것이 실력은 있구나!’

    며칠 전 나비를 부른 향수 일은 옥비까지 찾아와 묻지 않았던가?

    당시 상황에 대해 당연히 능양진인은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할 수 없었다. 제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지게 되지 않겠는가?

    ‘무슨 놈의 태자가 꿈에 나타나고, 향수로 온갖 나비들을 불러들여! 수작질도 참으로 다채롭지!

    그러나 그것으로 명성을 높여 보겠다는 수작이라면, 그 꿈은 깨야 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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