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57)화 (57/385)
  • 57화. 아주 정직한 사람

    화옥의 시신을 들고 문밖을 나서던 여관들은 멀리서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등롱을 보았다. 등롱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구냐!”

    “저에요. 사매들이 고생이 많네요.”

    밤안개 사이에서 지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감탄이 절로 나오는 얼굴을 드러냈다.

    “사저.”

    자신의 손에 화옥이 들렸다는 것을 떠올린 여관들의 생각이 많아졌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방궁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사람이었던 지 사저에 반해, 화옥은 조방궁 주지의 대제자로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이였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 눈앞의 사저는 여전히 능운진인의 대사저로 멀쩡하게 잘 지내는 반면에, 화옥은 목숨을 잃고 비참하게 시신이 되어 들려 나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 모든 일은, 지 사저를 고깝게 본 화옥이 그녀에게 경고하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아니었던가.

    여관들은 자신도 모르게 지온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지온이 물었다.

    “뭘 하는 건가요?”

    가장 앞서있던 여관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급히 대답했다.

    “화옥 사저가 주지께 죄스러운 마음을 죽음으로 갚았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안장하러 가는 중입니다.”

    그때였다.

    화옥의 얼굴을 덮고 있던 머리칼이 밤바람에 날아가며 그녀의 퍼런 얼굴이 드러났다.

    그에 서아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헉, 숨을 들이마셨다.

    죽은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 본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눈빛이 다소 가라앉은 지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셨다고요?”

    “네.”

    지온이 앞으로 다가가 화옥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독을 먹은 건가요?”

    “네.”

    지온이 탄식했다.

    “사저가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잘못하긴 했어도 살아야 또 희망이 있는 것을요! 몸을 잘 추스르고 조금만 시간을 버티시지. 그랬으면 사숙께 부탁을 드려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고개를 숙인 여관들의 얼굴에도 역시나 슬프고 처량한 표정이 떠올랐다.

    여관들도 지온과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화옥이 자진할 만큼 이리 강직한 사람일 줄 그녀들이 알았던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토록 위풍당당하던 사람이 차가운 시신이 되었으니, 탄식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지온이 허리에 달았던 금기린(*金麒麟: 장신구)을 풀어 그녀들에게 건넸다.

    “사저를 좋은 곳에 잘 묻어 주세요. 경(經)도 읽어 주시고요.”

    앞에 있던 여관이 다른 여관들의 눈치를 살피며 잠시 망설이다 받았다.

    “네, 사저.”

    화옥의 시신을 들고 가던 여관들이 다시 뒤를 돌아본 곳에 시녀와 함께 사방전 문 앞에 선 지온의 가녀린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규방의 소저 같았다.

    “지 사저가 참 대범하다.”

    누군가가 조용히 한 읊조림에, 손에 쥔 금기린을 만지작거리며 가장 앞에 있는 여관이 말했다.

    “그래.”

    이리 큰 금덩이면 좋은 재료의 관을 준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미 죽은 이에게 좋은 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흉악한 마왕 역시 사람을 뜯어먹고 나서는 의복을 넣어 만든 의관총(衣冠塚)을 만들어주지 않던가.

    참으로 잔인한 자비심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여관이 몸을 떨었다.

    * * *

    제자의 보고에 능양진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리 늦게 찾아와 뵙기를 청했다?”

    “네.”

    “무슨 일인지 말은 했느냐?”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능양진인이 대답했다.

    “들라 해라.”

    “네.”

    이윽고 지온이 홀로 사방전에 들어왔다.

    “능양사숙을 뵙습니다.”

    능양진인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온하고 담담한 표정이, 마치 낮게 그런 일을 겪고 충격을 받았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역시 거짓이었군.’

    능양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다. 그래, 이리 늦은 시간에 쉬지 않고 무슨 일로 온 게냐?”

    지온 역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하여 사숙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 이리 찾아뵈었지요.”

    “오?”

    능양진인이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찻잔을 굴리며 말했다.

    “무엇이 마음에 걸린 것이냐?”

    “낮의 일입니다.”

    능양진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지온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사실 그보단 낮에 있었던 일로 제게 떠오른 것이 있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역시 사숙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리 찾아뵈었지요.”

    능양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편히 이야기하거라. 이젠 네 스승도 없고, 살펴 줄 부모님도 안 계시니 이 사숙이 네게 가장 가까운 이가 아니겠느냐? 그런 내게 말을 못 하면 또 누구에게 가서 이야기하겠어?”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사숙. 그래서 이 늦은 시간에 사숙을 귀찮게 찾아온 것이지요.”

    말을 마친 지온이 손을 내밀었다.

    “사숙, 혹시 이 향환을 알아보시겠는지요?”

    능양진인이 슬쩍 바라보곤 대답했다.

    “내가 직접 만들어 늘 대장공주께 보내드리고 있는 것이니 알다마다. 대장공주께서 가끔 다른 이들에게 내리기도 하신다지.”

    지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이 향환도 대장공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제가 이 향환을 사숙께서 만드신 것이란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음?”

    “오늘 오송원에서 그런 일을 겪고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정자에서 정신을 혼미하게 했던 향환이 이 향환의 성분과 아주 비슷한 것 같아 말입니다.”

    능양진인은 담담한 얼굴로 지온을 바라보았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조향 기술이란 것도 결국 비슷한 원재료 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비슷한 부분이 생기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지.”

    “그렇습니다, 사숙.”

    지온이 빙긋 웃었다.

    “말씀하신 원재료 중의 일부는 약재로도 사용되는 것이라, 오래 사용하면 몸에 좋지 않은 것들도 있는 것이지요.”

    능양진인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네가 말한 향환에 독이 들었다는 의미인 것이냐? 그러나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그 향환은 대장공주님의 심신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내가 특별히 제조한 것이다.

    그래서 대장공주께도 오래 사용하면 몸에 좋지 않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대장공주께서 계속 잠을 잘 이루지 못하시는 바람에 향환을 사용하는 것 외에 달리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신 것이야. 하여 어쩔 수 없이 계속 사용하는 중이었지.”

    “대장공주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지온이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능양진인이 아이를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그리 큰일을 어찌 대장공주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우리 조방궁은 대대로 황가를 모셔왔으니 어느 정도는 황가의 노복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대장공주님의 건강과 관련하여 당연히 숨김이 없어야지.

    너 역시 앞으로 잘 기억하여 그리 하도록 해라. 스스로 똑똑하다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돼.”

    그리 말하며 능양진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천지분간 못하고 잘난 척을 하는 것이 딱 제 나이 어린애로군.’

    지온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인정하기 어려운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향환의 제조법은 진짜 사숙께서 생각해내신 것입니까?”

    능양진인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제가 오래된 고서에서 비슷한 제조법을 본 것 같습니다. 아니면 나중에 고서의 방법으로 만들어, 사숙께서 만드신 것과 같지 않은지 비교해보는 것은 어떠십니까?”

    능양진인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위치가 어디, 제조법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게 아니라고 해서 흔들릴 만한 위치이던가?

    “고인(古人)들로부터 내려오는 조향법이 셀 수 없이 많으니 나를 비롯한 후인들이 그와 비슷한 배합을 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앞으로 너 역시 직접 만들게 되면 알 수 있을 게야.”

    “그럼 사숙, 향환의 품질이나 성질을 두고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은 해보셨습니까?”

    지온을 상대하는 것이 슬슬 짜증스러워진 능양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화옥이 지온에게 당한 것이야 본인이 바보 같았기 때문이라 칠 수 있겠으나, 자신은 당당한 조방궁의 주지가 아닌가? 그런 자신이 굳이 천지분간 못하는 어린애와 얽힐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별것도 아닌 것으로 저 아이와 이러쿵저러쿵 말을 섞어 봐야 나만 저 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지.’

    지금은 신경 쓰지 말고 그저 놔두는 것이 좋았다. 나중에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는 그때, 어른들의 세계가 얼마나 잔혹한지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겠는가! 그땐 겨우 꿀물에 약을 타는 정도로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정 믿기 어려우면 난택산방에 가서 직접 물어보거라.”

    지온이 미소를 비췄다. 그녀의 미소가 의미심장했다.

    “능양사숙께서 확인을 하셨다니 저도 안심입니다.”

    지온의 표정을 본 능양진인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저 아이가 또 무슨…….’

    지온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기왕 확인하셨다니 말씀드리지요. 사숙께선 이 향환을 만드는 방법이 조금만 달라져도 사용하는 이가 사망에 이를 수 있단 사실을 아셨는지요?”

    능양진인을 향한 지온의 얼굴에 빙긋, 웃음이 떠올랐다.

    “사숙께서 이 사실을 잘 모르셨나 봅니다. 저는 아주 정직한 사람이라, 제가 독이 있다 하면 그건 정말 독이 들었다는 뜻이거든요!”

    사방전은 침묵에 휩싸였다.

    지온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던 능양진인이 곧 입을 열었다.

    “농담도 잘하는구나. 대장공주께서 이리 한참을 사용하셨는데 독은 무슨……. 진짜 독이 들었다면 이미 예전에 태의(太醫)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찌 오늘까지 아무 일이 없었겠느냐?”

    “아마 태의라도 쉽게 발견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숙께서 이미 이 향환을 오래 사용하면 좋지 않다는 말씀을 드렸다 하지 않으셨는지요? 그러니 대장공주께서는 다소 몸이 불편하더라도 그저 그 탓이라고만 여기셨을 것입니다.

    사실 단순히 오래 사용하는 것만으론 그저 정신이 혼탁하고 잠이 많아질 뿐, 실제로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몸 안에 약 기운이 계속 쌓이는 것이 문제가 되지요. 그런 상태에 다른 재료 몇 가지만 추가하면 그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

    능양진인의 동공이 일순 좁아졌다. 눈앞에 있는 여아(女兒)가 더는 단순한 어린애로 보이지 않았다.

    ‘저 아이는 진실로 알고 있었던 것이야. 그러나 이 사실을 가지고 나를 겁박하려 들다니…….’

    능양진인은 가소롭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조방궁을 건사해 온 지도 벌써 십여 년이었다. 아무리 대장공주라 해도 이미 조방궁에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린 자신을 쉽게 어찌할 순 없을 터였다.

    설령 대장공주에게 이 사실을 고해바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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