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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56)화 (56/385)
  • 56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세요

    몸을 일으킨 지온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며, 애써 기운을 내어 입을 열었다.

    “화옥에 대한 소식은 못 들은 거야?”

    “화옥선고요? 무슨 일이 있어요?”

    “듣자니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같던데, 저희는 아가씨 찾는 게 급해서 제대로 듣진 못했어요.”

    지온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충직하다 해야 할지, 눈치가 없다 해야 할지…….’

    정자에서 있었던 일은, 임창백과 조 장군이 함께 소문을 막긴 했다. 하지만 이리 갑작스레 화옥에게 중한 벌이 떨어졌으니, 말이 조금도 퍼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마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옥과 함옥이 돌아왔다.

    “대사저!”

    득달같이 들어온 함옥이 날아갈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화옥이 사문에서 쫓겨났어요!”

    지온은 담담한 반응이었지만, 시녀 셋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뒤이어 따라 들어온 청옥이 방긋 웃음을 지었다.

    “이, 바보. 사저가 일부러 조 공자를 정자로 보내려고 우리더러 소식을 퍼트리라고 했잖아. 분명 계획이 있으셨을 건데 화옥이 그렇게 될 걸 모르셨을까 봐?”

    함옥이 제 머리를 쳤다.

    “아, 그렇지! 내가 진짜 바보네.”

    그리곤 차를 따라 지온에게 가져다주며 아양을 부렸다.

    “사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 좀 해주세요!”

    웃음을 지은 지온이 도로 물었다.

    “다들 이야기는 들었죠? 먼저 들은 이야기부터 해보세요.”

    함옥이 대답했다.

    “공자 두 분께서 조방궁 안에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화옥이 율법당에 끌려갔다고 들었어요. 다들 화옥이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건드리는 바람에 주지께서 그분의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어쩔 수 없이 화옥을 사문 밖으로 내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서아는 이야기를 들으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특히 공자 두 사람이 한데 뭉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지온의 소매를 붙들고 물었다.

    “화옥이 실은 아가씨를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거죠? 그래서 그때 일부러 저를 식당으로 보내어 사람들을 시켜 붙잡아 돌아오지 못하게 한 거예요! 아가씨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요! 아가씨, 벌써 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화옥이 하자는 대로 절 보내셨어요?!”

    하로 역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아가씨! 아무리 아가씨께서 생각이 있으셨다고 해도 너무 위험하셨어요. 만에 하나라도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하셨어요!”

    셋 중 담이 가장 큰 의운 역시 말을 더했다.

    “왜 저희에게 말씀을 안 하셨던 거예요, 아가씨? 아무리 받은 대로 갚아주려고 속아 넘어가 준 척한 거여도 아가씨께서 직접 나서시면 안 되지요! 저희를 놔두었다가 무얼 하시려고요!”

    시녀 셋의 이어지는 질책에 지온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알겠어.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너희들더러 하라고 할게.”

    모든 사정을 알게 된 함옥은 생각할수록 대단하게 느껴졌다.

    “일이 그렇게 되었던 거였군요. 대사저는 정말 대단하세요! 우린 몇 년을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할 방법 하나 없었는데 대사저는 오자마자 바로 화옥을 쫓아버렸잖아요! 하하하! 생각만 해도 진짜 기분이 너무 좋아요! 앞으로 누가 또 우릴 괴롭히기만 해봐라!”

    청옥이 얼른 주의를 시켰다.

    “함옥아! 화옥은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 거야. 혹시라도 앞으로 누가 조금 못된 짓을 한다고 다 쫓아낼 생각이면, 그만둬. 그러다 우리가 화옥처럼 될 수도 있어.”

    “나도 알지! 내가 어디 그런 사람이야?”

    함옥은 여전히 희희낙락 웃으며 한 손에 하나씩 청옥과 지온의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더라도, 난 사저가 둘이나 되잖아!”

    모두 기분이 좋은 터라 다 같이 축하를 하기로 했다.

    요리 실력이 상당한 하로와 청옥이 고급스러운 음식들을 푸짐하게 준비하기로 했다. 지온 역시 기운을 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다들 지온이 밖으로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방에서 내쫓기고 말았다.

    낭하에 기대어 앉은 지온은 작은 웃음을 지었다.

    짙었던 구름이 옅어지며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맑아진 날씨에 낮에 있었던 일도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다.

    * * *

    늦은 밤이 되었다.

    모두가 잠에 빠졌을 그때, 지온은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등롱을 든 서아가 날씨가 차가워진 바람에 몇 번이나 기침을 하며 물었다.

    “아가씨, 저희 지금 어딜 가는 건가요?”

    지온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사방전(司芳殿).”

    * * *

    사방전(司芳殿).

    연화등(*蓮花燈: 연꽃 모양 등) 위에 올라간 세 자루 초가 조용히 타들어 가며 사방전을 어스름히 밝혔다.

    부들방석 위에 앉은 능양진인은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주지, 죄인을 대령했습니다.”

    홑겹 옷에 머리를 산발한 여자 하나가 끌려 들어왔다.

    “스승님! 스승님, 살려주십시오!”

    자신을 끌고 온 여관이 손을 놓자마자 여자가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들려 했지만, 몸에 입은 상처가 중하여 여인은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여자는 화옥이었다.

    법회의 의장을 위해 입었던 연화복(*蓮花服: 연꽃이 수놓아진 옷 혹은 연꽃잎 모양의 옷)도, 정교하게 만든 부용관(*芙蓉冠: 연꽃모양 관모)도 없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너절한 화옥의 모습에서는 전에 보이던 고인의 기도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능양진인은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되도록 이런 일은 하지 말라 이미 경고하지 않았더냐. 내가 말을 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런 일을 벌이다니!”

    화옥은 눈물에 목이 메어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의 고통이 너무 컸고 후회와 한이 끝없이 밀려왔다.

    “스승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으니 제발 제자와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능양진인의 어조는 덤덤하기만 했다.

    “네가 이번에 이 스승에게 얼마나 큰 문제를 만들었는지 아느냐?”

    화옥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당연히 알고도 남았다.

    아무리 세(勢)가 전 같지 않은 임창백이라고 해도 훈귀 집안인 세가가 아니던가! 더욱이 최근 들어 황제의 총애를 크게 받아 뜨는 해인 조씨 가문까지…….

    “그걸 알면서 어찌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냐?”

    ‘그야 당연히…….’

    화옥은 속에서 치솟는 말을 애써 삼켰다.

    “스승인 내가 너를 너무 끼고돌았던 것이지!”

    능양진인이 낮게 일갈했다.

    “지난 수년간 네가 무슨 짓을 하건, 내 너의 뒤를 봐주고 수습을 해주었는데, 넌 은혜를 알고 갚기는커녕 결국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납작 엎드린 화옥이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제 죄를 빌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스승님. 제자가 스승님의 큰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스승님!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그리하지 않아? 일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내가 널 이 정도로 벌한 것이 이미 사정을 봐준 것임을 알아야지.

    임창백께서 이조차 못마땅하다고 하신 걸 듣지 못했느냐? 네 목숨을 살려둔 것만으로 스승의 도리를 다했음이야, 알아듣겠느냐!”

    능양진인의 말이 떨어지자 화옥은 더욱 회한이 몰려왔다.

    조방궁에서 거리낄 것 없이 지내온 지난날들이 얼마나 좋은 날들이었는지, 화옥은 잃고 난 지금에야 깨닫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더는 변명할 말조차 사라진 그녀는 그저 스승님만을 부르며 빌 뿐이었다.

    한바탕 화를 쏟아내고서야 능양진인의 눈에 작은 온기가 돌았다.

    몸을 일으켜 화옥의 앞으로 다가간 능양진인이 반 무릎을 하고 앉았다.

    “스승님…….”

    그런 스승의 모습에 화옥의 마음에 희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능양진인은 눈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낮에 그대로 끌려가며 지워내지 못한 화장 때문에 화장분과 눈물이 한데 뭉쳐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 산발한 머리와 피에 절어버린 홑겹 옷을 보자 동정심이 더욱 크게 밀려왔다.

    “네 죄를 알았느냐?”

    화옥이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앞으론 스승님의 말씀을 잘 들을 것입니다.”

    능양진인은 그녀가 반 무릎을 하고 앉을 수 있도록 손을 뻗어 화옥을 부축했다.

    “이 바보 같은 것아.”

    능양진인이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며 따뜻하게 말했다.

    “지난번 향수 일을 겪고도 아직 모르겠느냐? 네 사매는 만만한 아이가 아니다. 태자 전하께서 꿈을 빌어 나타나셨다니, 그것을 믿은 게야?”

    화옥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믿지 않아야지. 세상에 그리 공교로운 일이 어디 있다더냐, 분명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이야. 네 성질이 불같아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지.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네가 그런 일을 벌일 줄 이미 알고 조 공자를 끌어들였던 게다. 임창백과 조씨 가문의 힘을 이용해 내가 널 벌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야.”

    제 스승의 말에 화옥의 얼굴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스승님!”

    그녀가 능양진인의 옷을 붙들어 당겼다.

    “심계가 그리 어두운 아이를 스승님, 절대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지요!?”

    능양진인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널 이리 심하게 상처 입게 한 아이를 스승이 되어 어찌 가만두겠느냐?”

    그 말에 크게 감동한 화옥의 눈물샘이 다시 터졌다.

    ‘스승님께선 아직 내 편이신 거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날 벌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거야!’

    그러다 제 상황을 떠올린 화옥은 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스승님, 그럼 이제 저는 어찌합니까? 스승님, 명령을 다시 취하하셔서 저를 내쫓지 않으실 수는 없으실까요?”

    한숨을 내쉰 능양진인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나라고 널 남겨두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창백을 대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지 않으냐. 만약 여기서 일이 더 커져서 대장공주님까지 엮이게 되는 날엔 이 스승도 함께 쓸려갈 수 있음이야.

    너도 알겠지만, 내가 조방궁의 주지로 있으나 조방궁은 황가의 궁관이 아니냐. 그러니 조방궁의 주인은 대장공주님이시다. 만약 대장공주님께서 화가 나셔서 주지를 다른 이로 바꾸실 마음을 먹으면 어찌 되겠느냐?”

    화옥이 생각하기에도 역시 문제가 될 것 같은지라, 화옥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전 어쩌면 좋습니까, 스승님? 궁관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하지만 궁관 밖에선 살기가 힘든데…….”

    능양진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 스승이 있는데 힘들 것이 무엇이 있어? 이미 내가 다 준비를 해두었으니 넌 일단 궁관을 떠나 밖에서 안심하고 몸을 돌보고 있거라. 그렇게 일 년쯤, 상처를 치료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 일이 흐려질 때쯤 다시 돌아올 방법을 생각해보자. 그때도 넌 나의 대제자일 것이야.”

    그제야 안심한 화옥이 감격한 얼굴로 능양진인을 바라보았다.

    “제자, 스승님을 믿습니다. 스승님께선 정말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세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능양진인이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품에서 자기병 하나를 꺼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귀한 치료약이다. 기혈을 보하는 것에 특히 좋으니, 한 알을 먹거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야.”

    “네, 스승님.”

    화옥이 자기병을 받아 들자 다시 자리로 돌아간 능양진인은 그녀가 병을 열고 약을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승님, 어찌 향이 달콤한지요?”

    능양진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가 써서 먹지 못할까 봐 특별히 꿀을 넣었다.”

    “아!”

    화옥이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한 알을 꿀꺽 삼키자 능양진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사람을 시켜 널 밖으로 보내주마. 낮에 가면 부끄럽지 않겠느냐.”

    “네, 스승님!”

    감격한 화옥이 아픔을 참으며 그녀에게 깊이 절을 했다.

    “제자…….”

    말이 채 잇기도 전이였다. 순간 배를 움켜쥔 그녀가 벼락같이 고개를 들었다.

    “스, 스승님……?”

    능양진인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옥이 믿을 수 없단 듯 입을 열었다.

    “이, 이건…… 도, 독약……?”

    능양진인은 평온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 없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화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대체 왜…… 저를……?”

    화옥은 발버둥 치며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능양진인은 너무 멀었고 고통은 너무도 지독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목숨이 끊어졌다.

    자신의 스승이 이럴 리가 없다고 믿은 화옥의 두 눈은 부릅뜬 채였다.

    사방전에 다시금 고요가 찾아들었다.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똥을 만들어 내며 초가 타올랐다.

    찻잔을 든 능양진인이 입을 열었다.

    “여봐라.”

    문밖에서 지키고 서 있던 여관이 들어왔다.

    “주지…….”

    슬픔이 가득한 눈빛으로 화옥을 바라보며 능양진인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의 짐이 컸던지, 죽음으로 죄를 갚았구나. 데려가 좋은 곳에 안장해주어라.”

    “네.”

    화옥의 몸엔 곤장형을 당한 상처 외에는 아무런 흔적조차 없어 여관들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주지의 대제자로 고고하던 화옥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결국 자진하여 삶을 마감한 것을 보며 세상일이 참으로 무상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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