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과거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그녀는 빨리 자리를 정리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옥종화가 문을 나서려던 그때, 의안왕이 그녀의 팔목을 잡고 책장 뒤쪽으로 그녀를 끌었다.
그녀는 군자육예(*君子六藝: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이며, 이는 각각 예학(예법), 악학(음악), 궁시(활쏘기), 마술(말타기 또는 마차몰기), 서예(붓글씨), 산학(수학)을 말한다)에 능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꾸준하게 해왔기 때문에 팔 힘도 강했지만, 무엇에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의안왕은 그런 그녀의 팔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군왕 전하.”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성을 찾으시지요. 제가 소리를 지르면 저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제야 손에 힘을 푼 의안왕이었지만, 그녀를 보내주지는 않았다.
“종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가 그녀를 응시했다.
“정말 태자비가 되는 것이냐.”
“그 일은 제 할아버지께 여쭤보시지요.”
그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의안왕의 상태를 보아하니, 이 자리에서 부정하게 되면 희망을 품을 것이고, 그렇다고 또 긍정하자니 다시금 그를 자극하게 될 것 같았다.
‘그가 이성을 잃고 선을 넘으면 결국 손해는 내가 보게 될 거야.’
하여 그녀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역시나 전과 다름없는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 의안왕은 더 크게 흥분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물었다.
“형님을 좋아하느냐?”
“태자 전하께서는 군왕 전하께도, 제게도 모두 좋은 형님이자 오라버니이십니다.”
그녀의 대답에 의안왕의 눈이 번득였다.
“그러니까, 넌 형님을 그저 형님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냐?”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럼 어서 혼담을 거절해라. 이대로 가다가 내가 미칠 것 같다. 매일 네 혼사를 두고 시시덕거리는 놈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그들에게 주먹을 날릴 것 같단 말이다.”
깊게 숨을 들이쉰 그녀가 그를 다독이듯 말했다.
“군왕 전하, 무슨 일이든 일단 내일 다시 이야기하심이 어떠신지요?”
의안왕이 거절했다.
“안 된다! 혼담을 거절하겠다고 약조해라! 너도 알겠지만 내가 너를…… 너를…….”
“전하!”
그녀가 그의 말을 끊었다.
“혼인은 결국 어르신들께서 결정하시는 일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시면 내일 저희 할아버지께 이야기를 해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그러자 의안왕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마음이 흔들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끝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러했다.
“선생님은 네게 강요하지 않는 분이다. 그러니 네가 거절한다면 선생께서도 반드시 네 뜻에 따라주실 것이야.”
“…….”
의안왕이 핵심을 정확하게 찔러오자, 옥종화도 어쩔 수 없었다.
“전하, 이 일은 그리 급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말만 나왔을 뿐이라 할아버지께서도 아직 고민 중이신 것을요. 더구나 할아버님은 제가 황가로 시집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군왕 전하도 제가 정쟁이나 암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번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제가 황가의 사람이 되는 것은 너무 번거로운 일입니다.”
의안왕의 감정이 가라앉는 듯하자,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낸 그녀가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가 마저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할 틈도 없이 의안왕의 입이 다시 열렸다.
“종화, 나도 내가 형님보다 부족하단 것을 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내가 형님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 만약…… 네가 내게 시집을 온다면 난 분명 형님보다 네게 더 잘해줄 수 있다. 형님은 태자이니, 앞으로 황제가 되실 것이다. 그럼 아무리 너를 중히 생각한다 해도 반드시 다른 여인을 들이셔야 하겠지만, 난 너만 있으면 돼. 평생토록 오직 너만, 영원히 너만 있으면 된다.”
끝내 속내를 꺼낸 그가 주절주절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가 이 혼담을 거절하면, 상황이 좀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자. 그 후에 내가 아버지께 다시 네게 혼담을 꺼내라는 말을 올리겠다. 우리가 혼인을 하면 내가 받은 봉지(封地)로 가자. 그곳이면 아무도 우릴 건드리지 못할 것이야…….”
미래를 이야기하는 의안왕의 눈 속에 희열이 넘실거렸다. 그는 미소까지 짓고 있었지만, 옥종화의 마음속엔 불안이 들어찼다.
‘역시 심마(*心魔: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마귀)에 들었어.’
이대로 거절하거나, 자리를 피하려 하면 그를 자극할 게 분명해 보였다.
이젠 누군가 이곳에 찾아와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만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 그를 다시 현실로 불러들여야 했다.
‘금벽인 어디 있는 거지? 저녁 식사 때문에 날 부르러 와야 하는데?’
그렇게 그녀가 초조해하던 순간, 서재의 문이 벌컥 열렸다. 상상의 나래에서 깨어난 의안왕은 얼른 그녀를 끌어당겨 입을 막고는 몸을 숨겼다.
찾아온 이는 금벽이가 아니었다.
서원의 도포를 입은 이가 길고 짙푸른 도포를 휘날리며 책장을 스쳐 지나갔다.
서책을 찾는 듯 보이던 그가 한쪽에 있던 책장 앞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인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군왕 전하,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습니까?”
당황한 의안왕은 그제야 자신의 옷자락이 책장에 끼인 것을 발견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옥종화를 풀어준 의안왕이 책장 뒤에서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루안, 자네였군!”
루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네. 선생님께서 내일까지 책문(*策問: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 답하게 하는 것)을 내라고 하시어 어쩔 수 없이 밤에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
의안왕은 한쪽에 서 있었다.
서책 한 권을 꺼내어 훑어보던 루안은 의안왕이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전하께서도 찾으실 서책이 있으십니까?”
의안왕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옥종화가 아직 뒤에 숨어있었기 때문에, 루안이 떠나면 그 후에 다시 이야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안의 말을 들으니 오늘 밤 책문을 쓰기 위해 아마도 늦게까지 서책을 보려는 것 같았다.
그때 밖이 소란해졌다.
“군왕 전하! 군왕 전하!”
“다들 어서 찾아라! 태자께서 찾으시는데, 군왕 전하는 어디 가신 것이야!”
루안까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더는 방법이 없어진 의안왕은 그를 향해 웃어주고는 서재를 나갔다.
“나 여기 있네.”
이윽고 밖이 조용해지자 루안은 손에 든 서책을 내려놓고 곧장 책장 뒤로 돌아갔다.
책장 뒤쪽 어두운 곳에 무릎을 꼭 끌어안은 그녀가 있었다.
“괜찮나?”
사실 그녀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고백을 받은 것뿐인 것을. 더구나 자신이 대응도 잘하여 의안왕이 선을 넘는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괜찮냐는 그의 한 마디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 * *
얼마 지나지 않아 무애해각에 해구(海寇)들이 들이닥쳤다.
그날 밤, 그녀가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서원은 이미 해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따라 해구들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활에 맞아 돌아가셨고, 그녀는 바다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3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 * *
조금 전 보았던 금벽이를 떠올리자 구역감이 든 지온은 손으로 입을 막고 두어 번쯤 구역질을 했다.
조용히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낸 루안이 그녀에게 건넸지만, 그녀는 손을 저었다. 그리고 가만히 몸을 돌려 나무에 기댔다.
지온의 좋지 않은 얼굴색을 살피던 루안이 읊조렸다.
“아무리 흉내를 그럴듯하게 내어도 본인이 될 순 없지.”
옥종화가 입궁하여 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역시 분노했었다.
그녀는 이미 죽었는데, 어찌하여 떠나는 길조차 깨끗하게 편히 갈 수 없게 하는 것인가!
그녀의 이름에 기어코 먹칠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며 그는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허울뿐인 이름이 아닌, 사람 그 자체였다.
그녀가 나타난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전혀 다른 외모에, 과거와는 조금도 관련 없는 신분을 가졌지만, 자신은 지 소저의 안에 담긴 것이 옥종화의 영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옥비가 그녀와 똑같이 화장하고,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에겐 세상 누구보다 낯설었다.
옥종화라는 이름을 여러 사람이 쓴다 하더라도, 진짜 그녀는 단 한 명이지 않은가.
이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았던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만 돌아가 쉬고 싶어요.”
루안은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시오.”
어쩌면 지금이 지 소저의 정체를 캐물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루안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미 조사를 통해 지씨 가문의 큰소저에 관한 대부분의 일을 알고 있었다.
‘아마 기둥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 영혼이 바뀌었겠지.’
다른 이들은 이미 사계절을 세 번이나 지냈을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눈 한 번 깜빡인 시간이었겠지. 그리고 낯선 이의 몸에서 깨어난 그녀에게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별일이 없었다면 모를까, 그녀의 정혼자가 되었을 이는 유명을 달리했고, 그녀에게 마음을 강요하던 이는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자매처럼 지냈던 이가 황비가 되어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 사람은 루안, 자신보다 더욱 신뢰하던 사람이었으니…….
‘지금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상황이 이러한데 그녀가 제 진짜 정체를 인정하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자신이 알았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
두 사람은 가는 동안 더 이상의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머무는 소원(小院)에 도착한 지온이 몸을 돌려 인사했다.
“고마워요.”
루안은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그녀의 작은 몸은 그대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순간 마음이 흔들린 그가 그녀를 불렀다.
“기다리시오.”
지온이 그를 돌아보자 대나무 피리가 휙, 날아왔다.
얼떨결에 피리를 잡은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요하면 피리를 부시오. 내 사람들이 곧장 도착할 거요.”
어리둥절해진 지온이 그에게 물었다.
“장소에 상관없이 부하들이 다 들을 수 있는 건가요?”
루안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가며 얕은 미소가 루안의 얼굴에 떠올랐다.
“도성 전체. 너무 외진 곳만 아니라면…….”
“……네.”
* * *
집으로 들어간 지온은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손에 든 대나무 피리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역시 루안이 북양왕과 원수가 된 일에는 뭔가 숨겨진 사정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방금 그 말은 북양왕부가 도성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저이의 손에 있단 것이 아닌가?
‘그럼 어째서 천 리 길을 떠나 도성까지 온 거지? 무엇을 위해서?’
* * *
지온이 지쳐 낮은 침상에 잠시 기대 누워 있을 때 시녀들이 돌아왔다.
그녀가 벗어둔 신을 본 서아가 기쁜 듯 소리를 질렀다.
“벌써 돌아오셨어……! 아가씨! 아가씨!”
시녀 셋이 달려 들어왔다. 그녀가 멀쩡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본 시녀들은 가슴에 무겁게 얹어있던 돌덩이가 내려가는 듯했다.
“아가씨, 돌아오셨으면 저희를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하로의 말에 서아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아가씨께서 저더러 식당에 다녀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갔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렸어요. 간신히 빠져 나와 다시 정자에 갔는데 아가씨는 안 계시고, 제가 얼마나 속이 탔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