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54)화 (54/385)
  • 54화. 저는 누구죠?

    상해(桑海)로 돌아간 다음 해에 할아버지께 서신 한 통이 도착했다.

    할아버지에겐 어려서부터 함께했던 늙은 노복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학업에 재능을 보이자 할아버지는 노복의 집안 전체를 면천(免賤)하고 노복의 아들이 주부(*主簿: 관직명)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에게 시운(時運)이 따라주질 않았다. 노복의 아들이 주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병에 걸렸던 것이다. 결국, 그는 나이든 아버지와 어린 딸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몸이 좋지 못했던 늙은 노복은 손녀를 제대로 키울 방법이 없었고 결국 고심 끝에 자신이 전에 모셨던 주인에게 손녀를 부탁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자비가 넘치는 분이셨다. 더구나 부탁한 이는 가문에서 오래 함께 지낸 노복이었으니, 할아버진 곧장 사람을 보내어 노복과 손녀를 데려오셨다.

    바로 다음 해, 노복이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손녀는 옥종화와 함께 자랐다.

    손녀의 이름은 금벽이었다.

    * * *

    “무엄하다! 어디 감히 폐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냐!”

    높고 간드러진 고함이 울렸다.

    지온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아래로 눌렀다. 곧이어 그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뵙기 어려운 폐하의 용안에 놀라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이 공공.”

    작은 소동이 황제의 관심을 끌었고, 고개를 돌린 황제가 놀란 듯 입을 열었다.

    “루안이 아닌가? 자네도 이곳에 있었는가?”

    루안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예, 폐하.”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자네가 다른 이를 위해 나서다니 의외로군. 그 소저는…….”

    황제의 어조에서는 호기심이 가득 느껴졌지만, 루안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피해자입니다. 신(臣), 작은 사건을 만나, 조금 전 해결하고 오는 길이였습니다.”

    “그랬나.”

    금세 흥미를 잃은 황제의 시선이 지온의 머리끝을 스쳐 옆에 있던 옥비에게로 향했다.

    “종화, 우린 그만 가지.”

    “네, 폐하.”

    눈앞을 지나는 발걸음 소리가 지온의 머리를 터트릴 듯 크게 울리고 있었다.

    * * *

    황제가 영령당에 들어가자 그제야 한숨을 돌린 이들은 각자의 자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안은 그 기회를 틈타 지온을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향했고 그 뒤를 유씨 가문의 형제들이 따랐다.

    “담이 크다면서요? 그런데 폐하를 뵈었다고 바로 정신 줄을 놓았습니까?”

    유모지의 비웃는 듯한 말에도 지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던 유신지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루안이 별일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폐하를 뵌 것이 처음이라 너무 놀라 그런 것이겠지.”

    “그렇소?”

    의심하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훑던 유신지가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근데 두 사람은 대체 무슨 관계요?”

    루안의 시선이 유신지를 향했다.

    “처음 영령당에서 이미 루 형과 지 소저가 서로 아는 사이란 것은 알았소. 그런데 인제 보니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닌 것 같군. 지 소저가 인적이 드문 정자에서 일을 당할 뻔했는데, 루 형은 어찌 그리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소? 그리고 두 사람, 대체 나무 아래에서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이오? 설마하니 루 형의 입담이 그리 좋았던 것이오?”

    “내가 대공자에게 그걸 보고해야 하나?”

    차가운 루안의 대답에도 유신지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필요 없지. 그러나 지 소저는 내 아우와 혼담이 오갔던 사람이오. 루 형과 지 소저가 일찍이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다면, 그 때문에 내 아우의 혼담이 깨졌다고 의심할 수도 있지 않겠소?”

    “유신지!”

    루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다른 이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 유씨 가문의 가풍인가?”

    루안의 그런 모습에도 유신지는 오히려 더 큰 미소를 보였다.

    “루 형에게 지 소저는 역시나 평범한 존재가 아니로군. 내가 아무리 귀찮게 들러붙어도 제대로 화 한 번 내지 않던 루 형이 아니오? 그런데 화를 내게 만드는 이리 쉬운 방법이 있었네, 그려.”

    루안이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망상은 그만하지. 난 자네의 친우도, 적도 아니네. 지 소저 역시 자네 가문과의 혼담이 파기됐으니 두 사람과 더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고.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였는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자넨 물을 자격이 없어.”

    작은 한숨을 내쉰 유신지의 음성이 돌연 애원하듯 바뀌었다.

    “루 형, 참으로 무정하시오. 조금 전만 해도 내가 두 사람을 도와 사건을 덮어 줬는데, 실컷 이용만 하고 이젠 상관없는 사람이라니, 너무하지 않소!”

    “…….”

    그때, 지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표정이 다소 편해진 것이 아마도 충격에서 헤어 나온 것 같았다.

    “꼭 알고 싶으세요, 대공자님?”

    유신지가 금방 반색하고 나섰다.

    “말해주시겠습니까?”

    “말씀드리지 못할 것도 없지요.”

    지온이 루안을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루 대인을 알게 된 지는 이제 한 달이 조금 못 되었어요. 취태평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에 저희 집안의 숙부께서 연루되셨거든요. 그 바람에 대인께서 저희 집안에 방문하셨고, 그때 처음 루 대인을 뵌 제가 루 대인의 풍채에 한눈에 빠져버렸어요.”

    “…….”

    유씨 가문의 형제들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유신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눈에 빠졌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습니까?”

    지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아니…… 어떻게…….”

    지온을 손가락질하며 말을 더듬던 유모지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아니 어찌 이리 수치를 모릅니까! 하마터면 내가 녹모(*綠帽: 서방질하는 여인의 남편을 지칭하는 말)를 쓸 뻔했잖아요!”

    기분이 상한 듯한 지온이 말했다.

    “공자님께선 왜 그리 말씀하시죠? 제가 대인을 뵈었을 때는 이미 혼약이 파기된 뒤였습니다. 미혼의 사내와 미혼의 여인인데 그게 왜 공자님과 관련이 있단 말씀인가요? 분명 저를 탐탁지 않게 보고 혼인을 꺼리셨던 곳은 유씨 가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설마 공자님과의 혼약이 파기되었어도 저는 평생 시집도 가지 말고 무조건 공자님만을 기다려야 했단 말씀인가요?”

    유모지의 말문이 꽉 막혔다.

    “나, 나는…….”

    접선으로 제 머리를 톡, 때린 유신지가 한숨을 폭, 쉬었다.

    “그만하시지요, 지 소저. 녀석이 언변에 재능이 없어서 실수하였습니다.”

    지온이 흥,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그러시겠죠.”

    유신지가 다시 미심쩍은 시선으로 루안과 지온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두 분의 관계는 지 소저께서 루 형에게 반해 쫓아다닌다는 관계라는 것입니까? 루 형이 승낙은 했습니까?”

    루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부정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다른 관계를 꺼내는 것보단 차라리 지금 이편이 훨씬 말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아직 승낙은 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유신지가 웃음을 지었다.

    “지 소저, 루 형이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성격이 너무 차가워 가까이 지내기 쉬운 사람은 아닙니다. 차라리 다른 이를 고려해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대공자님이요?”

    지온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둘째 공자님조차 버거웠던 제가 대공자님이라니 당치 않죠.”

    유신지가 빙긋 웃었다.

    “마침 제가 또 아우와는 다른 사람이라 서요. 녀석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 저는 그럴 수 있습니다. 아이고, 루 형, 어찌 그리 눈을 홉뜨고 그러시오? 내가 말이나 해본 것이지, 설마하니 진짜 어쩔 생각이 있겠소?”

    지온이 대답했다.

    “농으로 하신 말씀이겠지만, 제가 세 분 공자님 모두와 애매한 관계라는 말이 퍼지면 제 평판은 끝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유신지가 금방 두 손을 모아 공수하며 사과했다.

    “제 언행이 가벼웠습니다.”

    여전히 얼굴이 좋지 않은 지온을 보며 그가 세심하게 물었다.

    “안에 들어가 잠시 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더 해야 할 일은 없으니 저는 이만 먼저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루안이 돌아가는 그녀를 배웅하려 금방 돌아서자, 유신지는 어쩔 수 없이 하려던 뒷말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다시 뵙지요.”

    지온이 예를 표하곤 루안과 함께 오송원을 벗어났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선 제 형님을 유모지가 채근하려던 찰나, 유신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기분이…… 안 좋군…….”

    * * *

    멍하게 길을 걷던 지온이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팔목을 잡고 나무 뒤로 끌었다.

    “왜 그리 놀랐지? 설마 옥형 선생의 손녀가 입궁하여 비가 되었단 소식을 듣지 못했나?”

    지온은 대답도 없이 그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구름이 하늘 전체를 가득 뒤덮고 있었다.

    “저는 누구죠? 왜 여기에 나타난 거예요? 제가…… 진짜 저인가요?”

    옥종화는 이미 죽었고, 몸만 바뀌어 지온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년 전 자신이 이미 죽었건만, 아직 살아있는 옥종화를 발견한 것이다.

    금벽이는 자신과 닮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눈매며, 자태며, 하다못해 말투까지 멀쩡한, 과거의 자신, 옥종화가 아닌가!

    * * *

    선제가 옥형 선생을 얼마나 중히 생각했는지, 세상에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선제는 태자를 무애해각에서 수학하게 했을 뿐 아니라, 옥씨 가문과 사돈까지 맺고자 하였다.

    지온이 옥종화였던 시절, 일찍이 그녀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선제는 이미 은근히 혼례에 대한 의중을 내비쳤다. 그러나 자신의 가문을 외척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옥형 선생은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 후 3년이 지나도록 혼례에 대한 말이 없자, 결국 선제는 혼담을 위해 사람을 보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옥종화가 열여덟이 되도록 혼인하지 않은 이유를 두고, 옥형 선생과 선제가 이미 예전에 혼약을 맺었기 때문이라 떠들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녀가 시집가는 것을 꺼렸기에, 열여덟이 되도록 혼인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그녀와 옥형 선생뿐이었다.

    선제가 혼담을 위해 사람을 보냈다는 소식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자, 서원의 학생들은 대부분 옥종화가 곧 태자비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녀 앞으로 오는 시사(詩詞)며, 서신의 양이 매우 늘어났다.

    모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었지만, 표현의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애매하게 돌려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열렬하게 제 마음을 표현했으며, 어떤 이들은 원망의 마음을 써 내렸고, 심지어는 어찌 된 영문인지 추궁하는 이도 있었다.

    담이 큰 이들은 직접 얼굴을 보고 고백하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두문불출하며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옥종화가 그렇게까지 애를 썼지만, 결국 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야 말았다.

    그날은 그녀가 할아버지의 서재에 평소보다 좀 더 오래 머물렀던 날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날이 까맣게 어두웠다. 그것을 본 옥종화가 붓을 내려놓았을 때, 의안왕이 찾아왔다.

    옥형 선생의 서재는 그가 사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선택을 받은 학생들만이 들어와 그의 수업을 들을 수가 있었다.

    옥형 선생의 선택을 받은 이들은 학업에 월등한 이들이거나, 신분이 무척 높은 이들이었는데, 전자는 옥형 선생의 인정을 받았을 정도였으니 대부분 나이가 꽤 있는 이들이었고 성격도 진중하여 그녀에게 실례할 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신분이 높은 이들은 의안왕과 태자, 두 사람뿐이었다.

    그날의 의안왕은 평소 같지 않았다.

    옥종화가 인사를 건넸지만, 그저 음 하는 대답만이 들려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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