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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53)화 (53/385)
  • 53화. 황제 행차

    작은 누각을 나선 루안과 지온은 나무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만, 능양진인을 몰아 화옥을 벌하게 했으니 분명 복수를 하려 하겠지. 어차피 조방궁은 그녀의 영역이니 앞으로 조심하는 것이 좋겠소.”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한참 고민했지만, 루안은 결국 내내 담아둔 그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소극적인 자신의 모습에 내심 스스로를 비웃었다. 

    ‘과거엔 말도 꺼내지 못했고, 이젠 묻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구나.’

    그는 이미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답을 얻는 것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억지로 상념을 지운 루안은 우선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 일은 화옥이 당신을 먼저 모함하긴 했지만, 어쩐지 당신이 일을 더 크게 키운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지온이 빙긋 웃었다.

    “다들 루 대인이 기이한 사건도 척척 해결한다고 칭찬을 쏟더니, 정말 감이 뛰어나시네요?”

    루안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인정하는 것이오?”

    지온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인정하지 못할 게 뭔가요? 맞아요, 제가 일을 더 크게 키웠어요. 조방궁에 오자마자 화옥이 바로 제게 적의를 드러내서 일부러 계속 화를 돋웠어요. 그러다 화옥이 더 못 참고 제게 손을 쓴 것이고요.”

    “왜 그랬지?”

    “저는 노력해야 하거든요.”

    루안이 그녀를 응시했다.

    “노력?”

    지온은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방긋거렸다.

    “그렇게 걱정하실 것 없어요. 주지가 일을 벌이지 않으면 제가 찾아가서라도 일을 벌여야 할 판이거든요. 제가 빠르게 힘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지체 높은 가문으로 시집을 가서 남편의 힘을 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이의 손에서 힘을 빼앗아 오는 거죠.

    조방궁은 도관이지만 황가(皇家)에 속한 도관이라 이곳에서 직분을 가지면 품계가 주어지거든요. 제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왜 그런 이야길 내게 하지?”

    지온의 얼굴에 억울한 표정이 떠올랐다.

    “전 대인께서 알고 싶어 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내가 알고 싶어 한다고 바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니.”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루안은 조금 화가 난 듯했다.

    “그렇게 가볍게 입을 열어 대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이오? 다른 이가 엿듣고 능양진인에게 귀띔할 걱정은 안 되는가 보군.”

    “대인께서는 남이 아니잖아요.”

    지온이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저는 대인께서 저와 혼인해주셨으면 하는데, 그런 제가 대인께 숨길 게 뭐가 있겠어요?”

    “…….”

    루안은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함께 날 것 같았다.

    대체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손 좀 내밀어보세요.”

    영문을 모르긴 했지만 루안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지온이 그의 손 위에 향환 한 알을 올렸다.

    “이번 사건의 증거예요.”

    그녀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저희 집안에 오셨을 때 받아 가신 다수전은 제가 가진 돈에서 나갔어요.

    두 번째 다루에서도 계산은 제가 했는데 오늘은 제가 돈을 챙겨 오질 않았어요. 그래서 일단 이거라도 맡겨 놓을게요.

    루 낭중께서 돈을 가장 사랑하신다고 들었으니, 이렇게 계속 드리다 보면 혹시 대인의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잖아요?”

    루안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온의 말에 기분이 슬금슬금 좋아지려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경계심이 더 크게 들었다.

    그는 지온이 다루에서 했던 이야기가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 말이라 생각했었다.

    ‘대체 지금 내게 뭘 원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원래의 옥종화였다면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었다.

    서원에서 누가 그녀와 가장 좋은 관계였냐 묻는다면, 의심할 것도 없이 태자 전하셨다.

    ‘그 일만 없었으면 그녀는 곧장 태자비가 되었겠지…….’

    그의 머릿속에 또 다른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음성은 달랐지만, 말투는 다르지 않은 음성이었다.

    “공자께선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셨습니다. 또한 형이상자(形而上者)는 도(道)요, 형이하자(形而下者)는 기(器)라 하였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規律)이나 도리(道理)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의 도(道)이고, 형을 가진 물질(物質)은 형이하자(形而下者)의 기(器)를 의미하니, 군자불기(君子不器)란, 형을 가진 것이 아닌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형의 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자가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또 궤변이로군, 종화. 선생은 분명 그리 해석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순(詢)아우, 그렇지 않은가?”

    그러자 또 다른 이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선생의 해석보다 옥 소저의 해석이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집니다, 형님.”

    “이제 너까지 저 아이 편에 선 것이냐?”

    “전하께서는 돌 틈에서도 진주를 찾아내는 혜안을 가지셨기 때문이지요!”

    “루안아, 네가 말해 보아라. 그래도 네가 가장 공정하니 넌 저 아이의 궤변에 넘어가지 않겠지?”

    * * *

    동라(*銅鑼:민속 음악에 쓰는 타악기의 하나. 징) 소리와 함께 법회가 시작되었다.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 루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힘은 가져서 뭐 하려고? 조방궁에서 스승님을 잘 기리고 난 뒤 다시 혼사 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 될 것인데…….”

    지온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루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목소리에서 위험한 기운이 풍겼다.

    “이번에 내가 당신을 도왔다고 해서 다음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이 앞으로 조방궁을 이리저리 흔들다 사고라도 친다면, 또 모르지. 내 손으로 당신의 오라를 묶을지…….”

    “루 대인, 너무 멀리 가셨어요.”

    지온이 빙긋 웃었다.

    “제가 얼마나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데요. 상대가 절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저는 상대를 절대 먼저 건드리지 않아요.”

    루안이 차게 웃었다.

    “화옥처럼 말인가?”

    지온이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사저의 질투심 때문에 일어난 일인걸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제가 겨우 한두 마디 한 걸 가지고 죽이려고까지 했겠어요?”

    지온은 실로 당당해 보였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차라리 지금 당장 저와 혼인하기로 하시면 되잖아요.”

    지온이 빙글빙글 웃으며 뒤이어 말을 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겐 두 가지 길이 있거든요. 두 가지 길 중에 더 빠른 길이 바로 시집을 가는 건데, 아쉽게도 지금은 아무도 저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힘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그런데 루 대인께서 저와 혼인을 해주신다면 당연히 제가 그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지 않겠어요?”

    “…….”

    침묵하던 루안이 물었다.

    “지체 높은 가문에 시집을 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지체 높은 가문이 아닐 텐데?”

    “어찌 아닐 수가 있겠어요? 북양왕족 전체를 뒷배로 두고 계신 공자님이신…….”

    그녀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루안이 갑자기 한 발을 내디뎠다.

    그렇지 않아도 가까이 서 있던 두 사람이라, 그가 딱딱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오자 지온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지온이 제 가슴을 토닥이며 말했다.

    “깜짝 놀랐어요, 대인.”

    루안은 차갑게 웃었다.

    “말은 꿀처럼 다디단데, 당신의 몸은 경계를 유지하고 있군. 본능적으로 나와 거리를 두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지?”

    “어찌 그리 말씀하시나요.”

    지온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기루의 여인이 아닌걸요.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경계를 하지 않을 리가 있을까요?”

    “허…….”

    지온은 화난 듯,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안 믿으면 안 믿는 것이지, 일부러 절 수치스럽게 하실 필요까진 없었어요.”

    “서시오!”

    예상했던 소리가 들려오자 지온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서며 싱긋 웃음을 보였다.

    “대인, 역시 아직 제가 아쉬운 거죠?”

    그러나 루안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당신은 조금 전 내가 북양왕가를 뒷배로 두고 있다고 했지. 설마 내가 가문에서 쫓겨난 것을 모르는 건가? 지금의 북양왕은 내 형이고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다. 내 집조차 찾아갈 수 없는 망한 왕손이 나지. 폐하께서 받아주시지 않았다면 애초에 갈 곳조차 없었을 사람이다.”

    그러나 지온은 웃음을 지었다.

    “루 대인, 그 말씀은 틀리셨어요. 보천지하(普天之下)는, 막비왕토(莫非王土)이며, 솔토지빈(率土之濱)은 막비왕신(莫非王臣)이라 했지요.

    온 하늘 아래 왕의 영토가 아닌 곳이 없으며, 온 땅에 왕의 신하가 아닌 이가 없다. 그러니 조정의 관리가 되어 정정당당한 신민(*臣民: 군주국에서 신하와 백성을 아우르는 말)인 대인께서 갈 곳이 없을 리가 없죠.”

    “…….”

    루안은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저도 말을 너무 쉽게 해서는 안 됐어요. 대인께서 생각 없이 저를 수치스럽게 할 리 없는데 말이죠. 대인께서는 지금 나이에 벌써 오품(五品) 낭중이시잖아요.

    그러니 앞으로 어쩌면 내각에 들어가 재상(宰相)이 되실 수도 있어요. 재상이 되어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권세를 누리게 되면, 대인께서 북양왕족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겠죠.

    대인께서는 그때가 되면 제가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할 수조차 없는 분이 되실 텐데, 차라리 그나마 세가 약한 지금 먼저 자리를 선점해두려는 거죠. 혹시 알아요? 제가 재상의 부인으로 불리는 날이 올지!”

    잔꾀 부리는 것을 티 내며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하는지, 하마터면 루안 역시 지온의 말에 홀랑 넘어가려는 그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비교적 외진 곳에 있었음에도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시녀들이 작은 누각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씨 가문의 형제들이 급히 밖으로 나왔다.

    “어찌 아직 여기 있는 것이오?”

    루안과 지온을 보고 잠시 놀랐던 유신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갑시다! 폐하께서 행차하셨으니 어서 가보는 것이 좋겠소!”

    루안과 지온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폐하께서 오셨다니?”

    유신지가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루안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 소저의 반응이 너무 크지 않은가?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아무튼, 이미 오셨소. 옥비마마도 함께 오셨다더군.”

    “옥비마마…….”

    루안이 급히 지온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찌 폐하께서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행차를…….”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오, 루 형! 난 먼저 가보겠소!”

    유신지가 먼저 밖으로 빠져나가자 두 사람 역시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루안이 계속해서 그녀를 흘끔거리는 바람에, 지온은 호기심이 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가만히 생각하던 루안이 목소리를 낮췄다.

    “잠시 후, 무엇을 보고 들어도 실례를 범하지 마시오.”

    지온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왜 실례를 범한단 말인가요?”

    설명을 들을 시간 따윈 없었다. 곧장 어가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황라산(*黃羅傘: 황제가 쓰는 일산)과 공작의 깃털로 만든 접선인 공작선(孔雀扇), 그리고 구름같이 많은 수의 궁인들과 내시의 행렬이 이어졌다.

    일행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도 없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몸을 엎드려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세 사람은 이제 막 누각이 있는 곳에서 나온 참이라, 법단의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고개를 숙인 지온의 눈앞으로 수많은 발이 지나가고 끝으로 용화(*龍靴: 황제의 신발)를 신은 사내와 여인이 지나갔다. 아마도 황제와 옥비마마인 듯했다.

    ‘의안왕…….’

    그가 아직 군왕 전하라 불리던 때,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만세를 부를 것이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일어나라.”

    익숙한 음성에, 낯선 말투가 들려왔다.

    과거의 의안왕은 진중했던 태자에 비해 모든 것이 가벼운 사람이었다. 말투도 그랬고, 소년 특유의 치기 어리면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그도 이토록 부드럽고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고고할 수 있었구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곳에 형님의 위패가 있다는 것이 떠올라 찾아온 것일 뿐이니, 다들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네.”

    능양진인이 급히 대답하자 황제가 웃음을 지었다.

    “법회를 계속하게. 종화, 우린 진인을 괴롭히지 말고 그만 들어가는 게 좋겠군.”

    곧이어 부드러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전하.”

    단 세 글자뿐이었지만, 벼락에 맞은 듯 지온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곳, 황제의 곁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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