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52)화 (52/385)
  • 52화. 좋은 형님

    화옥은 여전히 자신의 계획이 왜 실패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운 좋게 다른 사람이 이 계집을 구해준 것인가? 그럼 향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았다.

    ‘인정해선 안 돼. 죽어도 인정하면 안 돼!’

    “스승님!”

    화옥은 능양진인의 옷을 붙들고 늘어졌다.

    “스승님! 스승님은 제가 그런 향환 같은 것은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정말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사저는 제가 했다고 하고 싶은 거예요?”

    분노에 찬 지온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 대인께서 다 증명해주셨는데 사저는 아직도 제게 뒤집어씌우고 싶은 거냐고요!”

    루안의 차가운 시선이 화옥을 훑어 내렸다.

    “지온 소저 스스로 약을 탔다면 그것을 왜 마셨겠소? 내가 들어왔을 때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있었소.”

    유신지가 한숨을 폭 내쉬곤 입을 열었다.

    “선고님, 저희가 이 일을 제대로 조사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 약이 어디서 난 것인지 조사하거나, 제 동생에게 말을 전했던 어린 선고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알아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

    몽둥이 아래 배겨날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조경이 고소하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참 고생했는데, 결국 조방궁 스스로 벌인 일이었군. 아직도 인정할 생각을 하지 않다니, 눈앞에 있는 저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한 사람은 형부의 낭중이고, 다른 하나는 대리시의 추승(*推丞: 대리시 관직명)이지. 모두 형을 집행하는 곳에 있는 이들인데 겨우 이런 사건 하나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순간 말문이 막힌 화옥의 눈이 흔들렸다.

    조방궁 안에는 당연히 미정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정약은 자신이 몰래 사람을 보내 사 온 것이었다.

    화옥은 외부인이 이 일을 조사하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조방궁 사람들은 다들 내 사람들이라 원하는 대로 사건을 덮을 수 있다지만 여기에 형부와 대리시가 끼어든다면……!’

    “스승님!”

    화옥이 간절한 얼굴로 능양진인을 붙들었다. 이제 화옥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구해줄 스승뿐이었다.

    그러나 실망감이 곧 그녀를 찾아왔다.

    능양진인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화옥을 한 번 바라보곤 임창백과 다른 이들을 향해 예를 갖췄다.

    “제 미천한 제자가 잘못한 일이니 빈도(貧道)가 두둔하고 나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여봐라!”

    “네, 주지!”

    외부에 있던 여관(女冠)들의 대답이 들리자 주지가 천천히 말했다.

    “화옥이 사매를 모함하고 위험에 빠뜨렸으니 그 죄가 크다. 장 오십 대를 친 후, 제자명부에서 이름을 지우고 사문에서 제명한다!”

    능양진인이 이토록 중한 벌을 내릴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여관들이 놀라 멈칫했다.

    더욱 놀란 화옥은 혼비백산하여 크게 애원했다.

    “스승님! 스승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스승님!”

    이번 일은 지난번 때와 상황이 달랐다.

    청옥과 함옥 때도 능양진인이 장 스무 대를 명하긴 했다. 그러나 형을 집행하는 이가 화옥의 신분을 생각하여 곤장만 높이 들었지 실제론 약하게 쳤기 때문에 며칠이면 몸이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화옥이 사문에서 쫓겨난다면 더는 사정을 봐줄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장을 오십 대나 맞으면 초주검이 되고 말 거야!’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문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지난 9년간 자신이 온갖 위세를 부리며 좋은 것들을 누리고 산 이유가 무엇이던가, 자신이 주지의 제자였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주지의 제자란 신분이 사라지면, 자신이 존재할 이유가 있기나 하단 말인가?

    “스승님, 스승님, 제발…….”

    임창백이 스산한 한 마디를 뱉었다.

    “겨우 오십 대라니, 진인은 참으로 제자를 아끼나 보군.”

    그는 조경과는 입장이 달랐다.

    조 공자는 우연히 이 일에 말려들었을 뿐인 대다, 남색을 하니 그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은 어떤가? 멀쩡한 백부(伯府)의 막내 공자가 사내에게 당했다고 소문이 날 뻔했으니…….

    임창백의 입장에선 당장에 화옥을 때려 죽여도 모자랐다.

    ‘고작 선고 주제에 감히 내 아들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능양진인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빈도(貧道)가 제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백야께는 추후에 반드시 제대로 사죄하겠습니다. 다만, 일이 너무 커져 대장공주님께서 놀라시기라도 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제야 임창백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알겠네, 장 오십 대로 하시게.”

    일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화옥은 끌려나갔다.

    그토록 대단했던 화옥의 위세도 능양진인이 제 편에 서주지 않자 사라지고 말았다.

    조방궁의 일에 훈귀가의 공자가 둘이나 엮었으니, 능양진인은 마저 남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상황이 정리된 것을 본 지온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고, 루안과 유신지, 유모지 역시 자리를 떠났다.

    말없이 다시 작은 누각으로 향한 네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럽게 원래 차를 마셨던 편청으로 들었다.

    * * *

    “두 분은 제게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하실 생각입니까?”

    유신지가 질문을 던지자 루안이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지온 역시 낮은 웃음을 흘렸지만 유모지만이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지금 본인 능력 있다고 대놓고 유세하는 거야, 큰형?”

    결국, 제 동생의 멍청함을 참지 못한 유신지가 그에게 꿀밤을 한 대 먹이자 유모지가 아얏 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갑자기 사람을 때려!”

    바보 같은 동생에게 금세 신경을 끈 유신지가 다시 물었다.

    “조 공자는 사실 두 분께서 부르신 것이겠지요?”

    “네.”

    지온이 담백하게 인정하자 유신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받은 만큼 갚아주려는 생각이셨습니까?”

    “네.”

    그리고 지온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유신지가 손사래를 쳤다.

    “저는 그저 다른 사람이 저희 가문을 함부로 이용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는 어린 선고가 제 동생에게 말을 전하러 왔을 때 이미 이상하다고 여겼었다. 역시 일이 자신이 생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유신지는 곧장 이 일이 화옥과 관련된 일이란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따위 방법으로 어린 규수를 해코지하려 들다니. 얼마나 추악하고 독살(毒煞)한 마음이란 말인가! 더구나 음모에 자신의 동생까지 엮지 않았던가!

    “제 바보 같은 동생은 학업에나 조금 소질이 있지 다른 부분엔 순진하기 그지없는 녀석입니다. 이번이야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다음번에 또 그럴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감히 제 아우에게 마수를 뻗친다면, 제게 썰려 나갈 각오도 해야 할 것입니다.”

    유신지의 말에 지온의 얼굴에 부러운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대공자께선 좋은 형님이시네요.”

    그 와중에 유모지는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내가 뭐가 바보 같다고 그래!”

    “자기가 바보인 줄 알면 그게 바보겠느냐.”

    유신지가 그를 향해 희번덕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 * *

    “그러니까 꿀물에 약은 화옥이 탔고, 향은 소저가 낸 것이란 말입니까?”

    유신지가 가볍게 미간을 좁히자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네.”

    유신지가 실소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군요.”

    순간 그는 혼약을 무른 일이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혼인이라도 했다면 제 바보 같은 동생이 이런 여인을 감당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유모지가 맹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소저는…… 모함을 당한 게 아니란 겁니까?”

    “네, 아닙니다.”

    지온이 유모지를 향해 방긋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공자님의 형님께서도 저와 공범이시고요!”

    유모지는 혼란스러웠다.

    “형은 대리시 추승(*推丞: 대리시 관직명)이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일을 도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모지에게 또다시 꿀밤을 먹인 유신지가 그래서 어쩌겠냐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네 큰형이 사사로이 법을 어겼다, 그래서 어쩔 것이냐? 가서 상고라도 하려고?”

    “…….”

    유모지가 말이 없자 지온이 진지하게 말했다.

    “형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공자님. 대공자님께선 사실 군자의 도를 행하신 것입니다.”

    의심하는 얼굴로 유모지가 지온을 바라보자 지온이 말했다.

    “공자께서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신 말씀을 들어보셨겠지요?”

    그 소리에 하마터면 유모지는 제 형이 하듯 그녀에게 눈을 부라릴 뻔했다.

    내년이면 과거를 치를 사람이 <논어>도 읽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말이 뭐 어쨌다는 겁니까?”

    “형이상자(形而上者)는 도(道)라 했고, 형이하자(形而下者)는 기(器)라 했지요. 그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規律)이나 도리(道理)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의 도(道)라는 것이고, 형을 가진 물질(物質)은 형이하자(形而下者)의 기(器)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자께서 말씀하신 군자불기(君子不器)란, 형을 가진 것에 시선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존재하는 무형의 도를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죠.”

    지온은 조곤조곤 설명을 이었다.

    “이번 일을 생각해보세요. 제가 향환으로 향을 피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건의 본질은 화옥이 절 위험에 빠뜨려 죽일 계획이었다는 것에 있지 않나요?

    만약 증거에만 시선을 빼앗겨 제게 죄를 물으셨다면 그것이야말로 화옥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랬다면 공의(公義)를 실현할 수 있었을까요?

    마침 대공자께서 화옥의 계획을 알아채고 거기에 본질까지 잊지 않으신 덕에 무사히 권선징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대공자께선 마땅히 군자의 도를 행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

    세 사람은 깊은 생각에 잠긴 유모지를 보며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웃음을 참았다. 이윽고 생각에 잠겼던 유모지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 날 놀리는 것 같은데…… 공자께서 말한 군자불기는 애초에 그런 뜻이 아니잖소!”

    유신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는 자기가 바보인 줄 모른다던데 별일이네, 하하하!”

    유모지가 화를 냈다.

    “다 같이 한패가 돼서 날 괴롭힌 거지?!”

    유신지가 배꼽을 잡았다.

    “누가 그렇게 괴롭히고 싶게 생기랬느냐? 하하하!”

    * * *

    오후 법회가 시작되었다.

    유씨 가문의 형제들은 나가기 귀찮다는 의사를 전하여, 루안과 지온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유신지가 얼굴에 띄웠던 웃음을 지우며 중얼거렸다.

    “지 소저의 설명이 아주 도리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로군.”

    “아, 형!”

    유모지가 기분이 나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다른 사람이랑 짝짜꿍이 돼서 날 괴롭혀?”

    그러자 유신지가 웃으며 유모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엔 지 소저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다 치고, 지금은 혼약을 물린 것이 후회되지는 않느냐?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공자의 말씀까지 읊는 것을 보면 평소 서책도 많이 읽었다는 소리다.

    옆에서 자신을 모함하고 나섰어도 얼마나 간단하고 여유롭게 해결했느냐? 난 네가 앞으로 지 소저보다 더 나은 사람을 신부로 맞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유모지가 대답했다.

    “큰형, 형은 지 소저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화옥은 곤장 오십 대를 맞고 사문에서 제명까지 되었잖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앞으로 사문 밖에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들걸? 이제 평생 볕들 날은 없을 거라 봐야지.”

    유신지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럼 넌 화옥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으냐? 규방의 규수가 외간 사내와 밀회하다가 다른 이들에게 들켰다고 생각해봐라. 임창백부(臨昌伯府)에서 그녀를 첩으로 들여앉히는 것이 그나마 잘 풀린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제 정절을 주장하기 위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건 잔인하지 않고? 지 소저는 그저 받은 대로 돌려줬을 뿐이야.”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 쉽게 성현(聖賢)의 말씀을 주해(注解)하는 것을 보면 지 소저는 이미 그를 두고 고민을 해봤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마음에 분명한 기준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야.

    기준으로 저 자신의 행동을 가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 입으로만 인의예지를 부르짖으며 도덕을 논하는 가짜 군자들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유모지가 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큰형, 꼭 절친한 지기(知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남이 보면 지 소저가 형님과 혼약이 오갔었던 줄 알겠네! 형이 지 소저가 마음에 들어서 혼약 무른 걸 후회하는 거겠지!”

    어차피 유모지 자신은 후회하지 않았다.

    ‘저렇게 드센 여자와 혼인을 하면, 내 말이 어디 씨알이라도 먹히겠어?’

    순간 멈칫한 유신지가 웃음을 지었다. 그가 유모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모지를 나무랐다.

    “헛소리! 그런 소릴 쉽게 하면 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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