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51)화 (51/385)
  • 51화. 당하니까 어때? 너도 괴롭지?

    모두의 시선이 화옥에게 모였다.

    “자네가 내 아들을 해치려 했던 것인가!”

    분노에 찬 임창백은 화옥을 찢어 죽이기라도 할 듯 분을 토했다.

    조 공자야 우연히 말려들었을 가능성이 크다지만, 정 소공자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힘이 있다는 조방궁이라지만 겨우 주지의 제자 주제에 감히 백부(伯府)의 공자를 이용할 계획을 짜다니, 이것이야말로 나를 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화옥이 어찌 그대로 인정을 하겠는가?

    루안이 지온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화옥은 이미 자신의 계획이 어긋난 듯한 예감을 받았었다.

    그녀가 지온을 두고 이런 종류의 계획을 세웠던 것은, 여인으로서 이런 사건에 휘말리면 아무 말도 하지 못 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지온이 운 좋게 몸을 빼냈다 하더라도 제 결백을 증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지체 높은 이가 그녀의 결백을 증명하고 나서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애초에 말의 무게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대체 저년은 무슨 운을 타고 난 거야! 이 사람 저 사람 다 도와주려 나서다니!’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억울합니다! 스승님,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화옥이 능양진인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자 임창백이 위협하듯 입을 열었다.

    “진인, 설마 제자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능양진인은 정말이지 화옥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청옥과 함옥을 두고 못된 수를 내었을 때 이미 경고를 하지 않았던가! 설마하니 그 성질머리를 고치지 못하고 이리 나오자마자 또다시 지온을 두고 음모를 꾸밀 줄이야!

    ‘남을 해치려거든 끝까지 완벽하게 처리를 했어야지 도리어 당하다니!’

    그러나 자신의 제자를 버리더라도 이대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능양진인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야(*伯爺: 백작 어르신에 대한 존칭)께서는 화를 좀 식히시지요. 제 미천한 제자에게 잘못이 있다면 빈도(貧道)가 반드시 백야께서 만족하실만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진상이란 것 역시 대공자의 추측일 뿐이니, 일단 제 제자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시는 것이 어떠시겠는지요?”

    그 말에 유신지가 손에 든 접선을 휘휘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지의 말씀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임창백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좋네. 어디 어떻게 설명을 하는지 내, 들어보지!”

    임창백의 말에 한시름을 던 능양진인이 차가운 얼굴로 화옥에게 소리쳤다.

    “미련한 것!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화옥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정말 정 소공자를 끌어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번에 자리를 만들어 지 사매의 소원을 풀어주자 생각했을 뿐입니다!

    저는 꿀물 안에 약을 타지도 않았고 향도 제가 피운 것이 아닙니다! 대공자께서도 조 공자께서는 그저 우연히 말려든 것일 뿐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쩌면 정 소공자께서도 실수로 이리되신 것일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아? 선고께서는 그러니까, 모든 것이 우연이라 말씀하시는 건가요?”

    유신지가 화옥을 빤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대단한 우연입니다. 어린 선고를 시켜 제 동생을 불러오라 시켰지만 제 동생이 오지 못한 것도 우연이고, 정 소공자께서 아무런 제약도 없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신 것도 우연이겠지요.”

    화옥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말했다.

    “조 공자께서 이곳에 오시게 된 것도 대단한 우연이지 않았는지요? 그런 우연한 일이 한 번만 가능하란 법도 없지 않겠습니까? 두 번, 세 번도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송원 전체라고 해봐야 별로 크지도 않은 장소가 아닙니까?

    정 소공자께서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시게 된 것도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신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흘렸다.

    “듣고 보니 선고님 말씀이 또 그럴듯합니다!”

    그 말에 내심 안심을 한 화옥이 고개를 숙이더니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사매가 이런 일을 겪다니, 저도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 그저 사매의 원을 들어주려 했을 뿐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제가 꿀물 속에 약이 들었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향이라니, 저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때 갑자기 지온이 입을 열었다.

    “사저, 정말 들어본 적 없으세요?”

    “없어!”

    화옥이 맹세하듯 소리쳤다.

    “내가 향환 몇 가지를 만들 수야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것이 그런 효과를 내는지 정말 몰라!”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저 말대로라면 사저는 식사만 준비해두고 떠나셨을 뿐이고 제가 스스로 꿀물에 약을 탔단 말이 되겠네요. 거기에 혹시 몰라 향까지 피우고요. 맞나요?”

    화옥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화옥이 말했다.

    “나는 그곳에 있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것을 어찌 알아.”

    “정 소공자께서 들어오시기 전까지 제가 계속 정자에 있었잖아요. 사저가 아니면 저 빼고 또 누가 있나요?”

    화옥이 대답했다.

    “난 그런 말 안 했어, 네가 한 소리지.”

    “사저가 지금 절 그렇게 떠밀고 있잖아요!”

    지온이 내지른 날카로운 음성 속에 울음이 섞였다.

    “말로는 계속 불쌍하다, 불쌍하다 하면서 실은 계속 제가 사내를 꾀어내려 약을 탔을 거라 몰아가고 있잖아요…… 그런 소문이 퍼지면 제가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조방궁에서도 머무르지 못할 테고 전 그럼 머리 박고 죽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요!”

    화옥은 당장 부인하고 나섰다.

    “난 그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야! 내가 언제 네 탓이란 소릴 했다고 그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내가 어떻게 아냔 말이야!”

    “그게 사저의 진심이죠?”

    지온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려던 거죠? 아니면 이미 끝난 제 혼사를 사저가 뭣 때문에 다시 이으려 하냐고요!”

    “사매…….”

    “지금 돌봐줄 사람 없다고 저를 괴롭히는 건가요? 사저가 언제 제게 유 공자님 이야길 하셨어요? 절 이곳에 데려오고 사자매끼리 하는 이야기 말곤 한 것도 없잖아요!

    사저의 말이나 행동,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는데 꿀물에 약을 탄 게 사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다리고 있던 소리가 나오자 화옥은 더욱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그러는 넌 무슨 근거로 내가 약을 탔다고 하는 건데? 증거 있어?”

    그렇다, 사건엔 증거가 필요했다.

    아무도 직접 본 사람이 없는 지금,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

    첫 번째는 화옥이 지온을 해하기 위해 꿀물에 약을 타고 일부러 정 소공자를 불러들인 것이고, 두 번째는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와 다시 잘 해보기 위해 지온 스스로가 약을 탔으나 그곳에 우연히 정 소공자가 말려들었을 경우였다.

    과연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지온이 잠시 멍해진 찰나, 누군가 입을 열었다.

    “누가 증거가 없다 했지?”

    그 말에 유신지가 뜨악한 표정으로 루안을 바라보았다.

    “루 형, 설마…….”

    “루 대인, 뭘 발견한 것인가! 어서 말을 해보게!”

    이미 머릿속이 엉망이 된 임창백 역시 루안을 다그치고 나섰다.

    ‘대체 아들 녀석이 우연히 사건에 끼어들게 된 건지 아니면 누군가 고의로 엮은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대공자는 들어봤을 것이오.”

    루안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난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태어났소. 그래서 아주 적은 향이라도 맡을 수가 있지.”

    유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오. 복시(*覆試: 초시에 급제한 사람이 두 번째로 보는 시험)를 치를 때 무려 아흐레를 똥오줌 냄새를 맡고 있던 바람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실했다 들었소.”

    “풋!”

    유모지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자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흘겨본 루안이 계속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이곳에 오자마자 바로 달콤한 냄새를 맡았습니다. 정자에서 나던 향도 거의 날아갔으니 이젠 이 냄새가 누구에게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누굽니까?”

    화색이 가득한 얼굴의 화옥이 물었다.

    꿀물에 약을 자신이 탔다지만, 정자에서 나던 향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던가! 가만히 생각하니 저 계집이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꾸며낸 일이란 생각이 들던 상황이었다.

    ‘이대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죄를 뒤집어쓰고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이것이야말로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다 똥물을 뒤집어쓴 꼴 아니겠는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루안이 돌연 화옥의 팔을 잡아채고 모두에게 들어 보였다.

    “역시 여기 있군!”

    집중한 유신지의 눈에 옅은 붉은색 가루가 묻어있는 그녀의 소매가 들어왔다.

    잠시 멍하게 있던 화옥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다른 일들이야 자신이 한 것이 맞지만 향은 정말 아니지 않던가!

    화옥이 무슨 말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하게 팔을 붙들고 선 루안이 유신지를 향해 말했다.

    “잔 하나를 가져오시오. 확인해 보면 알겠지.”

    정신이 나가버린 화옥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던 찰나, 그녀는 지온과 눈을 마주쳤다.

    지온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약하디약한 표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작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그녀를 향해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화옥에게 소리 없이 말을 건네는 듯했다.

    ‘이런 짓을 너만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당하니까, 어때? 너도 괴롭지?’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스승님!”

    상황이 이렇게 뒤집힐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화옥은 혼이 다 빠질 것 같았다.

    그동안 주지의 대제자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생기면 그것이 누구든 개의치 않고 들이 받아왔던 자신이 아니던가. 스승님이 뒤를 산처럼 든든하게 받쳐주니 뭐라 하는 이 하나 없었다.

    화옥은 그저, 능운진인 사백이 아직 조방궁에 기거하고 계실 적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당시엔 어쩔 수 없이 청옥과 함옥의 아래에서 지내지 않았던가.

    거기에 외부인이라 생각하는 지온까지 조방궁으로 들어오자 짜증이 치밀었고, 그래서 청옥과 함옥을 괴롭혀 기분을 풀고자 했던 것이었다.

    만약 청옥과 함옥이 전처럼 잠자코 괴롭힘을 당했다면 며칠 후에는 또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을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두 사람은 가만히 당하고 있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잘 지내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지온 역시 감히 자신 앞에서 대갓집 규수라고 위세를 부리며 어쭙잖게 자신을 누르려 들었다.

    그때, 화옥은 가만히 냉소를 지었더랬다.

    조방궁은 자신의 구역이 아니던가? 그런데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심지어 스승도 없는 천애 고아 주제에 제깟 게 뭐라고 자신 앞에서 유세를 떤단 말인가!

    ‘넌 못 건드려도, 청옥과 함옥은 아니지.’

    청옥과 함옥을 모함하여 곤란한 상황에 빠뜨렸던 것은, 지온에게 유세 떨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런데 어디서 향수를 챙겨와 일을 해결해버리고, 도리어 자신만 곤장 스무 대에 금족령까지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화옥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화옥이 생각해낸 계략은 아주 간단했지만, 규방 규수에겐 치명적인 한 수가 될 수 있는 계획이었다.

    화옥은 그런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눈과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조방궁에 있던가? 그에 반해 지온이 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겨우 그 몇 사람이 전부 아닌가?

    ‘청옥과 함옥도 없었고 거기에 시녀까지 보냈으니, 손발이 잘려 홀로 남겨진 상황이었을 텐데!’

    그러나 현실은 생각했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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