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저와 함께 자백하러 가시죠!
“지 소저.”
유신지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여인에게 있어 크게 득이 되는 일이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분들께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면, 공자 두 분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쓸 뿐 아니라 규방의 규수인 소저의 명예 역시 훼손될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이들은 없으니 안심하고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소저와 관련이 없다면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구도 다른 곳에 말을 퍼트리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인가요?”
지온이 느릿느릿 되물었다.
“정말입니다.”
그제야 얼굴을 가렸던 소매를 내린 지온이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사저께서 도와주시겠다며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한 잔씩을 했는데 그 뒤로 제가 인사불성 되어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그리고 어찌 되었단 것인가!”
임창백과 조경의 음성이 동시에 들려왔다.
입술을 꾹 깨문 지온이 낮게 읊조렸다.
“깨어보니 정 소공자께서 바닥에 혼절한 채 누워계셨고, 제가 걸치고 있던 옷은 엉망으로 헤쳐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임창백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뜻인가! 내 아들이 자네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단 것인가! 그럼 자네는 대체 어떻게 깬 것이고 내 아들은 또 어떻게 혼절을 했단 것이야!”
지온은 고함을 지르는 임창백의 모습에 놀란 듯, 뒤로 물러나며 루안을 바라보았다.
루안의 입이 열렸다.
“접니다. 근처를 산책하고 있다가 화옥선고가 떠나고 임창백부(臨昌伯府)의 막내 공자가 그곳을 찾아왔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창을 열어 안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 소공자를 쳐서 혼절시켰습니다.”
“오호!”
지옥을 벗어난 순례자처럼 기쁨에 차서 외치는 조경의 음성이 들려왔다.
“보아하니 유인간음은 자네의 막내아들이 저지른 짓이로구먼!”
“늙은 조가 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임창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 아들은 분명 미정향(迷情香)에 당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유인간음이 된단 말이냐!”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백작(鄭伯爵)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상황이 심상찮다고 생각한 것도 안에서 이상한 향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곳의 문을 열었을 때 다른 분들은 냄새를 맡지 못하셨습니까?”
모여 있던 이들이 멈칫했고, 결국 입을 연 것은 유모지였다.
“확실히 향이 나긴 했었지. 아마도 우리가 늦게 도착하여 이미 흩어졌었나 보군. 우린 꿀물에서 나는 향이라고 생각했소.”
루안이 그의 말을 받았다.
“정 소공자가 들어오자마자 영향을 받았을 정도였소.”
제 말에 힘을 실리자 임창백이 조경을 향해 말했다.
“들었나?”
조경은 입을 삐죽였다.
‘약에 당한 것이 뭐가 자랑이라고 저렇게 득의양양한지 모르겠군!’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숨겨진 흉계는 두 가지로군. 하나는 꿀물, 다른 하나는 향.”
“맞소. 그리고 그것은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지.”
루안이 정 소공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 본 것을 기억하는가?”
정 소공자가 대답했다.
“아름다운 여인 한 사람을 보았고…….”
정 소공자의 말에 몸을 옆으로 돌리며 비켜선 루안이 말했다.
“자네가 본 미인이 이 사람인가?”
고개를 들어 지온의 얼굴을 바라본 정 소공자는 지온의 아름다운 외모에 빠져들며 눈이 풀렸다. 그러나 이윽고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유신지가 미간을 좁혔다.
“기억나지 않는다니?”
루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향에는 강한 환각 성분이 들어있어 그렇소. 그 정도면 충분히 사람의 인지능력에 영향을 주니 정신이 온전하지 않을 수 있지.”
그리곤 루안이 다른 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 공자 역시 그랬을 것이오. 내 말이 틀렸는가?”
모인 이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 공자는 정 소공자보다 더욱 정신이 혼미한 상황이었다. 정자에서 그는 사람조차 보질 못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 루안의 머릿속엔 조금 전 나무 위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 * *
“대인은 그가 날 지목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세요?”
루안이 멈칫했다.
“왜 못하지?”
지온이 능글맞게 말했다.
“맞춰 보세요!”
“나는 맞추고 당신은 조금 있다가 나무에서 혼자 내려오는 것으로 하지.”
“속이 좁네요. 알았어요, 알았어, 이야기해드리면 되잖아요.”
그녀의 음성에 장난기가 어렸다.
“제가 화옥 사저가 일을 꾸미는 것을 미리 알았거든요. 그래서 꿀물을 마시기 전에 착란을 일으키는 향환 한 알을 으깨놨어요. 그 향환에는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성분이 있어, 정 소공자는 깨어나도 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루안은 그제야 정자에 들어갔을 때 왜 그런 달콤한 향이 났었는지 깨달았다. 향은 꿀물이 아닌 향환에서 나던 것이다.
지온은 스스로 나름의 조처를 해 두었다. 아마도 정 소공자는 자신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테니 그녀에게는 별일이 없을 터였다.
‘하긴, 다른 이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둘 그녀가 아니지.’
“대인께서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저는 정신이 들자마자 슬그머니 사라질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딱 잡아떼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거든요.
그럼 화옥 사저가 불같이 화를 내는 두 집안의 어르신들을 맞아 백방으로 변명을 해야 했겠죠?
다만 그 방법도 피해갈 구멍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어요. 화옥 사저가 그분들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어르신 집안에 해를 끼칠 이유가 없거든요.”
지온이 루안을 바라보았다.
“대인, 대인께서 제 계획을 망가뜨리셨으니 저를 도와 피할 구멍을 채워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루안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뭘 하려는 거지?”
지온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웃음을 지었다.
“저와 함께 자백하러 가시죠, 루 대인님!”
* * *
“그럼 대체 누가 약을 쓴 것이란 말인가!”
임창백이 크게 화를 냈다.
“한 번도 모자라 거기에 또 다른 약까지 쓰다니! 대체 내 아들을 얼마나 해치려고 했던 것이야!”
“그렇다면……!”
유신지가 접선을 살랑거리며 루안에게 물었다.
“루 형, 지금 지 소저를 구하기 위해 정 소공자를 이곳에서 혼절시켰다고 했는데, 그럼 조 공자를 속여 이곳으로 보낸 자는 누구겠소?”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소?”
루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본래 지 소저를 데리고 지씨 가문의 어른께 가려 했소. 그런데 정신이 든 지 소저가 극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빈 공양간(*供養間: 절의 부엌)을 찾아 쉬게 할 수밖에 없었소. 그 후에 지 소저를 찾으러 온 이들을 따라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이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어린 소저가 갑작스레 그런 일을 당했으니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도성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에 가까운 어른도 계시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다른 이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은 것 역시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 공자 역시 이곳에 나타났단 이야기를 듣고 나도 무척 놀랐소.”
루안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두 공자를 훑었다.
“사실 정 소공자는 이미 혼절했고, 약효가 퍼졌으니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서 더 신경을 쓰지 않았소. 그 후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군.”
“참으로 이상하단 말이오…….”
유신지는 접선을 톡톡 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조 공자에게 다시 물었다.
“조 공자, 혹시 공자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이를 기억하시오?”
조 공자가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명의 선고라고 하지 않았소? 선고 두 사람이 옆으로 지나갔을 뿐이라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소.”
사내를 좋아하는 그가 여인의 얼굴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들이 무척 영준한 공자가 정자에 있다고 말했소?”
조 공자가 고개를 저었다.
“정자라고 하지는 않았소. 그저 이곳에서 공자를 한 사람 보았는데 얼굴이 무척이나 잘 생겼다고 했소.”
순간 딱딱하게 표정이 굳은 유신지가 루안을 보며 말했다.
“루 형, 조금 전에 이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소?”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유신지가 순간 제 이마를 슬쩍 치며 말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그래도 제대로 눈치를 챈 유모지가 입을 열었다.
“큰형, 그러니까 지금 선고가 루 낭중이 근처를 산책하던 것을 보고 지나가듯 한 이야기를 조 공자가 우연히 들었다는 소리야?”
“그렇게 절묘한 우연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조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정 소공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을 이리로 불러내지 않았나? 똑같은 수법으로 내 아들을 불러내지 못했을 리가 없지!”
유신지가 대답했다.
“조 장군님, 일단 공자께서 이곳에 나타난 것은 잠시 접어두고 생각을 해보시지요. 그리 생각하면 이 사건은 아주 완벽한 계획이 아니겠습니까?”
멈칫한 조경은 천천히 읊조리는 유신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선 지 소저를 이곳으로 불러 약을 탄 꿀물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저희 집안 둘째에게 얼렁뚱땅 얼버무린 말을 전했고 곧이어 이곳에 도착한 정 소공자는 향에 취해 정신을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이를 불러 유인간음을 했다면…….”
유신지의 말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화옥이 소리쳤다.
“저는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며 화옥은 속으로 외쳤다.
‘꿀물에 약만 탔지, 향은 내가 피운 것이 아니란 말이야!’
유신지가 대답했다.
“저도 선고님이라 한 적이 없습니다만…….”
능양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대공자. 공자는 그리 말씀하시나, 조금 전에 제 제자가 이미 음식들을 자신이 준비했다 시인하지 않았습니까. 이리 말씀하시면 제자가 주모자라 암시하는 것이 아닌지요?”
“오? 그렇군요!”
유신지가 마치 조금 전에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확실히 선고가 매우 의심스럽군요! 지 소저를 해하기 위한 계획인 듯 보이는 사건에 하필 지 소저와 관련 있는 분이라곤 사제 두 분뿐이니 말입니다.”
“아니, 지금…….”
능양진인에게 뭐라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유신지는 곧장 조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 장군께선 어찌 보시는지요? 이리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 않습니까?”
잠시 조경이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일이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다른 이들은 분명 지 소저가 틀어진 혼약을 다시 성사시키려 유씨 가문의 막내와 사적인 만남을 가지려 했다고 생각했을 걸세. 그러다 공자가 오지 않은 바람에 임창백의 아들과 만나게 되었다고 다들 생각했겠지.”
조경 자신 역시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가?
사건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지온 스스로가 벌인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루안이 지온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나서자, 그제야 누군가 그녀를 해하려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를 해하고자 했다면, 식사를 준비하고 다른 이를 시켜 말까지 전하라 명한 화옥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