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9)화 (49/385)
  • 49화. 다리나 놓아줘 볼까?

    서로 크게 콧방귀를 뀐 두 사람이 각자 뒤로 물러나자 유신지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공자, 미남자였을 거란 말이 무슨 뜻이오? 당신이 이 음식들을 준비해두고 미남자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단 말이오?”

    조 공자가 눈에서 불을 튀기며 말했다.

    “그런 일 없소. 주변을 걷고 있었는데 공자 한 사람을 만나게 됐소. 그러다 그와 몇 마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후에…….”

    눈을 가늘게 뜬 유신지의 음성이 엄해졌다.

    “조 공자, 있는 그대로 전해드리겠소. 만약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제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면, 임창백께선 당신을 유인(誘引)간음으로 고발할 것이오. 이번 일에 연루된 이는 연고 없는 평민이 아닌 백작 가문의 공자란 것을 기억하시오. 만약 진상을 밝히지 못한 채로 폐하께 고해지게 되면…….”

    폐하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조 공자는 공포에 휩싸였다.

    거기에 아버지의 고함이 뒤따랐다.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대체 언제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닐 셈이냐! 만약 네가 유인간음을 저지른 것이 맞다면, 넌 지금 이 자리에서 가문에서 쫓겨날 것이야!”

    연달아 치고 오는 두려운 협박 속에, 결국 조 공자가 이실직고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내원을 돌아다니던 중에 선고 두 사람이 이곳에 아주 영준한 공자가 있다고 하는 소릴 들었소. 그래서 그 사람을 볼 생각이 이곳으로 왔는데…… 그 후엔 모르겠소.”

    유신지는 미간을 좁혔다.

    “모르겠단 말이 무슨 뜻이오? 누군가에게 맞아 기절했단 것이오? 그 공자는 누구였소? 보셨소?”

    조 공자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나지 않소.”

    사람들이 서로 시선만 주고받는 중에 유신지가 말했다.

    “약 기운 때문에 기억이 소실된 것 같군.”

     조경이 입을 열었다.

    “어찌 됐건, 내 아들은 확실히 이 일을 꾸미지 않았네. 저 아이가 그런 충동이 일었다 하더라도 당장 이런 일을 꾸며낼 수 있을 수는 없어.”

    임창백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그럼 대체 누가 했단 말인가?”

    그들이 이야기하는 중에 정 소공자가 깨어났다.

    그는 남색 하는 자가 아니었기에 조 공자와 함께 안고 있었단 말에 매우 놀라 밑동 깨진 항아리처럼 모든 것을 술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정 소공자는 이곳에 미인이 있단 소리를 듣고, 미인을 보려고 이곳에 찾아왔단 것이오?”

    유신지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수법이 아주 똑같군.’

    정 소공자가 소리쳤다.

    “진짜 미인이었소! 사내가 아니었단 말이오!”

    유신지가 한숨을 쉬었다.

    내심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정 소공자가 봤다는 미인은 분명 지온 소저였을 터였다.

    ‘괜한 걱정이었군. 지온 소저는 이미 대책을 가지고 있었던 게야.’

    오히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갇힌 것은 자신이었다.

    지온 소저가 반격하고자 했다면, 조 공자를 속여 이곳으로 사람을 보낸 이는 바로 그녀일 것이다.

    그리고 진상이 밝혀지면, 제아무리 누군가 그녀를 먼저 해코지하려 했다 한들, 임창백과 조경은 죄명을 모두 그녀에게 씌울 것이 분명했다.

    그리되면 흉계를 쓴 이는 무사하고 해를 입는 것은 오히려 그녀가 될 터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건을 해결하는 수밖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유신지가 입을 열려던 찰나 털썩 무릎을 꿇은 화옥이, 대뜸 고함을 쳤다.

    “스승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 * *

    루안이 물었다.

    “화옥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당신까지 끌고 들어가리란 걱정은 안 드오? 그녀는 당신을 해하기 위해 흉계를 꾸민 것이지, 임창백과 조경과는 상관이 없었소. 저들이 신경을 쓰는 이는 자신들의 아들을 누가 해했냐는 것뿐이오.”

    지온이 대답했다.

    “사저가 제게 해코지하려 했단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루 대인과 이렇게 밀회를 즐기고 있는걸요?”

    “헛소리 작작 하시오!”

    루안이 역정을 냈다.

    “정 소공자는 당신의 얼굴을 보았소. 그가 당신이라 증언하면 당신이 빠져나갈 수 있겠소?”

    지온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대인께서는 그가 저를 지목할 수 있을 거라 여기세요?”

    루안이 멈칫했다.

    “왜 못하지?”

    지온은 약 파는 약장수처럼 능글맞게 말했다.

    “맞춰 보세요!”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화옥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조방궁에 다시 온 지 사매는 울적해 보였습니다. 저는 사매가 유씨 가문의 공자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집안사람의 농간으로 어쩔 수 없이 혼약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매가 이번 기회를 빌려 유씨 가문 둘째 공자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제가 준비를 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이 사달을 낸 것입니다.”

    능양진인이 왈칵 노성을 토했다.

    “우매한 것! 수양하는 조방궁에서 어찌 감히 사매에게 사내와의 밀회를 주선해 줄 수가 있는 것이야!”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온 화옥이 능양진인의 다리를 붙들더니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본래 혼약이 오가던 사이가 아닙니까! 저는 그저 서로 마음이 있었다가 억지로 헤어지게 된 것이라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했던 것뿐입니다!

    스승님, 정말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두 사람에게 서로 얼굴을 보고 물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것이었는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몸까지 파르르 떨던 능양진인이 차게 말했다.

    “그런 마음이었어도 잘못한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볼 수 있도록 해줄 요량이었으면 밝고 트인 곳을 준비했어도 충분했을 것을……!

    혼인하지 않은 남녀가 이런 밀폐된 곳에 단둘이 있다면, 설령 아무 일이 없다 해도 그리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아니라면 대체 그 꿀물은 어찌 설명할 것이냐?”

    “그것은 저도,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도저히 모르겠단 표정의 화옥이 말을 이었다.

    “저는 지 사매를 이곳으로 데려온 후에, 다른 사매를 시켜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님께 말을 전하게 했던 것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이 유모지에게 몰려들었다.

    잠시 멍한 얼굴을 했던 유모지가 입을 열었다.

    “어쩐지! 어린 선고가 찾아와 말을 전하긴 했는데 횡설수설,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소!”

    유모지의 대답으로 화옥의 마지막 말이 사실임이 증명되자, 모여 있던 이들은 자연스레 그녀가 전에 했던 이야기 또한 사실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금이라도 빨리 제 아들이 뒤집어쓴 오명을 벗기고 싶었던 조경이 곧장 말을 덧붙였다.

    “역시 그런 것이었구먼! 혼약을 파기하는 것이 싫었던 지 소저가 이 기회에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와 일을 만들어 보려던 것이 분명하네! 아쉽게도 이런 상황이 말이 안 된다 생각한 어린 선고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것이지. 그래서 엉뚱하게도 정씨 가문의 막내 공자가 나타났던 것이야!”

    여하튼 자기 아들은 이 일과 관련 없는 피해자란 소리였다.

    ‘아니, 잠깐. 그렇다 하더라도 임창백(臨昌伯)의 아들과 지씨 가문의 규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있어야 하는 규수는 보이지 않고 내 아들이 이곳에 있는 것이지?’

    조경이 의아해하는 사이 유모지는 후회하는 목소리로 제 형에게 속삭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좀 더 제대로 물어볼 걸 그랬군.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뭐야, 그 눈빛은? 날 왜 그렇게 봐, 큰형?”

    “…아니다.”

    그리 말한 유신지가 아무런 표정 없이 말을 이었다.

    “허술한 놈!”

    ‘바보 같은 것이 화옥에게 이용당해 증인이 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역시 자기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던 임창백(臨昌伯)이 곧장 문제를 제기했다.

    “그럼 내 아들은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누가 저 아이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란 말이야!”

    ‘그렇군! 그 문제는 또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정 소공자에게로 쏠렸다.

    정 소공자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미인이 있단 소리를 들어서 보러왔던 것뿐이오. 정자에 들고 보니 정말 미인이 있었소. 그런데…… 그 후에 어떻게 된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소.”

    “보아하니 지 소저란 여인이 중요할 것 같군.”

    임창백이 말했다.

    “지 소저는 어디 있는가?”

    그러자 고개를 돌린 능양진인이 명령을 내렸다.

    “어서 찾아라!”

    유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옥의 결단력 하나는 인정해야겠군.’

    본래 화옥이 흉계를 꾸몄다는 것을 밝혀내어 죄를 모두 화옥에게 넘기려 했던 그였지만, 화옥이 한발 빠르게 먼저 제 죄를 자백하듯 나섰다.

    그녀는 아주 영민하게도 자백을 해버렸다.

    증거가 확실한 것들은 모두 자신의 죄로 시인했지만, 증거를 확보할 수 없는 애매한 것들은 모두 지온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를테면, 음식들을 준비하고 어린 선고에게 말을 전하라 한 것처럼 증거가 확실한 것은 자신이 했다고 자백했지만, 꿀물에 약을 탄 것과 같은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지온에게 떠넘기는 식이었다.

    이리되면 많은 사람은 지온이 스스로 꿀물에 약을 탔다고 생각할 터였다. 지온에게는 유모지와 다시 혼약을 이어가고 싶다는 동기가 있었지만, 화옥은? 화옥이 무슨 연유로 약을 탄단 말인가?

    설령 화옥의 원래 계획이 지온을 음해하려던 것이어도 증거가 부족했다.

    당장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던 유신지는 차라리 지온을 기다렸다가 그녀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단 두 번 본 것이 전부였지만, 지 소저에 대한 인상은 무척이나 좋았다. 거기다 루안 역시 유심히 살피던 여인이 아닌가? 루안 같은 이의 관심을 받을 정도라면 지씨 가문의 큰소저는 소문처럼 그렇게 무례한 여인이 아닐 터였다. 

    ‘더구나 사저의 계략에 이런 식으로 반격할 생각을 하다니. 그랬으면 다른 수를 준비하지 않았겠는가?’

    * * *

    이윽고 능양진인이 보낸 이들이 지온을 찾아서 데려왔다.

    느긋하게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본 유모지가 입을 열었다.

    “루 낭중! 당신이 왜 지 소저와 함께 있는 거지?”

    루안은 그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슬쩍 보았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본 화옥의 심장이 요동을 쳤다. 어쩐지 일이 뭔가 크게 틀어졌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임창백과 조 대장군, 조경 역시 크게 당황했다.

    두 사람은 당연히 루안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대체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기에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지온은 머리칼마저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더듬었다.

    “대인들, 능양사숙을 뵙……습니다…….”

    매우 놀라 겁을 먹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어리둥절해진 사람들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미간을 좁힌 능양진인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엔 어디 있었던 것이냐? 좀 전에 정 소공자를 보지 못했느냐? 네가…….”

    능양진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돌연 얼굴을 감싸 쥔 지온이 흐윽 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반응에 사람들은 또다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대체 어떻게 영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유모지가 입을 열었다.

    “울지 말고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두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지온은 여전히 얼굴을 감싼 채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소녀, 소녀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습니다…… 사숙, 저를 보내주세요! 무슨 일이 있으시거든,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주세요, 사숙.”

    “안 된다!”

    능양진인이 뭔가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임창백의 고함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 아들의 결백과 관련된 일이니, 자네는 바른대로 이야기해야 할 걸세! 대체 누가 내 아들을 이리로 보낸 것인가? 정신은 또 누가 잃게 한 것이고!”

    “맞네!”

    조경이 이번엔 그와 한 편이 되어 입을 열었다.

    “내 아들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에 보내져 하마터면 유인간음의 죄를 뒤집어쓸 뻔했네! 그런데 자네가 어찌 바른대로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을 해!”

    유신지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지온이 취한 행동을 본 그는 그녀가 어떻게 움직이려는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 소저가 이미 할 말을 준비한 것 같군. 그럼 내가 좀 더 편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나 놓아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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