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8)화 (48/385)
  • 48화. 추문

    직업병과도 같은 사건 조사 본능이 발동한 유신지의 시선이, 빠르게 현장을 스치며 증거들을 모았다.

    상 위에 올려진 음식들은 크게 건드린 흔적이 없었고 문과 창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한 사내는 임창백부의 막내 적자였고, 다른 한 사내는 강왕비(康王妃)의 조카였다.

    화옥을 부르려던 손을 그대로 뻗어 그녀를 붙잡은 유신지는, 그녀를 정자 밖으로 잡아 내보내고 자신 역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주변을 둘러쌌던 사람들은 더는 상황을 볼 수 없게 되자 모두 실망하는 소리를 냈다.

    그때 유신지가 정중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더 보실 것 없으니 모두 돌아가 쉬십시오…….”

    금방 임창백가와 강왕비 가문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정자 안의 상황을 확인한 두 집안사람 모두 혼이 나간 듯,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결국 유신지가 사람을 시켜 물을 가져오게 하고는 두 사람에게 물을 끼얹어 깨우게 시켰다.

    혼비백산한 것은 화옥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두 동강 낼 듯 굴려봤지만, 도무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화옥이 기회를 틈타 슬그머니 사라지려 할 때, 유신지의 한 마디가 그녀의 발길을 막아섰다.

    “선고님. 이곳은 조방궁이 아닙니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주인 되신 입장으로 상황을 수습하는 것을 도와야 하심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달리 할 말이 없었던 화옥은 그저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남아 수습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능양진인이 도착했다.

    그녀는 연신 두 집안사람들을 향해 사죄했다.

    “모두 빈도(貧道)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입니다…….”

    분기탱천한 임창백(伯)이 당장 노성을 질렀다.

    “이 일은 반드시 조사해야 할 것이오! 내 아들은 남색 하는 아이가 아닌데 대체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소! 분명 누군가 흉계를 꾸민 것이 틀림없소!”

    능양진인이 연신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네,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소문이 퍼지는 것은 좋지 않으니, 조사를 하더라도 조용히 조사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왕비의 오라버니 조경(曹慶)이 임창백(伯)을 향해 대뜸 소리를 질렀다.

    “자네가 조사하겠다니, 내 아들이 무슨 짓이라도 했단 소린가? 지금 내 자식이 일을 꾸몄다고 말하는 것이야?”

    평소라면 임창백은 조경에게 미움을 살만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왕비가 황제의 생모였으니 조경은 황제의 외숙 되는 사람이었다. 이미 실권을 잃은 백작 어르신, 백야(伯爺) 임창백이 감히 황제의 외숙에게 미움을 살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애지중지 아끼는 아들이 이런 수치를 당했는데 임창백이 냉정해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황제의 외숙인들,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순 없지!’

    “그럼 아니란 말입니까?”

    임창백이 냉소했다.

    “귀댁 공자께서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른다고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조씨 가문에서 그렇게 숨기려 노력을 했지만, 세상에 담을 넘지 못하는 바람이 없듯 영원한 비밀도 없었다. 그저 황제가 두려워 다들 쉬쉬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조경 역시 노기등등하게 소리쳤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 아들이 저 돼지 같은 모습도 못 볼 거로 생각했나? 내 아들이 눈먼 봉사는 아니네!”

    “이 늙은 조가 놈이!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것이냐! 이리 수치를 주고도 되레 목소리를 높이다니,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면 안 되는 것이지!”

    “우리가 너희 가문과 엮이고 싶을 거라 생각했느냐? 네 아들이 어떤 인간말종인지부터 알아보고 오거라! 내 체면이 떨어지지!”

    “조가 놈이……!”

    “어쩌겠느냐!”

    서로 소리 높여 삿대질하며 욕설을 쏟던 두 사람은 더욱 크게 화를 내었다.

    화옥은 내심 안도했다.

    ‘싸워라, 더 크게 싸울수록 좋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두 집안이 싸움이 나면 적어도 저 불이 자신에게 옮겨 붙지는 않을 터였다.

    그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다.

    “백야, 조 장군, 우선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제가 보기에 두 집안 공자께선 모두 무고한 듯합니다…….”

    ‘누구야!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흠칫 놀란 화옥이 고개를 들었고, 들려온 음성에 임창백과 조경 역시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입을 연 이는 유신지였다.

    조경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유씨 가문의 대공자였구먼. 자네에게 고견(高見)이 있는 것인가?”

    ‘내 아들이 남색을 하더라도, 절대 이런 오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어!’

    임창백 역시 당장에 물었다.

    “무엇을 발견한 것인가, 대공자!”

    조금 전 유신지가 문을 닫아 계속해서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지라, 그 마음이 고마웠던 두 사람의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

    유신지가 정자 안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방안의 음식들을 건드린 흔적이 없는데, 미정향(迷情香)이 이렇게 강하게 난다는 것이 이상하다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만약 일방이 다른 한쪽을 속이려 했다면 먼저 식사부터 했을 것이고 그러다 천천히 욕구가 오르면 다시 약물의 도움을 받아 흥분을 시켰어야 이치에 맞습니다.”

    유신지의 말에 임창백과 조경은 그제야 깨달았다. 

    제 다리를 철썩하고 친 조경이 말했다.

    “그렇지! 그래야 이치에 맞지!”

    유신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조금 전 두 분 공자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두 분 모두 정신을 잃고 계셨습니다. 이곳은 조방궁이고 외부에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아직 오후 법회가 끝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동했다 하더라도 약을 그렇게 독하게 썼을 리가 있겠습니까? 혹여라도 호기심에 이곳으로 사람이 올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지!”

    조경이 연신 맞장구를 쳤다.

    “내 아들은 언제나 정도를 아는 아이였네!”

    유신지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두 분께서는 잠시 냉정함을 되찾으시고, 먼저 자제분들께서 깨어나시면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임창백의 얼굴에 망설임이 어리자 유신지가 다시금 권했다.

    “백야, 만약 조 공자께서 백작가의 공자를 속인 것이라면, 공자 역시 이 추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두 분 모두 다른 이의 흉계에 당한 것이라면 잡아야 할 이는 바로 그 흉계를 꾸민 이가 아니겠습니까?”

    마른 목에 냉수처럼 쏟아진 유신지의 말에 임창백은 금방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래! 사내에게 당했다는 꼬리표는 너무 과하지만 다른 이의 흉계에 당했다면 당장은 비웃음을 당할지언정 나중엔 천천히 잊힐 것이야.’

    “대공자, 그럼 자네는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 * *

    정자에서 멀지 않은 나무 위.

    무성한 잎들 사이에서 음성이 건너왔다.

    “대공자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전 루 대인께서 모습을 드러내셔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대공자께서 일을 아주 잘 해결하고 계세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누군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제 능력을 과시할 기회를 놓치는 자가 아니었지.”

    지온은 웃음을 참았다.

    ‘사실은 승부욕도 아주 강한 사람이면서 왜 굳이 무심한 사람인 척을 하는지…….’

    “난 당신이 화옥을 제 꾀에 제가 넘어지게 만들 방법을 사용할 거라 생각했소.”

    루안의 말에 지온이 대답했다.

    “화옥은 무공을 익힌 사람이에요. 저도 약을 먹일 수는 있지만, 밖에서 그녀를 돕는 이들도 있어서 모든 상황을 문제없이 통제하려면 난도가 너무 높아져요. 실패하면 제겐 남는 게 하나도 없거든요. 괜히 당해주기만 하는 게 돼버려요.”

    루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화옥의 무공 수준은 자신과 비교하면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화옥을 잡게 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처음부터 자신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말과 같았다.

    루안은 그녀가 자신을 이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에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을 멀리 밀어 둔 것을 기분 나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만 해주기엔 사저에게 너무 약소하잖아요?”

    루안이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출가한 사람이오. 다른 사내와 만나고 있는 것을 들킨다면 그녀는 조방궁에서 더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오. 그런데도 너무 약소하단 말이오?”

    “당연하죠.”

    담담한 지온의 음성이 어쩐지 냉혹하게 느껴졌다.

    “사저는 다른 이의 목숨을 가지고 흉계를 꾸미면서도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어요. 겨우 평판이 더럽혀지는 게 어때서요?”

    “그럼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임창백과 조 대장군으로 하여금 그녀를 상대하게 하려는 것이오?”

    지온이 반문했다.

    “대공자님의 추론 실력도 나쁘지 않죠?”

    루안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지온이 다시 물었다.

    “대인과 비교하면요?”

    루안이 차갑게 대답했다.

    “우린 과거에서 딱 한 번 함께 겨뤘소. 당시 그는 탐화였고 난 을과로 급제했지.”

    지온이 빙긋 웃었다.

    “대인께선 그런 건 신경 안 쓰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루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석차를 신경 쓰진 않지만, 이렇게 비교를 해대면…….’

    “아무튼, 대공자께서 진실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말이시죠?”

    루안은 고개를 끄덕이다, 그녀의 눈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문제없겠어요.”

    지온이 방긋 웃었다.

    “저는 화옥 사저가 저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라 믿어요!”

    * * *

    한편, 유신지는 이미 현장 검증을 마친 뒤였다.

    “음식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이 주전자에 든 꿀물입니다.”

    그가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꿀물 안에 누군가 미정약(迷情藥)을 탔습니다.”

    조경이 성난 호랑이와 같은 얼굴이 되어 제 수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저 꿀물을 누가 가지고 왔는지 당장 조사해 오거라!”

    화옥이 조용히 뒤로 몇 발을 물러났다. 그런 화옥을 흘긋, 바라본 능양진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찾으시기 어렵지 않으시겠습니까. 요리나 꿀물을 가지고 온 후에 다시 약을 타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유신지가 대답했다.

    “조사와 그 말씀과는 거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진인. 저희가 조사하여 찾으려는 이는 약을 탄 사람이 아닌, 이곳에 음식과 꿀물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공자께서 깨어나셨습니다!”

    * * *

    먼저 깨어난 것은 조 공자였다.

    두 눈이 풀린 채 멍하게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그는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아버지? 여기가 어딥니까?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것입니까?”

    자기병을 꺼낸 유신지가 뚜껑을 열고 조 공자의 코밑에서 자기병을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금방 재채기를 한 조 공자의 눈이 맑아졌다.

    “공자,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으시오?”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의 조 공자를 보던 유신지가 턱으로 현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조 공자는 이곳에서 정씨 가문의 막내 공자를 안고 있었소.”

    임창백은 정씨(鄭氏) 성을 지닌 가문이었다.

    고개를 돌린 조 공자의 눈에 수제비처럼 생긴 정 소공자가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미남자였겠지! 그럴 리가 없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임창백이 소리를 지르고 일어섰다.

    “역시 네놈이 꾸민 짓이로구나! 네 아들의 청백을 돌려내라, 이놈!”

    조경은 당연히 가만있지 않았다. 앞으로 나선 그가 임창백을 막아서며 노발대발 소리쳤다.

    “우리 아들이 한 말을 못 들었느냐? 보았던 이는 애초에 네 놈의 아들이 아니었다!”

    “실수였다 하더라도 저 녀석의 잘못이지!”

    “네놈이……!”

    유신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조 공자의 말부터 들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그가 사건을 심리할 때 이렇게 말을 안 듣는 친족들이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데리고 나가 장을 때렸을 터였다.

    그나마 임창백과 조 장군의 체면을 챙겨주는 것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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