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7)화 (47/385)
  • 47화. 너무 늦은 것인가

    정자를 반쯤 돌아간 화옥이 창문을 조금 열었다.

    정자 안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녀의 예상과 다르지 않자, 화옥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시 창을 닫은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사람을 부르러 가자, 뒤쪽에 있던 창이 다시 한번 열렸다.

    정자 안으로 들어왔던 사내가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그대로 허물어지듯 넘어지자 반짝, 눈을 뜬 지온이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를 흘긋 바라보곤 게슴츠레 웃으며 루안을 보았다.

    “역시 루씨 집안의 후인답습니다. 실력이 대단하세요.”

    어두운 얼굴의 루안이었지만, 시선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옷이나 제대로 입으시오!”

    지온이 정색했다.

    “제가 어디 노출을 한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무서워하세요?”

    조금 전에도 옷깃을 당겨 어깨가 반쯤 드러났을 뿐이었으니 노출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이번 왕조는 그렇게 보수적인 분위기가 아니어서 여름이면 다소 속이 비치는 얇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여인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으니, 이 정도 노출은 노출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흐트러진 차림에 보일 듯 안 보일 듯한 것이 오히려…….’

    한마디도 하지 않은 루안은 그대로 창밖으로 나가려 몸을 돌렸다.

    “진짜 소심하게 왜 그러세요, 대인!”

    지온이 얼른 그를 붙잡자 루안이 자신을 붙잡은 그녀의 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리고 손을 번쩍 든 지온이 말했다.

    “안 만지면 되죠? 어휴, 한 번 만졌다 하면 그냥 너 죽고 나 살자로 나오시니…….”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지온이 눈을 깜빡였다.

    루안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아냐고…….”

    ‘역시 그녀가 맞는 것이겠지?’

    지온은 마치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대꾸했다.

    “알겠어요. 다음에 만질 땐 꼭 동의를 구하고 만지면 되는 거죠?”

    “…….”

    루안은 그녀가 쪼그리고 앉아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물었다.

    “루 대인님, 이 사람,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안이 대답했다.

    “그는 임창(*臨昌: 지역 명)백부의 막내 적자요.”

    가만히 생각하던 지온이 말했다.

    “임창백부 집안이라. 사람을 잘 정했네요.”

    화옥은 이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수습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안 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고르는 일에 많은 고민을 했을 터였다.

    지위는 높지만, 세력이 너무 커서는 안 되었다. 대장공주님의 이름에 눌리지 않으면 일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임창백부 집안은 작위만 보자면 낮지 않았지만 훈귀가 중에서는 그렇게 세력이 크지 않은 집안이었다.

    기절한 백부(*伯府: 백작부, 백작 저택)의 막내 공자를 바라보는 루안의 눈빛에 작은 경멸의 빛이 담겼다.

    “도성에서 방탕한 자로 이름이 높은 자요. 여인을 밝히는 호색한으로 기루를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는 자라 계속 혼처를 찾지 못하고 있었지.”

    지온이 웃었다.

    “사저에게 고마워해야겠네요. 내가 시집가지 못할 게 걱정되어 이 사람을 골라 준 것 같은데. 진짜 일이 벌어졌으면 임창백 부인도 내심 잘 됐다, 생각하고 절 집안사람으로 들였을까요?”

    그녀가 어찌나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는지, 꼭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오히려 루안이 조금 화가 난 듯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오?”

    지온이 웃었다.

    “사저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어 했으니 제가 일을 더 크게 벌여주려고요. 그래야 사저께서 준비한 것들이 허사가 되지 않겠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꿀물을 두 잔 따라, 한 잔은 임창백부 막내 공자의 입으로 따라 넣었고 다른 한 잔은 그의 몸에 뿌렸다.

    정자 안에 달콤한 냄새가 더욱 진동하기 시작하자 지온이 코와 입을 막고 루안을 바라보았다.

    “기왕 돕기로 하신 거, 더 확실하게 도움을 주시는 게 어때요?”

    * * *

    “대체 하고픈 말이 무엇이오?”

    유모지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앞의 어린 선고를 보고 있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 전 잠깐 쉬던 중에 이 어린 선고가 자신을 찾아왔다.

    일이 있어 찾아왔으면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어린 선고는 그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짜증스레 질문까지 던지자, 선고는 이제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한 표정이 되었다.

    “저, 저는…… 지 사저…….”

    유모지가 멈칫했다.

    “지 사저? 지금 이야기하는 사람이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를 말하는 거요?”

    어린 선고는 더듬더듬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 사저께서, 그러니까 지 사저께서 이야기하시길…….”

    “이야기하길, 뭐라 했소?”

    “둘째야!”

    별안간 뒤쪽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그에 마치 죄를 저지르다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매우 놀란 어린 선고가 빠르게 한 마디를 뱉었다.

    “아, 아닙니다…….”

    그리곤 그대로 뛰어 가버렸다.

    “이보시오!”

    유모지는 더욱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가온 유신지가 멀어지는 어린 선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나도 모르겠다니까?”

    황당하다는 듯 유모지가 말했다.

    “나더러 할 말이 있다더니 한참을 제대로 말을 못 하는 거야. 그러더니 지 사저란 한 마디 말만 던져놓고 저러고 가버렸어.”

    “음?”

    유모지가 씩씩거렸다.

    “지온 소저라는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일이 있으면 말을 할 것이지! 왜 궁금하게 사람을 불러 놓고 말을 안 해?”

    특히나 자신처럼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은, 정말 괴로워 죽을 것 같지 않던가!

    그러나 유신지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어떻게 된 것이냐? 사람이 들어온 처음부터 소상하게 이야기 해봐.”

    그의 그런 모습에 유모지는 더욱 머리가 어지러웠다.

    “큰형, 왜 그렇게 신경을 써?”

    “어서!”

    유모지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선고의 행동들을 죽 설명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아무런 내용도 전하지를 않더니, 나중에 지 사저가 내게 무슨 말을 전하라고 했다고, 지 사저가 자기를 보냈다고 했어. 큰형?”

    유신지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긴 듯싶다. 가자, 우리가 가서 사람을 찾아봐야겠다. 큰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움직여!”

    “큰형!”

    유모지의 얼굴에 당황이 가득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데!”

    그는 자신이 멍청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왜 똑같은 일인데, 큰형은 듣자마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유신지가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그 어린 선고가 왜 온 건지 눈치 못 챘어?”

    “뭘?”

    “그렇게 눈치를 보는 건 분명 지온 소저가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와달라고 한 거겠지. 너도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냐?”

    “……그치.”

    유모지는 속으로 여전히 소설책 내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지 생각하고 있었다.

    유신지는 밖을 향해 걸으며 말을 이었다.

    “남녀가 단둘이 따로 만나는 게 무슨 뜻이더냐? 더구나 혼약이 있었던 이들끼리.”

    유신지의 언급에 유모지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설마 지온 소저가…….”

    차가운 눈으로 유모지를 흘긋 본 유신지가 그의 뒷말을 끊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조금 전에 너도 지온 소저를 보지 않았느냐? 그녀가 널 잊지 못해 애타던 사람으로 보이더냐?”

    유모지는 강하게 항변을 해보았다.

    “마음으로 잊지 못할 수도 있지, 꼭 입 밖으로 이야기를 해야 해?”

    “하아…….”

    한숨을 쉰 유신지가 바보 같은 질문엔 대답도 하기 싫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네게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그 말은 중간에 둘 모두를 이을 수 있는 고리가 있다는 거지.

    이미 파혼한 남녀가 몰래 만나는 것이 무엇이 좋은 일이겠느냐? 그녀에게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중간에 수작을 부린 것 같다.”

    이야기를 듣고 잠시 멍하게 있던 유모지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상황의 가닥을 잡았다.

    “그러니까 큰형 말은, 누가 지온 소저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단 거야? 하지만……내가 가지 않았잖아. 그런데 누굴 몰래 만나!”

    “너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더욱 차갑게 굳은 유신지가 영령당에 들어가, 한 칸 한 칸 방 안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너와 몰래 만나려고 했다가 다른 이를 만났다면, 진짜 큰일이다.”

    그제야 이해한 유모지가 마른 웃음을 지었다.

    “나더러 소설을 쓴다더니, 큰형이야말로 제대로 구먼. 어린 선고잖아. 어떻게 큰형 눈엔 그게 그렇게 흘러가?”

    “내가 소설을 쓴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하지만 만에 하나, 아니면? 그럼 여인의 일생이 망가지는 거야!”

    한참을 찾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유신지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유씨 가문이 오송원에 있었으니 일을 벌인 곳 역시 그 근처일 것이다. 대체 어디 있는 것이냐…….’

    바로 그때, 밖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이 무척 컸던 탓에 오송원에 있던 이들이 거의 다 듣고도 남았다.

    유신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런!”

    동그랗게 굽은 창 아래, 찻잔을 들고 고개를 돌리던 소녀를 떠올리자, 그의 가슴으로 차가운 기운이 들이쳤다.

    ‘너무 늦은 것인가? 진짜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해야 그녀를 구할 수 있지?’

    이 정도로 악의를 품은 상대라면, 둘째를 대신할 사내 역시 좋은 사람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계속 흘러가면, 결국 지 소저는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도 몰라. 이 일을 덮어야 할까? 우리 가문의 힘이라면 가능하겠지?’

    유신지는 미친 듯이 대책을 떠올리며, 비명이 들려온 곳을 향해 질주했다.

    ‘정자다! 인적이 드문 그 정자야!’

    * * *

    유신지는 계속해서 달렸다.

    생기 넘치는 소녀가 이대로 시들어 버리는 것을, 그는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자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의 가슴도 더욱 빠르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태사부가 비록 강한 세를 누리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자로 가는 길에 본 이들 중에는 권력가와 고관대작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이들이, 태사부가 권세를 이용하고 인정에 사정해본들 과연 입을 다물까? 그리고 그 전에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는, 유씨 가문이 적극적으로 이 일에 나서게 할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더구나 우리 가문의 결정권자는 내가 아니다.’

    드디어 정자 앞까지 도착한 유신지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미 정자 주변을 가득 메우고 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녀 구분할 것 없이 흥미진진한 얼굴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 모호한 표정으로 속닥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늦었나.’

    가슴으로 불이 솟구친 유신지는 노기가 치솟았다.

    ‘조실부모하여 고아가 된 여아가 어찌 다른 이에게 이리 큰 원한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아직 꽃다운 나이의 소녀에게 이런 수를 쓰는 자는 대체 어찌 이리 악랄하단 말이냐!’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향한 그의 발걸음은 너무도 강한 분노로 조금씩 떨렸다. 그리고 인파의 가장 끝에 서 있는 이의 신형이 눈에 들어왔을 때, 유신지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능양진인의 애제자 화옥? 저자가 이리 독한 흉계를 꾸민 것인가? 동문의 사자매 사이에 어찌 이런 일까지 벌일 수 있단 말인가!’

    묻고 싶었던 유신지가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던 찰나…….

    “어떻게 당신들이!”

    비명과도 같은 음성이 울렸다. 화옥은 그보다 더욱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흠칫한 유신지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 마디가 떨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정자 안에는 확실히 그의 생각처럼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다만, 등장인물이 사내 두 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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