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6)화 (46/385)
  • 46화. 대인께서 계셨잖아요

    법회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다.

    내원에 들어온 많은 사람 역시 법회를 보기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억지로 오전을 버텨내고 쉬는 시간이 찾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위씨 부인이 지서를 데리고 사라졌다.

    지온이 물었다.

    “셋째 숙모님, 먼저 식사를 하시겠어요?”

    장씨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씨 부인만큼 그렇게 절박하지 않았던 장씨 부인은, 일정을 어찌 정하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지온은 의운을 불러 장씨 부인을 모시고 가게 한 후, 자신은 내원을 돌아다녔다.

    두어 바퀴쯤 돌았을 때 결국 서아가 참지 못하고 작게 물었다.

    “아가씨, 지금……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님을 뵙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죠?”

    지온이 서아를 흘긋 쳐다보자 서아가 말했다.

    “유씨 가문 사람들은 저쪽에서 쉬고 있는데 지금 계속 그 주변을 돌고 계시잖아요.”

    지온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 말도 하고, 담이 커졌구나.”

    눈치를 본 서아는 지온이 화가 나지 않은 듯 보이자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되어 말씀드렸어요. 아가씨의 혼사와 관련된 일을 도성 사람들이 다 알게 된 상황이잖아요. 여기서 더 다른 문제가 생기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러면 아가씨께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너도 그리 생각할 정도면, 다른 사람도 올 때가 됐겠지?”

    서아가 멈칫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지온이 대답할 필요도 없이 곧장 누군가가 나타났다.

    “사매, 식사하러 가지 않고?”

    화옥의 미소가 어찌나 밝고 명랑한지, 서아까지 멍해질 정도였다.

    ‘뭐지? 지난번엔 우리 아가씨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화옥 선고가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거지?’

    지온 역시 웃음을 지으며 이에 대꾸했다.

    친근한 것으로는 우위를 나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저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저는 아직 배가 안 고파서 좀 걷고 있었어요.”

    “그래?”

    얼른 작은 누각을 훔쳐본 화옥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배는 안 고파도 쉴 건 쉬어야지. 오후가 또 얼마나 길 텐데!”

    “그건…….”

    “우리 저쪽에 있는 정자로 가자. 여기서 가깝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방해도 안 받고…….”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그곳은 오송원 구석진 곳에 있는 인적 드문 정자였다.

    정자라곤 하지만, 문과 창문까지 달린 곳으로 규모가 작아 손님을 배치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위치는 무척 좋아 귀인들이 휴식하는 누각과도 아주 가까웠다.

    지온의 눈이 반짝 빛났다.

    빙글빙글 웃는 화옥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지온을 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 조방궁의 이름값이 크다곤 하지만 사실 황가의 집안 노복이지. 물론 사매는 다르지만 말이야. 지금은 잠깐 와있는 것뿐이고 사매는 세가의 소저니까 앞으로 높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겠지? 그때 되면 또 이 사저가 사매에게 여러 가지로 잘 부탁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 * *

    화옥이 지온을 이끌고 정자 안으로 들어가자 정자 안에는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오늘은 법회가 있는 날이라 채식을 해야 해. 사매도 오늘만 조금 참아.”

    지온은 그녀가 직접 전해주는 밥그릇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사저.”

    화옥이 상 위에 올려진 음식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째 탕이 없어? 탕 없이 밥이 넘어가?”

    그리곤 자연스레 서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사매, 네 시녀에게 식당에 가서 이야기를 전하게 해줄 수 있을까?”

    지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하지만 서아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었다.

    “아가씨…….”

    “다녀와.”

    서아의 말을 끊은 지온이 상 위에 음식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먹고 싶은 것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가면서 하로에게 들려서 음식 두 가지만 해오라고 해. 하로가 요리를 잘하잖아.”

    화옥의 만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본인이 직접 이야기를 하면 더 좋지!’

    “내가 생각이 짧아서 사매가 식사도 어렵게 됐네.”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의 화옥이 물통을 집어 들었다.

    “날도 더운데, 사매 먼저 꿀물부터 한 잔 마셔.”

    “좋지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지온이 꿀물을 받아 들었다.

    화옥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가 꿀물을 받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을 숨도 안 쉬고 지켜보았다.

    ‘이거 너무 쉬운데! 역시 저걸 상대하는데 그렇게 머리를 쓸 필요가 없었어.’

    지난번에 향수를 꺼내 든 것은 그저 우연이었던 게 분명했다.

    ‘이번에 그런 우연은 절대 없게 만들어 주지!’

    내심 다짐한 화옥은 여전히 웃음을 띤 채, 계속해서 지온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지온이 피곤한 모습을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내가 가서 재촉하고 올게.”

    “사저, 저 너무 졸려요.”

    지온이 갑자기 화옥의 소매를 잡으며 말하자 화옥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후라 춘곤증이 오는 것도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여기가 조용하니 내가 다른 이들에게 지키고 있으라 할 테니, 사매는 걱정하지 말고 쉬고 있어.”

    “그럼 사저는요?”

    지온이 눈을 비볐다.

    “아직 식사도 안 하셨잖아요?”

    “시녀에게 요리를 해오라고 했잖아. 시녀들이 오면 그때 같이 먹으면 되지.”

    지온이 순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요. 사저, 몰래 혼자 먹으면 안 돼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지온의 손에 힘이 빠지며 고개가 푹 떨어졌다.

    “사매! 사매!”

    화옥이 그녀를 흔들었지만, 지온은 미동조차 없었다.

    미소를 지운 화옥이 음산하게 말했다.

    “사매, 사매가 높은 분들과 엮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이 사저가 큰 선물을 준비했어.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그리고 지온을 안아 올린 화옥은 그녀를 정자 한쪽에 자리한 의자에 기대어 놓았다.

    자신이 만든 걸작을 감상한 화옥이 가볍게 정자를 나섰다.

    문이 닫히자 정자 안으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 * *

    화옥이 감시를 위한 남겨둔 여관에게 물었다.

    “유씨 가문의 공자 둘은?”

    그녀가 대답했다.

    “작은 누각의 편청 안에 있어요.”

    “낯설 것 같은 사람에게 시켜서 말을 전하고 와. 소심한 척하면서 전하라고 해, 진짜 오면 안 되니까.”

    “네.”

    몰래 만나기는 만나되, 절대 유씨 가문까지 끌고 들어가선 안 되었다. 그러다 유가가 진심으로 나오면 안 되지 않겠는가?

    화옥은 자신이 유씨 가문을 손에 놓고 장난칠 수 있을 정도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유씨 가문의 공자들에게는 그저 시늉만 하고, 진짜 데려올 사람은 이미 그녀가 정해둔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래야만 유씨 가문의 공자와 몰래 만나려다 다른 사내 좋은 일만 시켜버린 연극을 완성해 그 계집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었다.

    “제대로 지켜. 괜히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네.”

    * * *

    문과 창을 닫은 정자 안은 점점 더 더워지기 시작했다.

    정자 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아무런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뒤쪽에 있던 창문이 슬쩍 움직이더니 스륵, 작은 틈이 열렸다.

    누군가 그 작은 틈으로 안을 살폈다.

    의자에 기댄 소녀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지만, 작은 누각에선 걸음 소리와 함께 유씨 가문의 공자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창으로 지켜보던 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창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달콤한 향기가 얼굴로 날아들었다.

    입과 코를 막은 그는 그녀를 깨우려 손을 뻗다 갑자기 멈췄다.

    그녀가 기대고 있는 곳은 어두웠다.

    ‘더구나 아무런 경계도 없는 모습이라니…….’

    고개를 돌린 그가 손으로만 그녀를 슬쩍 흔들었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흔들었다.

    그러자 기대있던 그녀의 몸이 미끄러지며 떨어지려는 것이 아닌가!

    그가 황급히 팔을 뻗어 미끄러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멍하니 있던 그는 그제야 그녀가 진짜 혼절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대체 어떻게 된 여인이……!’

    그가 바득 이를 갈며 품 안에 있던 자기병을 꺼냈다. 환약 한 알을 따라낸 그가 그녀의 입속으로 환약을 밀어 넣었다.

    “으음…….”

    잠시 후, 품에서 들려온 음성은 손 아래로 느껴지는 몸만큼이나 부드러웠다.

    그는 문득 당인(*糖人: 녹은 설탕을 모양을 내어 굳힌 과자의 한 종류)이 떠올랐다.

    당인을 만들려면 먼저 뜨겁게 가열해야 한다. 설탕에 열을 가하면 금방 호박색으로 변하며 끈적끈적한 액체로 바뀌게 되어, 모양을 만들기 좋게 말랑하게 변한다.

    달콤하여 한입 크게 깨물어 먹고 싶기도 하고, 이대로 변치 않게 오랫동안 보관하고 싶기도 한 당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던 중, 드디어 그녀가 깨어났다.

    이윽고 안심한 그가 손을 풀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루 대인님?”

    그녀가 느슨해진 옷을 다시 챙기는 것을 느낀 루안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옷 정리가 끝나자 다시 고개를 돌린 루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게 당신이 말한 반격이오?”

    이마를 문지르며 지온이 가볍게 웃었다.

    “대인께서 계셨잖아요.”

    “…….”

    그의 차가운 비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럼 내가 찾아와 구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오?”

    지온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신기하단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화가 나셨나 보네요?”

    치솟는 화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린 루안은, 천천히 숨을 깊게 내쉬었다.

    “화내지 마세요.”

    지온이 천천히 말했다.

    “문제가 생긴 것도 다 대인 때문인걸요.”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지온이 그녀의 소매를 바라보며 말했다.

    “집에서 나서기 전에 정신을 차리는 약을 손수건에 발라 놨었거든요. 그런데 대인께서 손수건을 가져가셨잖아요.”

    멈칫한 루안이 소매 속 손수건을 꺼냈다.

    조금 전엔 제대로 냄새를 맡지 않아 몰랐지만, 다시 맡아보니 역시 익숙한 향기 속에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대인께서 제때 나타나셨으니 제가 용서해 드릴게요.”

    지온이 헤헤, 하고 웃었다. 

    그 모습에 루안은 불쾌해져서 속으로 외쳤다. 

    ‘누가 용서해 달래! 네가 뭔데 날 용서해!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살인 충동을 참아내며 루안이 묻자, 지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봐야 사통하는 것을 걸리기밖에 더 하겠어요? 화옥은 그럴 배짱이 없어요. 제가 진짜 이곳에서 일을 당하면 떨어지는 것은 조방궁 사람들의 명예거든요. 저는 대단한 명성을 망쳤으니 출가라도 하죠, 뭐.”

    그러더니 그녀가 방글방글 웃으며 손수건을 흔들었다.

    “조방궁이 금방 제 것이 될 테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화옥이 낸 수는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에게 있어, 아주 독한 한 수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특정한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사통하는 것을 걸렸다면,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출가하거나, 화옥이 데려온 이에게 시집을 가거나.

    어떤 길이든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겠지만, 자신은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상관없었다.

    그러니 이런 흉계 따위, 그녀에게 있어선 조금의 살상력도 없는 것이다.

    “혹시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걱정도 안 되오?”

    루안이 물었다.

    “대인께서 말씀하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란 것이 뭔가요? 다른 이가 절 범하는 걸 말하는 건가요?”

    지온이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저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을 텐데, 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면 되죠.”

    루안의 냉소가 이어졌다.

    ‘소탈하기가 말로 다 못하겠군, 말로 다 못하겠어! 여인이라면 목숨처럼 생각하는 정절조차 이 여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인가?’

    “그리고…….”

    그녀의 시선과 함께 헤실헤실 웃는 미소가 넘어왔다.

    “루 대인께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잖아요, 그렇지요?”

    루안은 갑자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를 하는 사이, 밖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루안이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이 왔소. 이제 어쩔 것이오?”

    그러자 얼른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기대앉은 지온이 옷을 헐겁게 풀었다.

    “대인, 반드시 제때 절 구해주셔야 합니다.”

    밖에서 사람이 금방이라도 들어올 듯하자, 루안은 어쩔 수 없이 창문으로 다시 뛰어나가 창까지 원래대로 닫았다.

    그가 창문을 닫은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빛 아래 절색의 소녀를 본 상대의 호흡은 금방 거칠어졌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문부터 닫았다.

    그가 의자에 기댄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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